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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문제는 언제까지 이렇게 싸울 수 있느냐는 건데…….’
승한은 성화를 이용해 거의 모든 악마들을 견제하고 있었다. 악마들은 자신의 주위에 넓게 퍼진 성화의 힘에 저항하며 천사들과 싸우는 통에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차이는 아주 근소한 차이일 뿐이었다.
화력이 약한 성화는 어디까지나 귀찮은 존재일 뿐, 위력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이렇게 광범위하게 펼치기 위해서 승한은 어마어마한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아무리 승한이 성화에 대한 친화력이 높아졌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싸울 수는 없었다.
슬슬 피로가 느껴졌다. 천사들과 악마들의 싸움은 쉽게 끝이 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서로 힘이 너무나도 엇비슷한 까닭이었다.
‘문제는 악마들의 수가 천사들보다 많다는 것이지.’
승한은 성화를 이용해 악마들을 견제하면서 그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었다.
악마들의 수는 오십이 조금 넘었다. 반면, 천사들은 그보다 조금 적은 마흔 여덟이었다.
만약 승한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천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렸을 것이다. 지금껏 천사들이 마물들에게서 신수들이 밀리는 모습을 왜 그냥 지켜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만으로 악마들을 막아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이거 골치 아픈데.’
승한은 끙, 하고 작게 앓았다. 어쨌거나 천사들이 악마들을 막아주고 있는 지금, 어떻게 해서든 승기를 잡아와야 한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그게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나.’
승한은 고민을 거듭하다 선택을 내렸다. 지금 당장은 이것 외에는 상황을 반전시킬 방법이 없었다.
[4096000타임 포인트를 소모하였습니다.]
[‘능력 – 성화’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성화에 대한 친화력이 상승합니다.]
승한은 결국 가지고 있던 타임 포인트 중에서 400만 타임 포인트를 더 소모했다. 이것으로 승한에게 남은 타임 포인트는 대략 1200만. 그래도 아직 [강신]을 두 번 더 사용할 수 있었다.
성화에 대한 친화력은 아무래도 5레벨 이상부터 꾸준히 상승되는 모양이었다. 성화의 위력이 강해진 만큼 승한의 몸에 가해지는 부담도 덩달아 커졌는데, 친화력이 상승한 만큼 그 부담이 조금은 덜어졌다.
‘그래도 완전 괜찮지는 않은데.’
승한은 자신의 몸속에 있던 성화의 힘이 이전보다 훨씬 커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이 그 힘을 완전히 자유롭게 다루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도 말이다.
능력의 레벨이 높아지면서 덩달아 힘이 상승하는 폭도 커졌다. 성화의 레벨 하나의 차이는 이전과는 비교하기가 어려웠다. 6레벨의 성화와 비교하면 5레벨의 성화는 작은 불쏘시개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그만큼 승한의 몸에 더해지는 부담은 커졌지만 말이다.
‘그럼 어디…….’
승한은 성화를 작게 응축해 사방으로 퍼뜨렸다. 작은 구슬처럼 응축된 성화가 사방을 뒤덮으며 반딧불이처럼 느리게 떠올랐다.
성화의 불길이 사라지고, 황금색의 구슬이 사방에 뿌려지자 악마들이 잠시 멈칫거렸다. 조금 뜨거운 정도에 불과했던 성화의 공간과는 달리, 작게 돌아다니는 황금색의 구슬에서 느껴지는 힘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펑-.”
콰콰콰쾅-!
승한이 날려낸 성화의 구슬이 일제히 폭발을 일으켰다. 수백 개의 구슬들이 폭발하며 그 일대를 황금색으로 물들였다. 거대한 폭발에 천사들이 주춤 뒤로 물러났지만, 이내 성화의 열기가 자신들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음을 깨달았다.
“뭐 해요! 죽여야지!”
승한은 그런 천사들을 향래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만들어낸 기회인데, 쓸데없이 겁을 먹어 그 기회를 날려버린단 말인가.
