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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글세, 이걸 너에게 말해도 될지는 모르겠군.”
루이즈는 그답지 않게 피식 웃으며 농을 던졌다. 그러자 그의 옆에 앉아있던 크루먼이 말했다.
“장난치시지 말고 얼른 이야기 하시죠. 이미 관계된 헌터들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입에서는 한국말이 나왔지만 그의 손에는 전음구가 들려있었다. 아무래도 승한과 윤재와 함께 대화를 나누기 위함인 모양이었다.
-이 녀석은 한국의 헌터 아닌가?
“국익이 중요하다고 한들, 세상이 망하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게다가 언제부터 루이즈씨가 그런 걸 신경 쓰셨습니까?”
크루먼의 말에 루이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안이 사안이었던 만큼 어느 정도 고급 정보에 속해있던 모양이었는데, 그래도 이 부분에 대해서 꽤 많은 헌터들이 알고 있다는 건 의외였다. 아무래도 루이즈는 자신의 정보를 다른 헌터들에게 꽤 많이 공유를 한 모양이었다.
-이걸 이 녀석이 믿을지는 모르겠군.
“신들이 있고, 그 신들이 인간에게 능력을 주어 헌터라는 존재를 만들었습니다. 게다가 악마가 세상을 위협하는 마당에 못 믿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루이즈의 말에 승한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단순히 루이즈의 말을 이끌어내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그 말대로 더 이상 못 믿을 말은 없었다. 승한은 더 이상 어떤 말을 듣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루이즈 역시 마찬가지였다. 승한이 신과 악마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면, 이후의 이야기 역시 믿을 수밖에 없었다.
-넌 악마의 이름을 몇이나 알고 있지?
“악마의 이름이라면……?”
-각종 신화에 언급되는 악마들의 이름. 그들 중 네가 알고 있는 악마가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군. 그런데 그 악마들이 모두 존재한다면 믿겠나?
루이즈의 말에 승한은 자신이 알고 있는 악마들의 이름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몇몇 신화에 나오는 악마들과 게임을 통해 접한 악마들의 이름, 그리고 스테이지를 통해 확실히 알게 된 아포피스까지.
그의 머릿속에 몇몇 악마들의 이름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존재하는 악마들이라는 사실은 새삼스럽긴 하지만 충격은 아니었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으니 말이다.
“믿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이미 악마는 여럿 만나봤습니다.”
-이번에 나타난 악마 외에도 말인가?
“네. 스테이지 속에서 아포피스라는 악마를 만났습니다. 봉인되어있는 상태이긴 했지만요. 그밖에도 이제 막 부활한 듀리안과 루시퍼라는 악마도 만났습니다.”
-……그런 놈들을 만나고도 스테이지를 통과한 건가? 대단하긴 하군.
이미 악마를 만나 봤다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적어도 악마와의 접점은 승한이 루이즈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사탄이라고 아나?
“성경의 악마 말입니까?”
-악마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군. 신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뭐, 신보다는 악마에 더 가깝긴 하겠지만 말이야.
아포피스를 비롯한 악마들이 있다는 것은, 그밖에 알려져 있는 다른 신화나 이야기속의 악마들도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사탄은 그 악마들 중 하나라 볼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이 세상의 탄생 신화라고 볼 수 있다.
루이즈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승한은 지금부터 그가 하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아롤와 붉은 천사가 숨겨온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신화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 신들의 종류는 무수히 많고,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는 그들이 우리의 세상을 태고적에 창조했다는 이야기였다. 워낙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서 그 중 어느 게 진짜일지는 알 수 없었지. 심지어 창조론과 진화론 중 어느 것이 사실인지조차도 말이야.
창조론. 그것은 여러 종교에서 주장해오는 이론이었다. 진화론과는 반대가 되는 이론으로, 생명체가 어떤 신성한 힘에 의해서 지금의 모습 그대로 생명체가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존재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론의 중간에는 ‘신’이라는 존재가 얽혀있었다.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게 되고 난 후, 승한 역시 이 창조론에 더욱 신빙성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알게 된 바에 의하면 이 창조론이 진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신화 속의 이야기들, 그 모든 창조신화가 모두 말이야.
“……전부 말입니까?”
-그래. 너도 알고 있겠지? 스테이지라는 세상, 신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외에 또 다른 세상을 만든 존재들이다. 물론 태곳적의 신들이 아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창조된 생명이 신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름 있는 신들은 분명 자신들만의 세상을 가지고 있지.
마족들의 신은 악마라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천족들이 모시는 신은 천사였다. 여러 차원의 세상이 존재하고, 그 세상을 창조한 신들이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건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꽤나 신기한 이야기였다.
-그럼 여기서 하나 궁금한 게 생기지 않나? 과연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신은 누구일까, 하고 말이야.
“그건…….”
승한은 대답을 주저했다. 승한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신은, 바로 [올림포스]의 신전에 있는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냥 그렇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루이즈가 말한 ‘사탄’이라는 악마의 이름이 걸렸다.
“……모르겠습니다.”
-떠오르는 신이 있긴 한가 보군.
“[올림포스]신화. 그리스 신화의 신들입니다.”
-검과 불 외에 네가 가진 능력 중 하나가 그것이었나? 그리스 신화라니, 거창한 신이 강림하셨군. 어쩐지 심상치 않다 했어.
루이즈는 승한이 가진 능력의 이름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스 신화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유명한 신화였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라면 신이 가진 힘도 결코 약하지 않을 것이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정답은 아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창조한 세상이 따로 있거나 태곳적의 신들이 아닐지도 모르지.
