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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왜 아직 사라지지 않지?’
보통 균열은 한 번 생겨나고 난 귀, 괴물들이 나타나고 나서 바로 사라졌다. 헌데 지금 검은 인영들이라는 괴물들을 뱉어낸 검은 균열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었다.
검은 인영들보다는 균열이 훨씬 더 신경 쓰였다. 혹시라도 저기서 또 다시 검은 인영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을까, 혹은 다른 모습의 괴물들이 나오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우어어어어-.
“……말을 말아야지.”
승한은 다시금 손을 뻗어오며 나오는 검은 인영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기껏 윤재와 승한이 애를 써서 수를 줄여놨더니, 균열은 다시금 검은 인영들을 뱉어내고 있었다.
“다른 곳은 괜찮으려나.”
승한은 문득 다른 지역의 헌터들, 그리고 사람들이 걱정되었다.
시간이 멈추지 않은 만큼 보통 사람들도 함께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검은 인영들의 수준이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계속해서 검은 인영들이 균열 속에서 나온다면 체력적으로 금방 바닥이 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생명력이 질긴 괴물들이었다. 몸을 수십 조각으로 나누어야 겨우 죽일 수 있었다. 어쩌면 이들에게는 수류탄과 같은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군인들이 더 적절할 것도 같았다.
콰득-.
그 순간, 발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이빨의 감촉에 승한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언제 다가온 건지 검은 인영 하나가 승한의 다리를 팔로 휘어감으며 다리를 씹어 먹고 있었다.
“……단단하지 않냐?”
퍼억-.
승한은 그대로 방패를 들어 올려 검은 인영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머리가 터져 나가며 검은 점액질이 흘러 나왔다. 끔찍한 광경에 승한은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땅 속을 기어서도 움직이는 건가?”
아니, 땅 속만이 아니었다. 검은 인영은 땅속은 물론, 유령처럼 허공을 부유할 수도 있었다. 따끔거리는 발목에 승한은 방금 전 검은 인영의 이빨이 닿았던 발을 내려다보았다.
선명한 이빨 자국이 남아있었다. 피부가 뚫리진 않았지만 이빨에 묻어있는 독이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이거 위험하겠군.”
그 순간, 승한의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생각은 대피소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땅 속이라…….”
검은 인영들이 헌터들만 공격한다면 다행이었다. 7스테이지까지 통과한 헌터들은 그들만의 능력이 있었고, 검은 인영들의 능력을 알게 되면 나름대로 대처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땅 속에서 움직이고 허공을 부유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특이하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문제는 대피소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지금은 시간이 멈추지 않은 상태였다. 혹시라도 검은 인영들이 땅속을 통해 대피소 안에 있는 사람들을 공격하기라도 하면 보통 사람들을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그어어어어어-.
검은 인영들이 승한을 향해 모여들었다. 승한은 검에 조금씩 성화를 담아 검은 인연들을 향해 날렸다. 윤재의 백염과 승한의 성화가 함께 검은 인영들을 불태우고, 그들의 몸을 수십 조각으로 베어냈다.
‘이상해.’
승한은 검은 인영들이 유독 자신에게 집착한다고 생각했다.
검은 인영들은 허공을 부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레드 드래곤이 자신들을 공격하고 있는 입장에서 오직 승한만을 노린다는 건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물론 당장 눈앞에 있고, 가장 가까이 있는 상대가 승한이기에 이런 반응을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검은 인영들은 지능이 그렇게 높지 않아보였다. 오직 살의와 식욕, 그리고 고통밖에는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이상한 점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도 몰려들고 있다.’
승한이 사용한 성화의 힘을 중심으로 모여 들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바로 어제만 하더라도 괴물들은 승한의 성화를 중심으로 안양 시 전체에서 모여들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점이 바로 이상했다. 검은 인영들은 승한의 성화를 중심으로 안양시 전체에서 모여들었다. 당장 이 자리에 있는 검은 인영들뿐만이 아니라 사방 곳곳에서 검은 인영들이 모여들고 있으니 아무리 죽여도, 죽여도 수가 줄어들질 않았다.
그렇게 승한의 주위로 검은 인영들의 시체가 산이 되어 쌓여졌다.
