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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승한을 중심으로 주위 일대가 성화의 불길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힘을 집중시키지 않고 넓게만 퍼뜨린 터라 죽은자들을 모두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쿠구구구-.
승한은 괴물을 중심으로 그 주위로 다시금 [올림포스]의 힘을 퍼뜨렸다. 그러자 괴물을 향해 모여들던 죽은자들이 [올림포스]의 힘에 짓눌려 바닥에 쓰러졌다. 그 때서야 승한은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일 났군.’
아롤의 목소리. 승한은 그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쿠웅-.
괴물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잠시 웅크리더니 곧 날개를 활짝 피며 날아올랐다.
크어어어어엉-!
괴물의 머리가 포효했다. 단순히 힘껏 소리만 내지른 것이 아니었다. 그 포효에는 힘이 담겨있어 승한이 만들어낸 성화와 [올림포스]의 공간을 날려버렸다. 반면, 죽은자들은 전혀 충격이 없었다.
“일 났네.”
승한은 아롤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성화와 [올림포스]로 이루어진, 승한이 만들어냈던 공간이 괴물의 포효로 인해 사라지자 죽은자들이 괴물의 입 속으로 모조리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우득-.
우드드득-.
괴물의 몸과 머리가 기괴하게 비틀리기 시작했다. 승한은 그 모습을 보며 서둘러 듀란달을 휘둘렀지만, 괴물의 몸에는 작은 상처가 생겨날 뿐이었다.
“젠장.”
무언가 잘못되었다. 승한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괴물은 수백, 어쩌면 천 마리에 가까울지도 모르는 죽은자들을 집어삼켰다. 그것은 아마 고스란히 괴물의 힘이 되었을 것이다.
비틀리기 시작한 몸과 머리는 곧 하나가 되었다. 떨어져 있던 머리가 몸에 달라붙었고, 찰흙처럼 달라붙더니 함께 비틀렸다. 이제는 몸과 머리의 구분이 사라져 버렸다.
그 때였다. 죽은자들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던 루이즈가 비틀리고 있는 괴물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한 것은.
“Stop(멈춰)!”
승한은 전음구를 꺼낼 겨를도 없이 소리쳤다. 그의 외침에 괴물을 향해 달려가던 루이즈가 움직임을 멈췄다. 어떤 능력인지는 몰라도 그는 허공에서 멈추더니 허공에 떠 있는 승한을 바라봤다.
“What?”
-왜 그러는 거지?
목소리와 함께 그의 음성이 귓가를 통해 들려왔다. 승한은 마찬가지로 주머니에 있는 전음구를 통해 대답했다.
“말려들지도 모릅니다.”
-무엇에 말려든다는 거지? 너도 이상하다는 걸 알지 않나? 지금이 기회야!
“기회가 아닙니다. 가장 위험한 순간이죠.”
승한의 말에는 근거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름아닌 붉은 천사와 아롤이 알려준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공격하지 마.’
‘모든 게 끝날 때까지 기다리세요.’
지금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죽은자들을 먹어치운 괴물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알 수 없지만, 아롤과 붉은 천사는 그 과정이 가장 위험하다고 말했다. 승한이 위험하다면 당연하게도 다른 헌터들도 위험하다.
다행히도 루이즈는 독단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사실상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는 건 승한 한 사람의 생각일 뿐이었다. 하지만 다른 헌터들은 다행히도 승한의 말에 따라주었다.
‘대체 저건 뭐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괴물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입에서 뿜어내는 숨결 외에는 별다른 공격수단이 없었고, 몸이 단단하다고는 하나 아롤의 기술 덕분에 충분히 베어낼 수 있었다. 공격을 피해내는 것도 [귀신]의 레벨이 오른 덕분에 방심하지만 않는다면 문제가 없었다.
차라리 반악마가 상대하기는 더 어려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것은 승한이 가진 능력의 레벨이 올랐기 때문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반악마가 아니었다. 하급이라고는 하지만 ‘진짜’ 악마였다. 너무 쉽게 끝난다는 게 이상하긴 했다.
그리고 그 악마의 진짜 모습이 지금 나타나고 있었다.
‘작아지고 있다.’