“인간이 신이 되었다는 겁니까?”
-그런 경우가 꽤 많으니까.
그렇긴 했다. 당장 승한이 가진 능력, [성검]의 주인인 아롤만 하더라도 인간의 몸으로 신이 된 존재였다. 그것도 태곳적의 신들과 비견할 만한 힘을 가진 신이었다.
그리스 신들이 꼭 어느 세상을 창조한 신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들 역시 아롤처럼 인간이 신이 된 경우일지도 모른다. 아롤이 살던 세상 이전에도 인간의 역사는 길고 길었다.
“그럼 이곳 세상의 신은 누굽니까?”
-모른다.
“네?”
-하나의 세상에는 두 존재가 공존한다. 신과 악마. 악마는 세상이 만들어지고, 생명이 탄생하면서 필연적으로 만들어진다. 세상의 가장 어두운 부분이 한데 모여 만들어진 존재가 바로 악마다. 하지만 어찌된 까닭인지 이곳에는 신과 악마, 둘 모두가 없다.
악마라는 존재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그 정체가 밝혀졌다. 하지만 승한에게는 악마의 정체보다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곳에 신이 없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신이 없다니요? 그게 가능합니까?”
-정확히는 없는 게 아니다. 잠들었다고 봐야겠지.
“대체 왜…….”
-듣기로는 실망했다고 하는군. 과거에는 이 세상의 신 역시 다른 세상처럼 신과 인간이 교류하며 소통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인간이 큰 죄를 짓고 거기에 실망한 신이 인간의 곁에서 떠나갔다, 라는 이야기다. 물론 그냥 떠나간 것만은 아니었지. 신은 잠들기 전, 인간들이 악마의 꼬임에 넘어갈 것을 걱정해 악마를 봉인시켰다. 신이 없는 악마의 세상이 어떻게 될지는 뻔하니까 말이야.
신이 없는 악마의 세상. 그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승한은 마족들의 세상을 떠올렸다. 무슨 까닭인지 그들에게는 신이 없었고, 악마만이 존재했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괴물이 되었다.
인간이 큰 죄를 지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인간이 죄를 지었음에도 신은 인간을 완전히 저버리지 않았다. 악마를 봉인시킨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신과 악마가 없는 세상. 그곳이 바로 승한을 비롯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신의 이름을 모른다는 건 왜입니까?”
-당연하지. 인간이 스스로 한 번 잊혀진 신의 이름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럼 악마는요? 봉인된 악마의 이름이 사탄 아닙니까?”
-그래. 신의 이름과는 달리, 악마의 이름은 신들 사이에서도 쉽게 언급되더군. 사실 악마의 이름을 들으면 신의 이름이 무엇일지는 뻔하지만 말이지.
신과 함께 봉인된 악마. 승한은 신이든 악마든 이름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그래서 그게 지금 일어나는 일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겁니까?”
-관계가 있지. 그들의 목적이 여기 있으니.
“설마…….”
-봉인된 악마의 해방. 그들의 목적은, 새로운 악마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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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급 신들의 힘은 그들을 믿는 존재가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견고한지에 따라 달라진다. 믿음에 따라 그들은 기존보다 더 위대한 신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반면 악마의 힘은 세상의 어두운 이면이 얼마나 큰지에 따라 달라졌다. 그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지, 두려움에 떨고 있는지에 따라 그들의 힘이 달라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 그것이 곧 악마의 힘이었다. 그리고 악마들은 사탄의 해방을 위해 사탄의 힘을 키우려 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죽이고, 죽인다. 세상은 혼란에 빠질 것이고, 사람들은 두려워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들은 곧 사탄의 힘이 되었다.
“사탄이라…….”
신과 악마. 그들은 서로 뗄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양립할 수 없는 상극의 존재들이었다. 악마는 신의 어두운 부분이면서도 신들을 적대시했고, 신들 역시 악마를 자신들의 한 부분임을 부정했다.
악마들이 사탄의 봉인을 풀어 무얼 하려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탄이 해방되기까지의 과정은 승한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제법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점이었다. 어쩌면 사탄의 해방이 곧 세상의 종말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스케일이 훨씬 크잖아?’
막연하게 생각했던 진실을 직접 확인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한낱 한 명의 사람일 뿐인 자신이, 이런 일에 얽혀서 무엇을 할 수 있나 싶기도 했다.
더불어 이 일에 얽혀있는 다른 신들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왜 직접 나서지 않고 자신들에게 힘을 주었는지. 사탄의 해방을 막기 위함이라면 직접 나서면 될 일이었다. 아무리 인간들이 신들의 힘을 빌려온다고 한들, 진짜 신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더불어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겨났다. 아니, 그것은 오래 전부터 끊임없이 떠오르던 의문이었다.
‘왜 악마들은 직접 나서지 않지?’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직접 나서면 될 일이었다. 사탄의 존재가 그렇게 작은 것도 아니고, 굳이 다른 괴물들을 보내면서 번거롭게 일을 만드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자, 자.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크루먼은 혼란스러운 표정의 승한을 향해 입을 열었다. 뒤죽박죽 어지러운 생각들을 정리하던 승한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무래도 승한씨는 처음 듣는 이야기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아, 네.”
“그럼 이제는 저와 이야기를 할 시간이군요.”
루이즈의 이야기가 끝난 뒤, 크루먼이 승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승한씨, 저희와 함께 하시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