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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승한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하지만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드넓은 들판과 풀과 꽃이 있고,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잘못 들었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니었다.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하게 들었다. 그는 승한이 먹은 과일을 ‘선악과’라고 했다.
‘선악과라…….’
종교가 없는 승한이었지만 선악과라는 과일을 모르지는 않았다. 세상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인간에게 금기되었던 과일을 뜻했다.
성경에서는 선악과를 먹음으로서 인간의 죄가 시작되었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맛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았는데, 승한은 자신이 먹은 과일이 선악과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누굽니까?”
승한은 자신에게 말을 건 존재를 찾았다. 아마도 그가 새로운 신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승한의 부름에도 목소리는 대답이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한 마디를 툭 내뱉고는 다시 자취를 감춰버렸다.
“선악과라…….”
승한은 주렁주렁 열려있는 열매를 보며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대답이 없었고, 승한의 관심은 다시 눈앞에 있는 과일들로 향했다.
선악과. 성경의 이야기대로라면 절대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과일이었다. 저것으로 인해 인간의 악이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선악과라는 과일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깜짝 놀랄 일이지만, 실제로 존재한다면 인간이 손을 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어쩐지, 보통 과일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었다. 이런 맛이 나는 과일이 보통 과일일 리 없었다.
‘먹고 싶다…….’
꿀꺽-.
승한은 선악과를 보며 침을 삼켰다. 아직까지도 승한의 입안에는 선악과의 달콤한 맛이 남아있었다. 평생 저것만 먹어도 더 이상 소원이 없을 것 같은 달콤한 맛이었다.
딱 하나만 더 먹고 싶다. 승한은 속으로 갈등했다. 어차피 독도 없는데, 더 먹는다고 한들 문제가 될 게 있을까?
‘딱 하나만 더…….’
승한은 갈등 끝에 손을 뻗었다. 하나의 선악과를 더 취하기 위해서.
하지만 그런 승한의 갈등은 금방 끝났다. 선악과를 향해 뻗던 손을 꽉 쥐며 승한은 고개를 저었다.
“죄를 두 번이나 지을 순 없지.”
먹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한다. 승한은 저것이 선악과라면, 인간이 먹어선 안 되는 과일이라면 먹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르고 먹었다면 모를까, 알고 먹으면 그것이야말로 죄악이었다.
승한은 종교가 없었다. 하지만 믿고 자시고를 떠나, 신이라는 존재가 실존하고 선악과라는 과일이 있다면 당연히 먹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승한은 선악과를 보며 입맛을 다시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던 중, 주위에 널려있는 선악과나무들을 보며 생각했다.
“선악과가 있다는 건… 여기가 성경에 나온 에덴동산이라는 건가?”
에덴동산. 평화와 함께 세상의 모든 이롭고 아름다움이 숨 쉬고 있는 낙원의 땅이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로 인해 멀고 먼 옛날 인간들이 추방을 받은 땅이기도 했다.
선악과는 바로 그 에덴동산의 과일이었다. 승한은 선악과가 있는 만큼 이곳이 그 에덴동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승한은 조금 더 주위를 돌아다녔다. 천천히 걸어 꽃 사이를 거닐어 다니자, 여유롭고 행복했다. 까닭은 알 수 없지만 어떤 마력 같은 게 있는 느낌이었다.
‘이런 곳이구나…….’
걸어 다니며 경치를 보고 있으면 불안한 감정이나 두려움 같은 것들이 모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왜 이곳이 낙원이라 불리는지 알 것도 같았다. 높은 고층 건물 건물이나 시끄러운 자동차 따위가 있는 승한의 세상보다 훨씬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저 걷기만 해도 행복한 곳. 승한은 이런 곳으로부터 쫒겨난 인간들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키힝-.
그 때, 조용한 들판 사이로 무언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소리였지만 워낙 주위가 조용한 터라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다.
‘뭐지?’
