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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타임-171화 (17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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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마물들과 신수들이 대치했다. 그들의 사이에는 헌터들이 있었고, 마물들의 위로는 악마가, 신수들의 위로는 천사들이 있었다.

마물들은 어느 정도 다가오고는 황무지 위에서 멈춰있었다. 신수들은 자신들과는 정 반대되는 존재인 마물들을 노려보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마물들 역시 신수들을 노려보았다.

‘숨 막히는군.’

신수들도, 마물들도, 천사도, 악마도, 어느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헌터들 역시 어느 누구 하나 선뜻 마물들을 향해 달려들지 못했다. 하늘 위를 거닐고 있는 악마들과 천사들의 존재감에 압도된 것이다.

악마들의 모습은 천사들과는 달리 제각이 모두 달랐다. 뼈밖에 없는 거인과 같은 모습이기도 했고, 용의 모습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언뜻 보아서는 마물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단지 그들을 악마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마물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감 때문이었다.

아마 이 자리에 있는 일부 헌터들은 마물들과 악마의 차이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악마가 어떤 존재인지도, 왜 자신들이 그들과 싸워야 하는지도.

‘왜 움직이지 않지?’

승한은 벌써 몇 분 째 대치하고 있는 신수들과 마물들 사이에서 눈치를 살폈다. 그 역시 마찬가지로 함부로 움직이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마물들이 먼저 덤비기라도 하면 모를까, 그러기 전까지는 먼저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제한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악마들 중 하나가 마물들의 앞으로 나섰다. 승한이 쓰러뜨렸던 악마와 비슷하게 거대한 뼈로 이루어져 있는 악마였다. 조금씩 다가오는 악마를 향해 헌터들이 경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악마의 시선이 헌터들이 아닌, 그 위쪽의 천사들에게로 향해있었다.

“쥐새끼들을 불렀군.”

악마의 목소리가 들판 전체에 퍼졌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일전에 승한이 악마를 만났을 때, 산이 울리는 듯하던 목소리와 똑같았다.

“쥐새끼라… 네가 쥐새끼라 부르는 인간에게, 얼마 전 너희들 중 하나가 죽지 않았나?”

천사가 악마의 말을 받아쳤다. 그들의 말에 악마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주위로 마기가 울렁이는 것으로 보아 기분이 썩 상한 모양이었다.

승한은 악마와 천사의 대화에서 자신의 세상에 나타났던 악마가 눈앞에 있는 악마들과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생긴 모습도 비슷했고, 바로 얼마 전에 인간들에게 악마가 당했다는 것을 보면 거의 확실했다.

“그렇게 우리가 무서웠나?”

악마가 천사들을 조롱했다. 자존심을 긁는 말이었다. 하지만 천사들은 의외로 그의 말에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사소한 자존심 따위를 건드리려는 건가?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우리는 너희가 무섭지 않을뿐더러, 반드시 처리해야 할 악으로 여길 뿐이다.”

“혓바닥 한 번은 참 잘 굴러가는군.”

치직, 치직-.

그 때, 황무지와 맞닿아 있는 들판의 풀들이 빠르게 마르기 시작하더니 모래가 되어 흩어졌다.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로 사막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풀들이 죽어갔다. 신수들이 울부짖기 시작했다. 하늘의 먹구름이 점점 푸른 하늘을 덮었다.

“그런데 이거 아직 많이 부족한 모양이군.”

“부족할지 어떨지는 봐야 알겠지.”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악마가 손을 들었다. 멈춰 있던 마물들이 꿈틀거리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에 헌터들이 각자 무기를 들고 경계했고, 금방이라도 싸울 준비를 마쳤다.

“죽여라.”

그의 목소리가 지상을 뒤덮는 순간.

키아아아아아아아-!

끔찍한 울음소리와 함께 마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만 명의 헌터들이 일제히 능력을 사용했다. 거대한 검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마물들을 향해 불의 장막이 뻗어갔다. 황무지의 땅이 쩍쩍 갈라지고, 솟아올랐다. 수만 명의 헌터들이 각자의 능력을 뽐내기 시작한 것이다.