콰득-.
오도도독-.
뼈를 씹어먹는 섬뜩한 소리가 주위 곳곳에서 들렸다. 승한이 쓰러뜨린 검은 인영들의 시체를 다른 곳에서 몰려든 검은 인영들이 먹어치우고 있는 것이었다.
당장 승한을 먹겠다고 달려드는 검은 인영이 반이었고, 그렇지 않은 녀석들이 반이었다. 승한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검은 인영들을 상대하느라 시체를 씹어 먹는 것들을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배고… 파…….
시체 더미 사이에서 고개를 들이민 검은 인영을 바라보며 승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보통 사람보다 조금 큰 정도의 다른 검은 인영들에 비해, 열 배는 됨직한 덩치를 가진 녀석이 나타난 것이었다.
“많이도 처먹었나 보군.”
녀석의 새하얀 눈동자가 승한을 바라봤다. 승한은 녀석을 향해 검격을 휘둘렀다. 성화를 머금은 검격이 날아간 순간, 녀석은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검격이 허공을 베었다. 거대한 인영이 승한을 향해 날아왔다. 굼뜬 다른 검은 인영들과는 달리 제법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그런 괴물은 하나가 아니었다. 곳곳에서 시체를 먹어치운 검은 인영들은 순식간에 덩치를 불려나갔다. 조금 시체를 많이 먹은 녀석들은 많게는 보통 덩치보다 열 배, 조금 커진 것들은 두 배까지 커졌다.
승한은 그런 검은 인영들을 향해서도 검을 휘둘렀다. 다행히 조금 빨라지고 덩치가 커졌다 해도 거미들처럼 눈에 띄게 강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긴, 살아있을 때도 아니고 시체를 먹어치운 것만으로 갑작스럽게 강해진다는 게 이상하긴 했다.
서억, 사아악-.
화르르륵-.
승한은 눈앞으로 다가온 거대한 검은 인영을 반으로 베어냈다. 성화를 머금은 듀란달은 순식간에 녀석의 몸을 반으로 베어내며 몸을 불태웠다.
그대로 생명력이 더 질겨지긴 했는지 검은 인영은 잠시 동안 죽지 않고 발버둥 쳤다. 승한은 허우적거리며 휘두르는 손발을 마저 베어내며 사방에서 달려드는 검은 인영들을 향해 [올림포스]의 힘을 발현했다.
쿠구구구-.
“……끝이 없군.”
승한은 [올림포스]의 힘에 짓눌려 있는 검은 인영들을 둘러보다 성화의 힘을 소멸시켰다. 이대로 계속해서 성화와 [올림포스]의 힘을 남발하다가는 금방 힘이 바닥날 것 같았다.
당장은 듀란달의 힘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만 가능한 힘을 아끼며 싸워야 한다.
타닥-.
승한은 [귀신]을 이용해 높이 띄워 올라갔다. 그러자 [올림포스]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검은 인영들이 승햔을 향해 유령처럼 부유해 날아왔다.
승한은 성화도, [올림포스]의 힘도 사용하지 않았다. 오직 듀란달이 가진 힘만을 믿고 검을 휘둘렀다.
대신,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고 빠르게.
콰드드드드득-.
승한의 검이 허공에서 수십, 수백 번씩 휘둘러졌다. 모든 일격 하나하나가 [백검]의 검격을 가지고 땅 아래로 뻗어나갔다.
검은 인영들의 몸이 잘게 베어졌다. 반으로, 또 반으로, 또 다시 반으로 베어졌다.
콰작, 콰드드드득-.
쿠구구구-.
승한이 날린 검격은 꼭 검은 인영들만을 공격하는 게 아니었다. 그 주위에 있는 다른 건물들 역시 승한의 검격에 피해를 입었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는 건물들의 옆면이 부서지고, 무너져 내리기까지 했다.
승한의 검격은 윤재의 백염과는 달랐다. 듀란달이 악마를 비롯한 괴물들에게 상극이 되는 성검(聖劍)이라고는 하지만 검은 검이었다. 기본적으로 살상력이 있었고, 정도를 지키지 않은 검격은 그 주위에까지 피해를 입힐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어.’
