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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조건 없는 강림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말하자면 조건만 갖추면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소리기도 하지.
“약속이라…….”
신이든 인간이든 약속이라는 이름 속에 갇혀있다. 붉은 천사나 [올림포스]의 신들이나 전능과 같은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약속 안에서 제한되어 있었다.
‘그들이 말한 약속이 바로 이건가?’
승한은 붉은 천사와 아롤, 그리고 [올림포스]의 신들이 말한 ‘약속’을 떠올렸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인지 그들은 승한에게 이야기를 하는 걸 꺼려하고 있었다.
특히 [올림포스]의 제우스는 승한과의 약속보다 중요한 약속이 있다며 승한에게 모든 이야기를 해줄 수 없다고 했었다. 그 때에는 그 약속이 무엇인지, 누구와의 약속인지 알 수 없었는데, 그것이 아무래도 이 약속인 모양이었다.
‘에덴의 신과의 약속이라… 내 약속과는 무게가 다르네.’
에덴의 신. 아니, 달리 말하자면 신들의 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신들의 당인 에덴의 주인이며, 모든 신들의 근원이 되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그런 존재와의 약속이라면 승한의 약속을 무시하는 게 당연했다. 약속이라고 해서 다 같은 약속이 아니었다. 누구와 먼저 했는가, 그리고 누구와의 약속인가도 생각해야 했다. 제우스는 어쩔 수 없이 승한의 약속을 일부 어길 수밖에 없었다.
“잠깐. 그 약속이라는 것, 너에게는 해당이 없는 건가?”
승한은 드래곤이 자신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을 보고 갑작스럽게 걱정이 되었다.
붉은 천사나 아롤, 제우스는 승한에게 이야기를 해 주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들이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야기를 해주지 못하는 데에는 캥기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반드시 지켜야 할 어떤 약속 때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약속을 어기면, 큰일이 나는 것 아닌가?”
-큰일이라… 글쎄, 잘 모르겠군. 아직까지 약속을 어긴 신은 존재하지 않아서 말이지. 아니, 정확히는 어길 수 없다고 봐야겠지.
“어길 수 없다?”
-까닭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다. 너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당연한 것처럼, 우리는 약속을 어길 수 없게 되어있다. 그것이 잠시나마 에덴에 발을 담았던 우리들의 약속이다.
그들의 약속이라는 것은 손가락을 걸고 한 약속처럼 어기지 않기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세상의 순리라고 할 수 있었다.
즉, 무슨 일이 있어도 신들은 그 약속을 어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기려고 마음을 먹어도 말이다. 즉, 지금 이 순간 드래곤이 승한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는 것도 약속을 어기는 일이 아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은 약속을 어기는 게 아닌 건가?”
-에덴의 이야기는 에덴에 속한 신과 그들의 어두운 이면인 악마 외에는 알 수 없는 이야기다. 신이 되지 못한 존재에게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약속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
-나도 놀라는 중이다. 신이 되지 못한 인간이 에덴의 땅을 밟은 것도, 인간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이 약속을 어기는 일이 아닌 것도 말이지.
“……지금 그게 놀라는 표정이냐?”
-그 발언은 종족 차별이다. 인간의 표정과 다를 뿐, 우리 용들도 표정은 있다.
도저히 어떻게 표정을 구분하는 건지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긴, 그의 말대로 종족이 다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이 동물의 표정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대체 뭐가 바뀐 거지?’
승한은 붉은 천사와 아롤, 제우스가 자신에게 말을 아꼈을 때와 지금 무엇이 달라졌나 싶었다.
생각해볼 수 있는 건 두 가지였다.
‘약속’이라는 것이 에덴의 땅을 밟은 순간 의미가 사라졌다는 것. 혹은…….
‘내가 신이 되기라도 했나?’
“가당치도 않은 생각하고 자빠졌네.”
익숙한 목소리에 승한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드래곤의 그림자에 가려져 처음에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승한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아롤님?”
-영웅 아롤인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군.
드래곤 역시 아롤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붉은 천사나 [올림포스]의 신들 역시 그를 알고있었다. 인간으로서 신이 된 존재인 만큼 그의 이름은 꽤나 많은 신들에게 알려져 있는 모양이었다.
“신은 얼어죽을 신. 네 주제에 벌써부터 신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는 거냐?”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헛생각 한 거 다 안다. 에덴에서 거짓말이 통할 거라 생각하냐?”
“저를 부르신 게 아롤님이었습니까?”
“또 이상한 생각하고 있네. 내가 너를 여기로 왜 불러? 아니, 부를 이유가 있어도 못 불러.”
하긴, 그건 그랬다. 지금껏 아롤은 승한은 다른 세상으로 불러냈다. 아무것도 없던 순백의 공간으로 말이다. 할 말이 있다면 언제나처럼 그곳으로 불렀으면 될 일이었다.
아롤은 어느 세상의 신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몸으로 신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에덴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가 여기에 있는 건 당연했다.
“용족의 신인가? 색을 봐서는 레드 드래곤이군. 이렇게 만나다니, 이것도 인연은 인연이야.”
-이 녀석에게 힘을 빌려준 게 아롤, 너였군.
“그래. 이 녀석이 쓰던 검이 내 검이야.
-그랬던 건가? 보통 검은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네 검일 줄은 몰랐군. 하긴, 너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게 없으니.
아무래도 드래곤은 아롤에 대해 알고만 있지 직접 만나본 적은 없는 모양이었다. 반면, 아롤은 듀란달을 통해 레드 드래곤에 대해 알고 있었다.
-영웅 아롤의 검을 이어받은 인간이라… 역심 보통 인간은 아니군.
“아롤님이 그렇게까지 유명한가?”