승한의 외침에 천사들이 성화의 폭발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속에서 천사들은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았고, 반대로 악마들은 뜨거운 열기에 고통스러워했다. 6레벨의 성화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그 위력은 스스로 힘을 사용한 승한조차도 놀랄 정도였다.
“하아, 지치네.”
승한은 성화의 힘을 사용하고서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무지 계속해서 싸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온 몸의 힘이 쭉 빠져나갔다.
그 전부터 성화를 계속해서 사용하느라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단 한 번 능력을 사용한 것만으로 이렇게까지 몸에 힘이 빠져나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승한은 자신이 만든 성화의 폭발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대단하긴 하네.’
황금색의 거대한 폭발. 그 영향에 휘말린 마물들은 이미 성화에 몸이 까맣게 타서 죽어버린 상태였다. 단순히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만으로도 이 정도일진데, 직접적으로 그 폭발에 휘말린 악마들은 어떤 상태일까?
지금까지 승한이 퍼뜨리고 있던 성화가 작은 모닥불이었다면, 방금 전 성화의 폭발은 집 한 채를 송두리째 태운 것이나 마찬가지인 거대한 불이었다. 변화를 꾀하기 위해 힘을 한꺼번에 쏟아낸 덕분도 있지만, 성화의 레벨에 오른 덕분이 컸다.
‘더 싸우기는 무리겠지만.’
승한은 녹초가 되어버린 몸을 움직이기가 어려워 조금 쉬려고 했다. 그렇게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중, 승한의 몸을 새하얀 빛이 감쌌다.
화아아악-.
익숙한 빛이 몸을 감싸며 피로가 풀리기 시작했다. 승한은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자신의 등 뒤에서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 헌터가 둘이 보였다.
“주희?”
“이렇게 가까이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주희의 옆에 있는 헌터는 낯선 얼굴이었다. 한국인은 아니었고, 주희와도 아는 사이인 듯이 보이는 미국인 헌터였다. 승한은 그녀도 역시 회복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음을 알고는 씩 웃었다.
“그래도 네가 도움이 될 때도 있네.”
두 명의 헌터가 승한의 힘을 회복시키는데 도움을 주고 있었다. 승한은 서서히 힘이 풀렸던 몸이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주희의 능력도 꽤나 뛰어났지만, 그녀의 옆에 있는 헌터도 만만치 않았다. 하긴, 7스테이지까지 통과할 정도라면 적어도 주희와 같은 수준의 헌터라는 뜻이니 그럴 만도 했다.
“이쪽은 누구셔?”
“저와 같이 미국에 소속된 헌터 에밀리씨라고 해요. 능력은 저와 비슷하긴 한데, 회복 능력 하나를 제외하고는 방어 능력에 치중되신 분이죠.”
“방어 능력이면 왜 다른 헌터들을 돕지 않고…….”
“방어 능력을 가지고 있는 헌터들은 차고 넘치니까요. 반면 회복 능력을 가지고 있는 헌터는 부족하고요. 이렇게 헌터들이 많은데, 부족한 계열의 능력에 힘을 쓰는 게 낫지 않아요?”
맞는 말이었다. 개개인의 싸움에서는 자신의 장기를 활용하는 게 정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수의 싸움에서는 다수의 단점과 부족한 점을 보완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볼 수 있었다. 에밀리라는 헌터는 바로 그러한 점을 알고 다른 헌터들의 회복을 돕고 있었다.
“위험하게 왜 마물들과 안 싸우고 악마들과 싸우고 그래요? 그러다 죽으면 어떻게 하려고.”
“어차피 언제고 악마들과는 싸울 수밖에 없어. 천사들만으로는 악마들을 다 잡을 수 없으니까.”
“그래도…….”
“그리고 헌터들 중 사실상 악마와 싸울 만한 사람이 나 말고 더 있어?”