레드 드래곤과 비슷한 덩치의 거대한 용이 점차 작아지고 있었다. 비틀어지던 몸이 수축하고, 살점이 사라져갔다.
그러는 중에도 악마의 상징이라는 날개는 그대로였다. 그 기괴한 광경은 몇 분 정도 이어졌다.
“……별 해괴한 게 다 나왔군.”
곧이어 나타난 괴물의 모습에 승한은 헛웃음을 지었다. 점차 모습을 나타낸 괴물의 모습은 방금 전 거대한 용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사람의 모습이라기엔 말 그대로 해괴했다. 살점이 없고, 뼈로 이루어져 있었다. 반악마와 비슷한 덩치였는데, 날개는 십여 미터는 될 정도로 거대했다.
무엇보다 눈.
텅 비어있는 듯 꽉 찬 시커먼 눈자리는 보고 있는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무슨 까닭으로 저런 모습으로 변화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승한은 녀석이 방금 전과는 전혀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기분 좋군.”
괴물의 입에서 건조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음성이었는데 그의 목소리는 산맥의 아래에 자리를 잡은 헌터들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마치 괴물이 아니라 이 산이 말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 진짜 큰일 났네.’
아롤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했다. 붉은 천사 역시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혼이 나타났군요.’
‘죽은자들을 제물로 한 건가? 이건 강림 수준인데?’
강림이라는 말에 승한이 의문을 품었다.
‘강림은 또 뭡니까?’
‘몸과 혼이 함께 나타나는 거지. 방금 전까지는 혼이 없는 껍데기였는데… 방금 저거 말했잖아? 알맹이가 나타난 거지.’
‘무슨 차이가 있는 겁니까?’
‘여기 있는 나와 천사처럼, 몸에 영혼이 입혀진 거지.’
간단한 비유였다. 한 마디로 더 강해졌다는 뜻이었다.
강림. 말 그대로 악마가 완전한 상태로 육신과 영혼이 나타났다는 뜻이었다. 승한은 기다란 양 팔을 크게 벌리며 숨을 들이쉬고 있는 악마를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반악마 다음에는 악마인가.”
하급이라고는 하지만 완전한 악마가 나타났다. 악마는 거대한 용의 모습일 때보다 더욱 거대해보였다. 그것은 덩치의 차이라기보다는 존재감의 차이였다.
이제야 진짜 악마라는 느낌이었다. 아롤이 왜 방금 전까지의 악마가 껍데기라고 말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Be careful(조심하세요).”
승한은 주위에 있는 헌터들에게 나직이 경고했다. 헌터들 역시 악마가 변화한 것을 보며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눈치가 있었고, 악마의 존재감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타악-.
그 순간, 루이즈가 허공을 박차며 날아들었다. 승한은 예상 외로 루이즈가 먼저 움직이자 깜짝 놀랐다.
콰앙-!
루이즈의 주먹이 악마의 날개 위를 두드렸다. 이전에는 악마의 몸을 크게 들어 올릴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던 루이즈의 주먹이 허무하게 막혀들었다.
“너였지? 귀찮게 알짱거렸던 게.”
악마의 손이 천천히 뻗어갔다. 루이즈는 다른 한 손을 휘둘러 악마의 손을 치워 내려했다. 그는 자신의 힘에 자신이 있었고, 아무리 변화했다지만 힘에서만큼은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믿었다.
콰악-.
악마의 손에 루이즈의 주먹이 잡혔다. 루이즈의 손이 아무리 보통 사람들에 비해서 큰 편이라고 하지만 상대는 악마였다. 그의 손은 루이즈의 손을 감싸고도 남을 정도로 컸다.
“What?”
루이즈는 어째서 자신의 주먹이 통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는 아무리 상대가 강하다 해도 자신의 주먹이 통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 즈음, 악마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콰드드득-.
뼈가 으스러졌다. 루이즈는 주먹이 으스러진다는 느낌을 처음 받아봤다. 그는 주먹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악마의 손아귀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려 힘을 썼다.
쐐애애액-.
퍼억-!
그 순간, 악마의 등 뒤로 승한이 날린 성화의 검격이 날아가 박혔다. 날개로 몸을 보호하지 못한 악마는 그 충격에 몸을 조금 휘청거렸지만 큰 상처는 입지 않았다.