하지만 승한은 성화와 [올림포스]의 사용을 포기한 순간부터 주위에 피해를 입히지 않고 싸우는 것도 함께 포기하고 있었다. 순수하게 듀란달만을 가지고 싸우면서 주위에 피해를 주지 않고 싸우기 위해서는 보다 세밀하게 검을 휘두르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싸우다가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6250타임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6250타임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6250타임 포인트를 획득하였습니다.]
승한의 머릿속으로 타임 포인트릐 획득 메시지가 연달아 들려왔다. 수십 마리의 검은 인영들을 향해 [백검]을 연달아서 날리다 보니 그 중 몇 마리가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몇 마리일 뿐, 죽지 않은 검은 인영들이 훨씬 많았다. 승한은 살아남아 조각이 되어 다가오는 검은 인영들을 향해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화르르르륵-.
콰아아아-!
그 순간, 시내 한복판 일대가 새하얀 불바다로 뒤덮였다. 윤재가 만들어낸 불바다가 검은 인영들을 덮쳐간 것이었다.
불바다는 윤재의 능력 중 가장 레벨이 높은 능력이었다. 승한의 성화처럼 3레벨이 되지는 못했지만 2레벨까지는 되었다. 그 정도만 하더라도 현존하는 헌터들 중에서는 비교할 상대가 없을 만큼 높은 레벨이었다.
-뜨거워…….
-살려줘…….
여전히 기분 나쁜 목소리였다. 승한은 타들어가는 검은 인영들을 향해서도 검을 휘둘렀다. 불에 타들어가던 검은 인영들은 승한의 검에 베어지면서도 마찬가지로 비명을 질렀다.
‘기분 뭣 같군.’
그들의 좋지 못한 감정들이 승한에게로 그대로 전해졌다.
[죽여주세요.]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죽여줘. 아니, 살려줘. 아니, 아니…….]
듀란달을 타고 검은 인영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의 입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아닌, 깊숙한 곳에서 들리는 본능과 진심이었다.
그들은 배고픔에 목말라하고 있었다. 또한 진심으로 죽고자 했다.
승한은 그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유령 따위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유령이라고 보는 것도 틀린 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옛날 옛날에 ‘죽은 자’였기 때문이었다.
무슨 이유로 이들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다가 악마와 같은 이들의 손에 들어가 이렇게 이용이 되고 있는지도 말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들이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도… 태워 줘…….]
검은 인영 하나가 승한을 향해 손을 뻗어왔다. 막 검을 휘둘러 검은 인영을 베어내려던 승한은 그의 속삭임에 멈칫했다. 그 순간, 승한은 왜 이들이 멀리서부터 승한을 향해 몰려들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은 원하고 있었다.
승한이 가진 성화의 힘을 말이다.
베이모를 비롯한 마족들이 성화를 노렸던 것과는 달랐다. 베이모와 나르샤, 마족들이 승한의 성화를 노렸던 이유는 그를 죽여 아포피스를 봉인하고 있는 성화를 꺼뜨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검은 인영들이 승한을 노린 이유는 달랐다. 그들은 승한을 죽이기 위함이 아닌, 승한에게 ‘죽기’위해 승한의 성화를 원했다.
승한의 성화는 악을 멸하는 힘. 동시에 악을 정화시키는 신성한 불꽃이었다.
그 힘에 타들어간 검은 인영들은 원래의 힘을 잃고 불타 사라졌다. 그들은 불타는 순간에는 고통스러워했지만, 죽는 순간에는 미약한 미소를 지었다.
영원한 고통에서 해방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승한에게 죽기를, 승한의 성화에 정화되기를 원했다.
뿌드득-.
이가 갈렸다. 눈앞에 있는 이들, 검은 인영이 받는 고통을 이해할수록 승한은 안타까움과 동정, 그리고 이들을 이렇게 만든 존재에 대한 분노가 더욱 커져갔다. 무슨 이유로 이들이 이렇게 고통 받아야 하는 건지 안타깝고 슬펐다.
“……성불해라.”
화르르륵-.
승한의 주위로 성화의 구슬이 떠다나기 시작했다. 승한을 향해 절규를 지르며 다가오던 검은 인영 하나가 재가 되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