‘호오.’

승한은 헌터들이 퍼붓는 능력을 보며 작게 감탄했다. 마물들에게 힘을 빼느니, 악마를 상대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 생각해서 승한은 굳이 처음부터 성화를 사용하지 않았다. 헌데 예상 외로 헌터들의 저항이 꽤나 거셌다.

하나하나 능력의 힘이 꽤나 대단했다. 하긴, 모두가 7스테이지까지 통과할 정도의 실력을 가진 헌터들이니 당연했다. 이 자리에 있는 헌터들은 최고의 실력을 가진 헌터들뿐이었다.

콰득-.

그그그그극-.

비틀어진 지면 사이를 마물들이 비집고 나왔다. 헌터들의 능력에 얻어맞은 마물들이었지만 죽지 않은 마물들도 꽤 많았다. 더군다나 수가 워낙 많다 보니 죽은 마물들의 시체를 밟고 나타나는 마물들도 상당했다.

헌터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도 승한과 마찬가지로 8스테이지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마물들과 악마들을 모두 막아내고, 천사들과 신수들을 승리로 이끄는 것. 그것이 바로 헌터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근접 계열 헌터들은 앞으로!”

“버프 가능한 헌터 있습니까? 엄호해 주세요!”

근접 전투가 가능한 헌터들이 앞으로 나섰다. 제각기 무기를 가지고 있거나, 루이즈처럼 주먹을 사용하는 헌터들이었다. 몇몇 헌터들의 몸에는 환한 빛이 감싸졌다. 버프가 가능한 헌터들이 그들의 몸에 버프를 걸어준 것이었다.

윤재와 같이 원거리에서 공격이 가능한 헌터들은 뒤로 물러섰다. 헌터들은 자신이 능력이 가진 이점을 살려 공격과 수비, 그리고 지원을 나누었다. 승한은 근접 공격도, 원거리에서 지원도 가능했다. 하지만 바로 나서지는 않고 조금 뒤로 물러나는 선택을 했다.

헌터들의 행동에 이어 신수들이 움직였다. 신수들은 제법 영리해서인지 헌터들이 자신들의 아군임을 인지하고는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도와 마물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신수들이 가세하자 헌터들은 마물들을 상대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마물들은 분명 강했다. 검은 인영처럼 질긴 생명력은 가지지 않았지만, 피부도 질기고 덩치도 컸다. 마기로 이루어진 몸뚱이는 보통 사람들은 아마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일 것이다.

하지만 신수들 역시 마물들과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서로의 상극이 되는 존재이다 보니 힘 자체는 엇비슷했고, 거기에 헌터들이라는 변수가 등장하다 보니 신수들이 압도하는 양상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문제는 저것들인가.’

승한은 마물들과 신수들의 싸움을 지켜만 보고 있는 악마들과 천사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마치 이 싸움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처럼 방관하고 있었다. 어느 한 쪽도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악마들과 천사들, 그 두 존재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싸움은 전혀 달라질 것이다.

[천사의 가호가 전해집니다.]

[물리적, 비 물리적 피해에 대한 절대적인 방어막을 생성합니다.]

[단죄의 빛이 전해집니다.]

[모든 악(惡)에 대한 추가 피해 효과가 부여됩니다.]

그 때, 승한의 몸을 익숙한 빛이 뒤덮었다. 능력의 효과에 승한은 주위를 둘러봤다.

“주희?”

지원 능력을 가지고 뒤쪽으로 물러나 있던 헌터들 중, 주희가 있었다. 주희는 여러 명의 헌터들에게 자신의 버프를 걸어주고 있었는데, 승한을 발견하고는 버프를 걸어준 모양이었다.

“너도 여기 있었냐?”

“없을 이유라도 있나요? 그보다 오빠는 안 싸우고 뭐 해요?”

