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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죽은자
사람들은 다 대피했다. 한국에 검은 균열들이 대거 나타난 상황에서는 해외의 다른 나라를 도우러 갈 수도 없었다.
검은 균열에서는 한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괴물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균열이 벌어져 있을 뿐 괴물이 나타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건 아직도 이 상태군.”
일요일 아침.
승한과 윤재는 서로 돌아가며 잠을 자며 밤을 지새웠다. 두어 시간씩 쪽잠을 나눠서 자며 혹시라도 균열에서 어떤 반응이 오지 않을까 감시한 것이었다.
이른 아침에 막 눈을 뜬 승한은 여전히 검은 균열들이 곳곳에 남아있는 것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쯤 되니 차라리 괴물들이라도 잔뜩 튀어 나오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신경을 끌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신경만 쓰고 있자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일어났냐?”
“제대로 잠도 못 자겠어요. 사실 하루쯤 날 새도 문제없기도 하고…….”
“그래도 제대로 자 둬야 싸우지.”
승한 대신 검은 균열들을 감시하고 있던 윤재는 승한이 깨우기도 전에 일어나자 고개를 들어 거대한 균열을 바라봤다.
“난 저거 맡을 자신 없다.”
“……저라고 해서 자신 있는 줄 알아요?”
거대한 균열은 자신이 맡겠다며 자신만만하게 이야기 해놓기는 했지만 승한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 거대한 검은 균열 속에서 뭐가 나올지 모르니, 모르는 만큼 더욱 불안감은 커져갔다.
“저건 전 세계에 딱 두 개밖에 없다고요?”
“그래. 한국과 미국. 확인된 곳은 이렇게 두 군데 뿐이라고 하더라고. 아직 더 확인이 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게 있으면 바로바로 보고를 하고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겠냐?”
“그건 그렇죠. 하아, 왜 하필이면 저희가 있는 곳에 저런 게 나타난 건지…….”
보스라는 존재들이 점차 수가 적어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전 세계에 단 둘뿐인 균열이라니, 승한은 오히려 그게 더욱 불안했다. 차라리 지금까지 나왔던 다른 보스들과 같은 수준의 보스였다면 속이 편했을 텐데 말이다.
‘큰소리 친 것도 그것 때문이기도 하고.’
서울 지역에 있는 다른 헌터들이 지원을 오기로 했다지만 그것도 크게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들 역시 맡은 지역이 있었고, 지원을 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그 때까지는 승한이 거대한 균열에서 나타난 존재를 막아내야 한다는 것인데, 사실상 승한 혼자서 상대해야 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차라리 빨리 뭐가 튀어 나오기라도 하면 좋겠네요. 아무 반응이 없으니 더 불안해요.”
“하긴. 나도 아무 반응이 없으니 불안하긴 하다.”
“지금 몇 시에요?”
“7시.”
“4시간 남았네요.”
다른 때에는 오전 11시를 기점으로 시간이 멈추고, 괴물들이 나타났다. 승한과 윤재를 비롯한 세계 각국의 헌터들과 정부는 그 시간을 기점으로 검은 균열이 반응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아직까지도 괴물들을 다 정리하지 못한 마당에, 우린 참 느긋하네.”
“그렇다고 여길 두고 지원을 갈 수도 없잖아요?”
“그렇긴 해도…….”
윤재는 시내 한 가운데 있는 벤치에 앉아 느긋이 중얼거렸다.
“주희 녀석은 괜찮으려나.”
“주희는 갑자기 왜요?”
“그 녀석 미국으로 갔잖아? 거기도 괴물들이 많이 나타나는 편이고, 거대한 균열이 나타나기도 했다잖아? 좀 걱정은 되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윤재의 본성은 숨길 수 없었다. 그는 좋지 못하게 헤어진 주희마저도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승한은 윤재와는 달리 주희가 어떻게 되든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애초에 그렇게 깊은 인연을 맺은 사람도 아니었고, 생각이 잘 맞는 편도 아니었다. 성격도 날이 서 있고 이해 타산적이었다.