-유명하지. 무수히 많은 세상에서도 인간이 신이 된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아롤은 수백년 전, 가장 최근에 인간이 신이 된 영웅이다.
“……수백 년 전이 가장 최근이라.”
드래곤의 말대로라면 세상의 수는 족히 수억 개 이상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 중 인간이 신이 된 경우가 아롤이 가장 최근이라고 한다면 사실상 신이 된 인간은 극히 드물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롤님, 대단한 사람이었네요?”
“지금은 신이다. 됐고, 넌 왜 여기 있지?”
“아롤님은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내 검을 네가 가지고 있는데 그럼 모르겠나?”
“그래도 에덴이 얼마나 넓은데…….”
드래곤의 말대로라면 에덴은 끝이 없을 만큼 넓은 곳이었다. 아무리 위치를 알고 있다고 해도 이렇게 한 순간에 나타나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넓은 건 아네? 그래봤자 내 손바닥 안이지. 위치만 알면 오는 건 금방이야. 이곳은 우리들의 땅이니까.”
아무래도 신들만의 어떤 능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드래곤도 아롤의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승한은 드래곤이 이어 아롤까지 나타나자 혹시나 하고 물었다.
“설마 붉은 천사도 여기 있습니까?”
“천사는 자신들의 세상이 따로 있어. 에덴의 땅은 갈 곳 없고 창조에 관심이 없거나 창조가 불가능한 신들이 사는 땅이지.”
“아롤님은 어느 쪽입니까?”
“관심 없는 쪽.”
하긴, 아롤 정도의 신이라면 창조가 가능할 것도 같았다. 드래곤의 말대로라면 인간으로서 신이 됐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위 신에 버금가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너 대체 뭘 한 거냐? 뭘 했는데 여기 있어?”
“그냥… 능력의 레벨을 올렸습니다.”
“무슨 능력?”
“아롤님과 붉은 천사의 힘을 빌려왔던 능력 말입니다.”
“[강신]말이야?”
아롤은 승한의 능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강신]을 이용해 승한의 몸속으로 영혼을 접신하기도 했으니 그 능력이 어떤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 번째 능력은 뭔데?”
“이름은 [강림]입니다만… 아직 어떤 능력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강림]?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능력은 아니겠지?”
아롤은 [강신]이 각성한 능력 [강림]의 이름을 듣고 한 가지 능력을 떠올렸다.
“저도 설마 하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만…….”
“다른 신들을 소환할 수 있는 능력은 너무 사기 아니야? 너무 갑작스러운데?”
“악마까지 나타난 마당에, 이런 능력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그렇지, 이건…….”
어이가 없어 말하던 아롤은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면 그럴듯하기도 했다.
“하긴, 애초에 이걸 노린 것이긴 하겠지.”
“무슨 소립니까?”
“자잘한 이야기는 저 녀석에게 이미 들어서 알고 있을 테고, 본론만 말하자면 너희에게 힘을 준 이유도 그 ‘약속’이라는 제약 때문이지.”
“대체 그 약속이라는 게 뭡니까?”
“그건 알려줄 수 없군. 자세한 건 말이지. 대략적으로나마 말해주자면… 신은 다른 신의 세상에 직접 간섭할 수 없다는 거라고 할 수 있겠군.”
다른 세상에 직접 간섭할 수 없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악마들이 직접 나서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직접 간섭할 수 없다면, 간접적으로는 간섭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래. 그거지.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 없으니, 간접적으로 간섭한다. 그게 바로 지금 신들과 악마들이 너희들에게 하고 있는 짓거리다.”
간접적인 간섭. 신과 악마들은 직접 나서기보다는 다른 방향으로 우회하여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신들은 인간에게 자신의 능력을 주어 인간이 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하였고, 악마들은 악마가 아닌 다른 악한 존재들을 보내 사람들을 공격했다. 신들이 왜 인간들에게 능력을 주어 ‘헌터’라는 존재를 만들었는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어디가…….”
빠득-.
승한은 이를 갈며 물었다.
“어디가 간접적이라는 겁니까?”
벌써 몇 번씩이나 괴물들이 나타났다. 죽은 사람들의 수만 해도 헤아리기 어려웠다. 당장 괴물들의 피해가 적은 한국은 그렇다 쳐도, 헌터들의 수가 부족한 다른 나라의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괴물들을 보냈다. 그 많은 괴물들을 보내 사람을 죽였으면서, 고작 간접적으로 개입했을 뿐이라고?
“지들 멋대로 사람을 죽였다 말았다 하고는, 그게 간접적이라는 겁니까?”
“정도를 따져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직접적으로 악마들이 개입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그건…….”
“감정적으로 생각하지 마. 그래봤자 나오는 답은 없어. 어떻게 네가 여기에 오게 되었고, 어째서 너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는 게 약속을 어기지 않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마는 확실하다. 넌 나처럼 되어야해.”
아롤은 승한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처럼’이라는 말에 뼈가 담겨있었다.
“아롤님처럼이라뇨?”
“뻔한 거 아니겠어? 내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를 생각해 봐라.”
“영웅… 아롤…….”
아롤의 이름 앞에는 항상 영웅이라는 단어가 붙었다. 인간도 아닌, 신들의 입에서 나온 수식어였다.
그가 생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단지 악마를 쓰러뜨렸다는 것밖에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그의 이름 앞에 영웅이라는 이름이 붙기에는 충분했다.
승한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그는 세상을 구했다고 했다. 애초에 그는 승한의 세상에 살던 인간이었다. 하지만 어떤 사건에 휘말려 다른 세상을 구하고, 악마를 베었으며, 지금은 신이 되어있었다.
아롤처럼 되어라.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뿐이었다.
“네가 사는 세상, 네가 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