승한의 물음에 주희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최고로 잘 나간다 하는 헌터인 루이즈만 하더라도 악마와의 싸움에서 속수무책이었다. 힘 하나만큼은 발군인지라 몇 번 악마를 정면에서 막아서기는 했지만 승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사실상 헌터들 중 승한 외에 악마를 상대할 만한 헌터는 없었다. 그렇다고 수적으로 부족한 천사들이 악마들에게 당하도록 두고만 볼 수도 없으니 승한은 그들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얼른 회복이나 도와 줘. 그렇지 않아도 회복이 가능한 헌터를 찾아서 부탁을 하려고 했는데, 잘 됐네.”
“다른 헌터들 수십, 수백 명을 회복시키는 것보다는 오빠 한 명을 회복시키는 게 훨씬 나을 테니까요.”
“잘 아네.”
승한은 그녀가 자신의 힘을 모두 회복시켜줄 때까지 잠시 쉴 생각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대체 이게 뭐야?’
승한의 몸을 살피며 그를 회복시키던 주희와 에밀리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함께 승한을 회복시키고 있던 두 사람은 동시에 무언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말로만 들었는데… 김승한 헌터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겠네요.”
에밀리의 말에 승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에밀리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는 영어였지만, 그녀가 하는 말은 승한이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스테이지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말에 전음구와 같은 효과가 적용되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사람들을 회복시키다 보면… 그 사람을 회복시키는데 걸리는 시간이 모두 다릅니다. 금방 회복이 되는 헌터도 있고, 비교적 오래 걸리는 헌터도 있죠. 각자의 능력이나 레벨에 따라 회복에 걸리는 시간이 달라지는 겁니다.”
떨어진 힘은 부상과는 다르다. 메마른 우물에 물을 들이 붓는 것을 회복이라고 한다면, 그 우물의 크기는 제각이 모두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헌터들을 우물에 비교하자면 승한은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깊었다. 아니, 우물이라고 할 수조차 없었다. 거대한 강, 혹은 바다와 같은 크기와 같이 보였다.
아무리 주희와 에밀리가 힘을 쏟아 부어도 다 차질 않았다. 분명 승한은 조금씩 힘이 회복되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승한 스스로의 회복력에 주희와 에밀리의 능력이 더해진 것뿐이었다. 두 사람의 덕이 크다고만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럼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 겁니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승한씨가 가진 그릇이 워낙 커서…….”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대답. 난감했다. 가능한 빠르게 회복해서 천사들을 도와야 하는데, 그것이 되지 않는다니.
‘차라리 [불굴의 육체]를 하나 더 올릴까?’
지금까지는 괜찮았지만 6레벨의 성화는 5레벨의 [불굴의 육체]로는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아마 회복이 다 끝나더라도 지금 이 상태로는 계속해서 성화를 사용하기가 부담이 될 것이다.
[불굴의 육체]는 승한이 가진 힘의 그릇이자, 근력과 맷집이었다. 힘의 크기뿐만이 아니라 접근전에서 악마들과 싸우게 될 경우에도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다.
[보유 타임 포인트 : 12281685]
승한은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타임 포인트를 확인했다. [불굴의 육체]의 레벨은 5. 다음 레벨에 필요한 타임 포인트는 200만 정도였다.
‘한 번은 괜찮아.’
[2048000타임 포인트를 소모하였습니다.]
[‘능력 – 불굴의 육체’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불굴의 육체]를 올리자, 이제 승한이 가지고 있는 타임 포인트는 1000만이 조금 넘었다. 여전히 [강림]을 두 번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수치였다. 승한은 [불굴의 육체]의 레벨이 오르자, 이전보다 몸에 힘이 넘치는 것을 느꼈다.
‘좋아.’
승한과 마찬가지로 그를 치료하던 주희와 에밀리 역시 승한의 몸에 변화가 생겨났음을 알 수 있었다. [불굴의 육체]는 다른 헌터들도 많이 가지고 있는 흔한 능력이라 그녀들은 승한이 타임 포인트를 소모해 능력의 레벨을 올렸음을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오래 이러고 있을 수는 없겠습니다.”
승한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승한에게서 손을 떼며 주희와 에밀리가 물었다.
“갑자기 왜…….”
“옵니다.”
승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듀란달을 꺼내들었다. 동시에 등 뒤에 메어두었던 방패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