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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그 꼴이 될 때까지 도움을 안구하고 뭐 한 거야?”
윤재의 물음에 레드 드래곤 위에 드러누워 있던 승한이 까칠하게 대답했다.
“그럴 정신이 어디 있겠어요?”
“……안 죽은 게 신기할 정도네. 으스러진 게 팔이 아니라 머리였으면 어쩔 뻔했냐?”
“그러게요. 다행이네요.”
승한은 통증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왼 팔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으려면 한참 걸리겠어.’
주희와 같은 치료 능력이 있는 헌터가 있다면 모를까, 자연적으로 치료가 되려면 한참이 걸릴 것이다. 아무리 헌터들이 회복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역시 어디 가지 말고 네 옆에 있을 걸 그랬다.”
“됐어요. 저 혼자서도…….”
“됐기는. 그 꼴을 하고서. 일단 치료가 가능한 헌터부터 알아 봐야지.”
윤재의 잔소리에 승한은 속에 담아둔 말을 내뱉지 못했다.
‘형이 있어봤자 큰 도움은 못 됐을 텐데.’
반악마와의 싸움은 아직까지도 승한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아무리 그 싸움을 되새겨 봐도 다른 헌터들이 돕는다고 크게 싸움의 양상이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가뜩이나 반악마는 승한도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타임 포인트를 소모해서 일시적으로 힘을 빌려오는 능력인 [강신]이 아니었다면 아예 상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윤재를 비롯한 다른 헌터들이 돕는다고 크게 달라질 게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말은 자칫 윤재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승한은 그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미국에서 연락은 없데요?”
“미국은 갑자기 왜?”
“거기에도 여기서 나타난 균열과 같은 균열이 나타났다고 했잖아요?”
승한은 한국의 다른 지역을 걱정하기보다는 미국에 나타난 거대한 균열을 신경썼다. 반악마와 같은 존재가 그곳에 또 나타났다면 녀석을 막을만한 헌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반악마를 경험해보지 않은 윤재의 입장에서 그것은 오지랖이었다. 더군다나 아무런 부상도 없이 쓰러뜨린 것도 아니고, 왼팔과 함께 갈비뼈가 으스러지고 부러진 승한을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넌 정말 오지랖도 넓다.”
“그러게요. 이건 원래 형 역할이었는데 말이죠.”
“그쪽에서 먼저 지원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건 우리 소관이 아니야.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미국에서 한국까지 지원 요청을 할 리도 없고, 세계적으로도 헌터 강국으로 떠오르는 미국에서 지원을 요청할 이유도 없고.”
미국과 한국은 괴물이 등장한 이래 가장 크게 떠오르고 있는 헌터 강국이었다. 한국이 실력이 뛰어난 헌터들이 많고, 인구밀집도와 함께 국토 면적대비 헌터의 수가 많다는 이유로 헌터 강국으로 떠오른 반면, 미국은 절대적인 헌터의 수가 세계적으로 가장 많았다.
그 이유는 어쩌면 미국이 타국의 헌터들을 다수 빼돌렸기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미국은 보유한 헌터 수에서만큼은 그 어느 국가보다도 많았다.
그런 미국을 승한 개인이 걱정한다는 건 어찌 보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윤재의 말에 승한도 자신의 생각이 오지랖이라는 걸 인정해야했다.
“그렇긴 하네요.”
“뭐, 그런 걸 다 떠나서 넌 진짜 대단한 녀석이야. 전 세계에 둘밖에 없는 균열 중 하나를 혼자서 막아내다니. 장하다, 장해.”
“그런데 치료가 가능한 헌터는 누가 있어요? 혹시 아는 헌터라도 있어요?”
“있기야 있겠지. 우리나라에 헌터가 몇 명이나 되는데. 물론 찾기는 어렵겠지만.”
헌터들의 능력은 여러 종류로 나뉘었다. 승한과 같은 근접 전투 계열의 헌터와 윤재와 같은 원거지 광역 마법사 계열의 헌터, 치유와 같은 보조 계열의 헌터.