주희가 7스테이지까지 통과를 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길게 대화를 나누지 못해서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기다리고 있지.”

“뭐를요?”

“저것들이 움직이는 거.”

승한은 턱짓으로 멀리 하늘에 떠 있는 악마들을 가리켰다. 주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그녀 역시도 승한과 함께 하급 악마와 싸우며 그들이 어떠한 존재인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으… 진짜 싫다…….”

“나도 싫어.”

“하긴, 그러고 보면 오빠는 저 괴물들과 싸울 수준이 아니긴 하네요.”

주희는 승한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악마와의 싸움에서 그가 거의 대부분의 역할을 한 것도 말이다. 승한은 마물들이 아닌, 천사들과 함께 악마와 싸우더라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저 녀석들은 왜 움직이지 않는 거죠?”

“나야 모르지. 그렇다고 내가 먼저 움직일 수도 없고.”

그런 대화가 오고갈 때쯤, 악마들이 아닌 천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날개를 펄럭이며 무기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에 악마들도 마찬가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움직일 마음이 든 건가?”

가장 앞에 있던 악마가 물었다. 그러자 백의를 입고 있던 천사는 기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대답했다.

“이미 칼은 뽑았다.”

“하긴, 쥐새끼들을 데리고 온 순간 이미 약속은 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지.”

“……약속을 먼저 깬 건 너희들이다.”

“약속을 깨다니? 알다시피 우린 조금도 손을 쓰지 않았어. 이 땅을 이렇게 만든 건 우리 자식들이지. 우린 너희가 움직이기 전까지는 이곳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존재들 아닌가?”

악마의 말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재미있다는 듯, 그는 천사들을 마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 너희가 움직이기 전까지는 말이지.”

“고작 그걸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모르는 척 묻지 마라. 너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았나? 그래서 우리가 나타나고, 우리 자식들이 이곳을 헤집고 짓밟음에도 움직이지 못한 것이겠지. 우리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말이야.”

악마들은 직접적으로 어떤 세상에 손을 쓸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약속이었다. 승한의 세상에 악마가 아닌 다른 괴물들이 나타났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급 악마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많은 악마들이 하나의 세상에 나타나 그곳에 손을 쓰는 건 분명히 약속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그들은 이곳 세상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직접 손을 써 해를 끼치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아마도 그것은 천사들이 이곳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일 것이다.

“뭐, 어차피 이 쥐새끼들이 나타난 순간부터 약속의 당위성은 깨어졌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움직이더라도 문제가 없지.”

“악마라는 게 생각보다 말이 많았군.”

“킥킥. 그래, 이제부터는 입이 아니고 몸으로 대화를 나눠 보자고. 너희가 아끼는 신수들이 다 죽어 없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마.”

스스스스-.

악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천사들 역시 악마들의 힘에 대항해 서로의 기운을 뿜었다. 희고 붉은 기운이 천사들의 몸에서 뿜어졌다.

마기와 신성한 기운, 그리고 불과 같은 기운 따위가 섞여들었다. 그 기운에 휘말린 신수들과 마물들이 고통스러운 울음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수십의 악마들과 천사들이 내뿜는 기운으로부터 버틸 수 있는 존재는 이 자리에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승한은 [올림포스]의 힘을 사용해 천사와 악마들이 내뿜는 기운으로부터 몸을 지켰다. 그나마도 천사들은 신수들이나 헌터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힘을 조절하고 있었고, 악마들의 힘을 막아내고 있었기에 겨우 버틸 수 있는 것이었다.

‘……끼어들지 말까.’

순간 그런 고민이 될 정도로 살벌했다. 하나하나가 승한에 못지않은… 아니, [강신]을 사용하지 않은 승한은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존재들이었다.

당장 하급 악마만 하더라도 승한이 혼자서 쓰러뜨린 것도 아니지 않았던가? 막상 그들이 나서기 시작하자, 승한은 자기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어쩔 수 없나?’

승한은 결국 타임 포인트를 쓰기로 결심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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