같이 일을 하는 동료일 뿐, 친한 동생이나 친구로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마저도 끝맺음이 좋지 못해서 그 이하의 관계로 정리되었다.
“형은 너무 사람이 좋아서 탈이에요.”
타박 아닌 타박에 윤재가 히죽 웃었다. 그 역시 자신의 이런 면이 조금은 단점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물론 단점이라기보다는 장점에 더 가까웠다. 윤재의 이런 성격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승한 역시 윤재의 이런 면에 반해서 얼마 만나지 않았음에도 그와 이토록 가까워 진 것이 아니던가?
“네 시간이라… 아직 기다리기엔 좀 많이 남았네요.”
“쉬어둬라. 내가 보고 있을게.”
“형 혼자서요? 그러기엔 너무 미안한데…….”
“어차피 저기서 나온 녀석은 네가 맡아야 할 거 아냐? 나도 도와주긴 하지만 네 역할인 훨씬 큰데, 컨디션 조절 해 놔야지?”
“……결국 부려먹겠다는 거 아니에요?”
승한은 다시금 드러누웠다. 딱딱한 벤치 의자였지만 딱히 불편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자 두는 게 낫긴 할 것이다.
“그럼 잘 부탁해요, 형.”
“쉬어라.”
**
깊게 잠들지 못하면 꿈을 많이 꾼다고 하던가? 잠깐 잠이 든 사이 승한은 희미한 꿈을 꿨다.
‘아롤?’
승한의 눈앞에는 아롤이 보였다. 그는 듀란달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방패를 들고 있었다. 은색 갑주를 입고 검과 방패를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은 신화에나 나오는 영웅의 모습과 잘 어울려 보였다.
승한과 마찬가지로 아롤 역시 승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한은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자신이 잠들었고, 이게 꿈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자각몽인가?’
아롤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 입을 열며 말을 하고 있었는데, 주의를 기울여도 목소리가 끊어질 듯 희미했다. 이런 종류의 꿈은 처음이었다.
‘아니, 단순한 꿈은 아니야.’
아롤이 자신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꿈이 아니라고. 그는 자신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거지?’
승한은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발버둥 쳤다. 하지만 역시나 원하는 대로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마치 몸이라는 게 아예 없는 것처럼.
저벅-.
아롤이 승한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 그는 검과 방패를 내려뜨리고 계속해서 무어라 말했다.
입모양.
승한은 그의 입모양을 유심히 살폈다.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모습과 얼굴은 똑똑히 보였다. 입모양을 주시하자 몇 개의 단어를 입모양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위험… 해? 악마?’
불길한 단어들이었다. 희망적이고 반가운 단어는 하나도 없었다. 승한은 입모양을 통해 아롤이 하는 말의 전체를 듣기보다는 몇몇 단어를 통해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유추했다.
‘등신… 새끼? 귓구멍?’
아무래도 승한이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뭐라고 욕을 하는 모양이었다. 표정에서부터 답답함이 훤히 보였다. 그는 나름대로 승한을 돕겠다고 이렇게 나타난 모양인데, 승한이 그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으니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턱-.
아롤이 승한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아서 혹시 자신의 몸이 아예 없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래도 어깨를 통해 아롤의 손이 그대로 느껴지는 걸 보면 몸은 멀쩡히 있는 모양이었다.
“정신 못 차리냐?”
흐릿하고 희미하게 아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승한의 눈에 초점이 맞춰졌다. 아롤은 그런 승한을 바라보다 얼굴을 바로 앞까지 들이밀었다.
“날 불러.”
**
“이제 일어나.”
승한은 자신의 몸을 흔드는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눈을 번쩍 떠 보니 먹구름이 잔뜩 끼어서 어두운 하늘과 윤재의 얼굴이 보였다.
“……뭘 그렇게 무섭게 일어나냐?”
“형이 깨웠어요?”
“어, 응. 시간 되면 깨워 달라며?”