이 중 보조 계열, 특히나 치료가 가능한 능력을 가진 헌터의 수는 극히 드문 편이었다. 그나마도 주희와 같이 버프와 치유 능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헌터는 더더욱 드물었다. 그런 점에서는 주희가 가진 헌터로서의 가치는 결코 쉽게 보지 못할 것이었다.
“새삼 주희가 필요한 시점이네요.”
“언제는 다친 적이 없어서 몰랐지만, 그렇긴 하네.”
주희와 있을 때 승한은 다친 적이 없었다. 윤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치기보다는 힘이 조금 빠지면 그것을 회복시켜주는 게 바로 주희의 역할이었다.
하지만 승한이 큰 부상을 입은 이 시점에서 주희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했다. 현재 그녀의 능력에 대해서는 미국에서도 잘 알려져 있을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부상을 입거나 죽을만큼 큰 부상을 입은 헌터들을 그녀가 살려내거나, 보스를 잡는 데에도 공헌을 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뭐, 잊어야지. 어차피 두 번 만날 일 없는 녀석이니.”
“그렇겠죠?”
승한이 그렇게 생각하고는 다시 드러눕는 순간이었다.
-오빠!
“응?”
익숙한 목소리에 승한이 다시 눈을 떴다. 반갑지는 않지만, 승한에게는 필요한 목소리였다.
“……주희?”
“뭐?”
-오빠, 오빠! 연락 되요?
분명 주희의 목소리였다. 갑작스럽게 왜 연락이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전음구로 승한에게 말을 전하고 있었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승한은 주머니에서 전음구를 꺼냈다. 그것을 보던 윤재가 승한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주희야?”
“네. 갑자기 연락이…….”
“……또 뭐가 필요해서 연락을 한 거지?”
역시나 주희와 관련된 일은 윤재도 신경이 쓰이긴 하는 모양이었다. 윤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승한에게 연락을 받으라는 눈치를 주었다.
“……무슨 일이냐?”
승한이 머릿속으로 주희의 얼굴과 이름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승한의 목소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주희에게 전달되었다.
-오, 오빠! 한국은 어때요?
“……한국은 평안하시지. 왜, 갑자기 그립냐?”
까칠한 목소리 때문일까? 주희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승한은 그녀에게 차분히 사근사근하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녀와의 끝맺음이 그리 좋지 못했다.
-도움이 필요해요.
역시나. 무언가 필요한 일이 있어서 연락을 한 것이라고 예상은 했다. 그래서 그런지 별로 화도 나지 않았다.
“도움? 무슨 도움?”
-거대한 균열이…….
“악마라도 나왔냐?”
-네! 악마가 나왔어요. 악마요.
진짜 악마가 나왔을 리는 없었다. 아무래도 주희의 반응을 보면 악마는 아니더라도 승한과 싸운 반악마와 비슷한 존재가 나온 모양이었다.
‘그런 거라면 이해는 가지.’
반악마를 상대하기 위해 필요한 헌터가 몇이나 될까? 윤재와 차재훈과 같은 헌터를 모아놓는다 해도 수십 명은 필요할 것이다. 세계적인 수준에서도 뛰어난 헌터를 가지고도 그 정도의 전력이 필요할 텐데, 평범한 수준의 헌터들은 아무리 모아봤자 파리처럼 쓰러질 뿐이었다.
물론 미국에도 실력이 뛰어난 헌터들은 많았다. 하지만 땅덩이의 규모와 비교한다면 한국처럼 효율이 썩 좋지는 않았다. 미국의 땅덩이는 한국보다 수십 배는 넓었고, 반면 헌터의 수는 열 배가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오히려 국토 면적 대비 헌터의 효율은 한국이 훨씬 낫다.
그런 상황에서 반악마 하나를 잡자고 수백 명의 헌터를 한곳에 집중시키는 건 다른 도시를 버리는 선택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미국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다른 국가의 헌터를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는데, 그것도 아마 여력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나인가?’
승한의 존재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했다. 이미 혼자서 여러 차례 보스를 잡은 사례가 있었고, 그런 만큼 승한 한 사람이 수십, 수백 명분의 몫을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주희가 연락을 한 것도 그녀의 독단적인 생각이 아닌, 미국의 개입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아마 확실히 그럴 것이다.