승한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걸어갔다. 뛰어가면 금방 도착할 테지만 구태여 그러고 싶진 않았다. 마음이 여유로워지니 급하지 않았다.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조금 더 걸어가자 멀리 무언가가 보였다. 작은 점처럼 보였던 그것을 자세히 보니, 네 발로 걸어다니는 짐승이었다.
‘……유니콘?’
네 발로 걸어 다니는 거대한 백마. 보통 말보다 족치 서너배는 큰 덩치였는데, 특이한 건 덩치가 아니었다. 정말로 특이한 건 머리에 뾰족하게 나 있는 샛노란 뿔이었다.
전설에서나 등장하는 동물, 유니콘. 승한은 신을 보았을 때보다도 더 놀란 눈으로 유니콘을 바라봤다.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자, 유니콘의 모습을 더욱 뚜렷이 볼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니콘의 주위로는 날개가 달린 말, 페가수스와 기다란 뱀처럼 생긴 거대한 동물도 함께 있었다. 고개를 높여 보니 하늘에는 윤재의 것과 닮은 드래곤이 날아다니고 있었는데, 색이 푸른색이었다.
“이게 대체…….”
전설상의 동물들이었다. 성경의 어디에도 유니콘과 페가수스, 용과 같은 동물이 에덴동산에 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애초에 이런 전설상의 동물이 나오는 신화는 성경과는 별계였다.
승한은 어리둥절해 주위를 둘러봤다. 그밖에도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생전 처음 보는 동물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동물 역시 드래곤 하나뿐이 아니었다.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킥. 놀랐네, 놀랐어.”
방금 전과는 다른 목소리. 승한은 고개를 휙 둘려 주위를 둘러봤다. 이번에는 뒤가 아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하지만 역시나 아무도 없다. 헛소리를 들은 걸까 했는데, 그럴 리가 없었다. 목소리는 분명하게 들었다.
“……계속 이러실 겁니까?”
“어디서 또 누가 말을 걸었나 보네?”
방금 전과 같은 목소리. 하지만 역시나 모습은 드러내지 않았다. 승한은 그가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난하십니까?”
“미안하지만 네가 만날 건 내가 아니라서 말이야. 나도 인간을 보는 건 오래간만이라서 심심해서 말 좀 걸어 봤어.”
그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음에도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은 채 말이다.
“그럼 난 이만.”
목소리가 사라졌다. 귀신이라도 들린 기분이었다. 아무런 기척도,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데 목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진다. 이런 적은 능력을 얻고 난 뒤로도 처음이었다.
“대체 이게…….”
승한은 선악과에 대해 알려준 존재의 목소리와 방금 전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존재의 목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투도 확연히 달랐다. 점잖은 첫 번째 목소리와 장난스러운 두 번째 목소리는 서로 다른 존재의 것이었다.
‘대체 누구지?’
승한은 그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하염없이 에덴동산이라 추측되는 이 넓은 들판을 돌아다닐 뿐.
쿵-.
그 때, 승한의 뒤로 거대한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승한은 다시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거대한 드래곤이 승한의 뒤로 내려앉아 있었는데, 붉은색의 드래곤이었다.
어마어마한 덩치였다. 윤재가 소환한 레드 드래곤도 꽤나 큰 덩치를 가지고 있었지만, 승한의 뒤에 나타난 드래곤은 그 몇 배는 컸다. 워낙 가까이 있는 터라 제대로 덩치를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마치 하나의 산 같았다. 수백 미터 높이의 거대한 산 말이다. 드래곤의 이빨 하나가 일반 성인보다 더 클 정도였다.
“……어마어마하군.”
윤재의 레드 드래곤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 승한은 혀를 내두르며 드래곤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또 다른 드래곤들이 있었는데, 저 드래곤들도 이만한 덩치일까 싶었다. 만약 그렇다면 얼마나 높게 올라가 날고 있는 것일까?
승한은 드래곤이 무섭지 않았다.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라기보다는,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이 평화로운 세상에서는 폭력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크르르르르-.