그 사이 루이즈가 악마의 손아귀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서둘러 몸을 날린 루이즈는 악마에게서 거리를 벌리며 승한을 비롯한 헌터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악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해 성화의 검격을 날린 승한을 바라봤다.
“그래, 너구나.”
시커멓게 텅 빈 눈이 승한에게로 향했다. 승한은 그 깊은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보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날 아나?”
“내 몸뚱이를 태운 게 네놈인가? 반악마를 잡은 것도 말이야.”
악마는 즐거워보였다. 근육과 살점이 없는 얼굴이 웃었다. 뼈가 비틀리며 웃는 광경은 그간 숱한 괴물들을 보아왔던 헌터들조차도 속이 메스꺼운 광경이었다.
“……그런데?”
“이야, 대단한데. 그것들이 널 선택한 이유가 있었어. 인간이긴 하지만, 아주 대단해.”
칭찬인지 비꼬는 건지 모르겠다. 승한은 악마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불길해졌다.
“악마씩이나 되는 녀석이 인간 하나 잡자고 직접 강림까지 하신 건가? 쪽팔리지도 않아?”
승한은 애써 악마에게서 느끼는 불길함을 떨쳐내려 강하게 말했다. 그것은 나름 악마에게도 비수가 됐는지 싱글거리던 웃음기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쪽팔리지. 아무리 그것들에게 힘을 빌려온다고 해도, 인간 하나 잡자고 내가 직접 오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나뿐만이 아니라 그것들도 몰랐던 일이고. 사실 반악마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별 거 아니던데?”
“그러게 말이지. 그래서 내가 온 거 아니겠나?”
오만하다. 악마와 대화를 나눈 승한이 처음 든 생각이었다. 녀석은 반악마는 물론이고, 그를 쓰러뜨린 승한마저도 저 아래로 내려다보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한가로히 대화를 나누는 것만 봐도 그렇다. 녀석은 언제든지 승한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자만과 오만,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거 진짜 위험한데.’
승한은 반악마와 마주했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위기감을 느꼈다.
“루이즈씨, 이제 괜찮습니까?”
“No problem(문제없어).”
승한의 물음에 루이즈가 태연히 대답했다. 그는 어느새 으스러졌던 왼 손을 회복한 상태였다. 승한이 악마와 대화를 하는 사이, 주희에게 치료를 받은 것이었다.
승한이 굳이 악마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끈 이유는 루이즈의 왼 손이 회복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다른 헌터라면 모를까 루이즈는 승한에게도 꼭 필요한 전력이었다. 그의 힘은 분명 악마와의 싸움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시작하죠.”
승한은 그렇게 말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악마와 대화를 나눠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지금부터는 원래 계획대로 모든 헌터들이 힘을 합쳐 악마를 쓰러뜨려야 한다.
타악-.
승한의 몸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4레벨의 [귀신]을 이용해 가능한 최고로 빠르게 움직였다. 승한은 조금씩 힘을 아끼며 싸우기보다는 매 순간마다 온 힘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쩌저적-.
악마가 서 있던 지면이 갈라졌다. 그 순간, 악마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승한의 움직임에 맞춰 나타났다.
승한의 움직임이나 악마의 움직임이나 다른 헌터들의 눈에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겨우 보이는 헌터는 고작해야 루이즈 정도였다. 하지만 그조차도 둘의 움직임을 보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그 속도에 맞춰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흐읍!”
승한은 자신의 앞에 불쑥 나타난 악마를 향해 듀란달을 휘둘렀다. 새하얀 듀란달의 검신에 황금색의 성화가 맺혔다. 그것은 5레벨에 달한 성화의 불길을 온 힘을 다해 이끌어 낸 결과였다.
악마의 손톱이 솟아났다. 악마는 승한이 듀란달을 휘두르는 것에 맞춰 손을 뻗었다. 마치 장단을 맞추듯이 말이다.
콰앙-!
악마의 손과 듀란달과 성화의 힘이 부딪혔다. 승한의 듀란달이 악마의 손아귀를 베어내며 그의 손을 짓누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