꿈을 통해 아롤과 만나고 있던 승한은 이렇게 일어나버리니 아쉬움이 남았다. 분명 아롤은 승한을 도와주고자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고, 승한은 막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일어나 버리는 바람에 그를 더 만나지 못하다니.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던 것 같았는데,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윤재를 탓할 거리도 되지 못했다.
승한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럴 때 아롤과 꿈을 통해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능력의 레벨을 올리거나 새로운 능력으로 각성하게 될 때가 아니면 아롤이나 다른 신들과 만나는 경우가 없지 않았던가?
승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을 윤재가 예상했을 리 없었다. 윤재는 단지 때가 되어서 승한을 깨웠을 뿐이었다.
‘뭘 말하고 싶었던 거지?’
그가 했던 말의 대부분은 듣지 못했다. 입모양을 통해 들을 수 있었던 단어가 몇 개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입모양을 통해 유추해 낸 단어일 뿐이지 확실한 건 없었다.
그나마 그 길고 많은 이야기 중 승한이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던 건 몇 가지 단어뿐이었다.
‘위험, 악마.’
대충 악마와 관련되어 위험하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어찌 보면 의미가 없었다. 이미 승한은 아롤에서 괴물들의 등장이 악마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상태였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승한은 다른 말들보다는 마지막 순간, 또렷한 목소리로 들은 아롤의 말이 신경 쓰였다.
‘자기를 부르라고?’
대체 무슨 소리일까? 승한은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다가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었다.
바로 7스테이지를 통과하고 얻은 능력인 [강신]이었다. 다른 존재의 힘을 몸에 받아들일 수 있는 이 힘을 이용한다면 실제로 아롤의 힘을 빌려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말만은 확실했다. 아롤이 승한이 가진 능력인 [강신]을 알고 있다면, 그 능력을 이용해 자신의 힘을 빌려오라고 조언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도로 가든 모로 가든, 결과만 맞으면 되겠지.’
승한은 앞서 아롤이 한 이야기를 모른다 해도 그가 해준 조언대로 [강신]을 통해 아롤의 힘을 빌려오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형, 지금 몇 시에요?”
“10시 반쯤 됐어. 조금 더 자게 둘까 하다가 조금 여유 있게 깨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평소대로 괴물들이 나타난다면 11시가 딱 그 시간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 30분 정도 시간이 남아있었다.
이 정도면 여유가 있었다. 승한은 괴물들이 나타나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보유 타임 포인트 : 442035p]
승한은 남아있는 타임 포인트를 확인했다. 대부분의 타임 포인트를 소모했던 상태였지만 방금 전 괴물들과의 싸움으로 꽤나 많은 타임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었다.
‘44만이라…….’
어중간한 수치였다. 적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만한 타임 포인트로는 [강신]을 제외한 어떤 능력도 레벨을 올릴 수 없었다.
‘뭐, 상관없나?’
어차피 승한이 레벨을 올리려 했던 능력은 [강신]이었다. 아롤의 능력을 빌려올 때, 더 많은 힘을 빌려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3200타임 포인트를 소모하였습니다.]
[‘능력 - 강신’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6400타임 포인트를 소모하였습니다.]
[‘능력 - 강신’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12800타임 포인트를 소모하였습니다.]
[‘능력 - 강신’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
[보유 타임 포인트 : 240035p]
승한은 [강신]의 레벨을 7레벨까지 올릴 수 있었다. 이후부터는 레벨을 하나 올리는데 20만이 넘는 타임 포인트가 필요했는데, 승한은 보유한 타임 포인트를 아껴두었다.
‘[강신]을 사용하려면 최소한 10만 타임 포인트는 필요하니까.’
만약 여기서 [강신]의 레벨을 하나 더 올리게 되면 순식간에 타임 포인트라 4만 아래로 떨어지게 되어버린다. 승한은 [강신]을 사용하기 위한 최소한의 타임 포인트만을 남겨두었다.
그래야 아롤의 힘을 완전히 빌려올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