드래곤이 고개를 내려 승한을 내려다보았다. 눈동자 하나가 승한보다 몇 배는 컸다. 승한은 드래곤의 눈을 반히 바라보았다. 녀석은 마치 승한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정말이군.
그 순간, 사방을 가득 메우는 웅장한 목소리에 승한이 깜짝 놀랐다. 승한은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보았다.
“설마… 네가 말한 거냐?”
-그렇다. 설마하니 네가 이곳에 오게 될 줄은 몰랐다, 작은 인간아.
분명했다. 눈앞에 있는 드래곤의 목소리였다. 워낙 덩치가 거대하고, 입을 열지 않고 말을 하다 보니 사방에서 목소리가 울리는 것처럼 들리는 것뿐이었다.
“설마 너… 윤재형의……?”
-네가 등에 타던 게 나다. 도대체 어쩌다 이곳까지 오게 됐지?
확답을 듣고 보니 더욱 놀랍다. 승한은 드래곤을 보며 입을 크게 벌렸다.
‘이렇게 컸어?’
윤재의 능력 중 하나인 레드 드래곤 소환은 1레벨에 머물러 있었다. 물론 레벨과는 상관없이 레드 드래곤의 덩치는 충분히 컸다. 어지간한 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울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드래곤과 비교하면 아기용이라 해도 믿을 만큼 윤재의 레드 드래곤은 작았다. 하지만 그 둘이 동일한 존재라고 하니, 속으로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긴, 윤재형의 능력은 아직 1레벨이니…….’
레벨이 높아지면 덩치가 함께 커지는 걸까? 거기서 더 덩치가 커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승한은 눈앞에 있는 드래곤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아직까지 윤재의 레드 드래곤은 작고 작았다.
“그러는 넌 여기 왜 있는 거지?”
-이상한 질문을 하는군. 이곳은 내가 살아가는 세계다. 느닷없는 손님은 내가 아닌, 바로 너다.
그건 그랬다. [강신]의 레벨을 올리고 10레벨을 달성한 후, 승한은 이곳으로 초대를 받았다. 누구에게 초대를 받은 건지는 몰라도 말이다.
반면 이곳에 살아가는 존재는 한둘이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레드 드래곤만이 아니더라도 하늘에는 여러 마리의 드래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곳에는 유니콘과 페가수스, 이무기, 해태 등등, 전설상의 동물들이 많았다.
‘대체 왜 여기에 윤재 형의 드래곤이…….’
승한은 다른 신이 아닌 윤재의 능력인 레드 드래곤의 신이 이곳에 있다는데 놀랐다. 드래곤 역시 오랜 세월을 존재해오면 한낱 동물이 아닌 신이 된다고 하더니, 그게 바로 눈앞에 있는 드래곤이었다.
하지만 레드 드래곤은 윤재와 관련이 있는 신이었다. 그가 바로 윤재에게 능력을 준 신이었다. 승한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다시 묻겠다. 작은 인간, 네가 왜 여기 있는 것이지?
레드 드래곤 역시 승한이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승한은 어리둥절해 고개를 저었다.
“나도… 잘 모르겠군.”
-모른다?
“그래. 알다시피 내 능력은 너와는 전혀 관련이 없잖아. 넌 윤재 형의 신이지.”
-내가 신이라는 건 알고 있군.
“인간에게 능력을 준 존재가 모두 신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니까. 신이 꼭 세상을 창조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고. 인간이 신이 되기도 하니까.”
아롤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아니, 인간이 아니라 동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 그리고 특정한 자격을 갖춘 존재라면 누구나가 신이 될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왜 내가 너를 만나게 된 건지는 모르겠군. 다른 신이 아니라.”
한 신이 두 명의 인간에게 능력을 주기도 하는 걸까? 아니, 그런 거라고 생각하기에는 레드 드래곤 역시 승한이 왜 여기에 있는지를 모르는 눈치였다. 레드 드래곤 못지않게 승한 역시 그의 등장이 당황스러웠다.
-무언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