“그래서? 도와달라고?”
-네. 도와주세요. 제발, 오빠…….
“무슨 염치로? 아니, 그 전에 그건 네 부탁이야? 아니면 미국에서 하는 부탁이야?
-그건…….
주희는 잠시 말이 없었다. 말이 끊어진 시간 동안은 아마 옆에 있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뻔하지.’
주희가 혼자서 자신에게 연락을 했을 리가 없었다. 성격이 착하고 유한 윤재라면 모를까, 승한과 주희의 사이는 이전부터 그렇게 썩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말로 잘 구슬려 볼 생각이었다면 주희는 아마 승한이 아닌 윤재에게 먼저 연락을 넣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승한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는 건, 미국 측에서 주희에게 승한의 도움을 구할 것을 부탁했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지금 말이 끊어진 동안에는 아마 주희가 옆에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기 때문일 테고.
-……미국 측의 입장이에요.
“옆에 누구 있지? 뻔하네.”
-네. 미국 정부 관계자분과 함께 있어요. 전 이분을 대신해서 승한 오빠에게 연락을 한 거고요.
“그런데 왜 처음엔 네 부탁인 것처럼 말했지? 혹시라도 네 부탁으로 미국을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런 거라면 그건 네 생각인가? 아니면 그 옆에 있는 미국 정부 관계자의 생각인가?”
승한의 말에는 가시가 박혀있었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미국 정부 관계자라는 사람의, 그리고 주희의 얄팍한 속내가 훤히 들여다 보여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주희, 넌 내가 널 곱게 보고 있을 것 같아? 미국 관계자들은 너와 내 사이가 좋은 오빠 동생 사이로 보이나 봐? 이렇게 염치없게 연락을 하게 하는 걸 보면…….”
-그, 그건…….
“옆에 있다며? 이 참에 이야기 해 둬. 널 가지고 나나 윤재형에게 부탁을 늘어놓든, 직접 연락을 하든… 재수없고 기분 더러우니까 그딴 짓은 할 생각 하지 말라고. 나나 윤재형이나, 주희 너에 대한 감정은 최악이거든. 알겠어? 이기적인 년아.”
윤재나 승한이나 주희에 대한 감정은 그야말로 밑바닥이었다. 특히나 윤재와는 달리, 승한은 당장 주희가 눈앞에 있으면 손찌검이라도 할 정도로 그녀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다.
애초에 깊은 인연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승한과 윤재, 주희는 한 팀으로서 괴물들과 싸워야 하는 입장이었다. 누구나가 그렇겠지만 주희는 누군가가 부상을 당하거나 힘이 빠졌을 때 그를 치료해야 하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졌다는 건 다른 사람이 괴물과 싸우다 죽든 말든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마 주희도 미국으로 가기 전에 그 정도 생각은 했을 것이다. 자신이 사라지면 승한과 윤재가 위험해지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미국으로 갔다. 돈 하나를 보고.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승한과 윤재에게 뻔뻔하게 연락을 해왔다. 승한과 윤재가 그녀를 좋게 생각할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인연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알겠으면 널 위해 도와달라는 거지같은 소리는 하지 마라. 미국 측이 한국 정부에 제대로 도움을 청하든, 나에게 직접 연락을 하던 신경은 쓰지 않을 테니까… 넌 제발 우리와 엮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꼭 그렇게까지 말해야겠어요?
“넌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하는구나.”
승한은 주희에게 돌아오는 마지막 말이 미안하다는 말일 것이라 생각했다. 승한도 그렇게 모진 편은 아니라, 그렇게 말한다면 그녀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이 조금이나마 누그러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돌아온 말은 ‘그렇게까지 말해야겠냐?’는 것이었다.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가 그렇게까지 어려운 말인가 싶었다. 그 말 한 마디면 이전처럼 돌아가지는 못하더라도, 조금은 용서가 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승한은 눈앞에 있는 윤재의 얼굴을 힐끔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