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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가치
승한의 지적에 박원영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표정이 좋지 못한 게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말씀 안 하실 겁니까?”
“……거기에 대해선 할 말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분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한 건 명백한 사실이니까요.”
예상 외로 박원영은 승한의 말에 순순히 인정했다. 무슨 변명이라도 늘어놓을 줄 알았던 승한은 오히려 그의 대답에 더욱 눈살이 찌푸려졌다.
6.25참전 용사들에 대한 복지 문제는 비단 최근 떠오른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거기에 대한 이슈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었고, 가까운 예로 승한이 다니는 대학 근처에만도 6.25참전 용사로 알려진 할아버지가 한 명 있었다.
다른 나라 같으면 영웅으로서 대우를 받았을 그가 폐지를 줍고 다니는 모습을 보며 승한은 오래 전부터 한국에서 훈장이나 명예 같은 게 별볼일 없다고 생각했다. 그 뿌리 깊은 의심은 정치인들이 명예가 아닌 권력을 탐하는 것으로 보였고, 그들을 불신하게 만들었다.
“그래서요?”
“믿어 달라는 말씀밖에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당장 저희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입니다. 의심을 하신다면 그 의심을 풀어드릴 방법이 없으니까요.”
“그게 할 말의 전부입니까?”
처음 국무총리 박원영의 등장으로 기가 죽었던 승한은 어느새 그가 누구인지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그들의 잘못을 다그쳤다.
승한은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뉴스도 잘 보지 않는 편이었고,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피해가 오지 않는 일이라면 잘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자기 앞가림하기도 벅차하던 승한이었다.
그런 승한이 정부가 가장 큰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참전 용사들에 관한 처우였다. 그저 인터넷에서 댓글 하나, 게시글 하나 적는 것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승한은 정부에 직접적으로 말 할 수 있는 힘이 있었고, 눈앞에는 정부의 대변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국무총리 박원영이 있었다.
“어차피 헌터와 기업이 괴물의 사체를 거래할 때 받는 세금안도 검토 중 아닙니까? 혹시라도 헌터와 정부가 직접 괴물의 사체 거래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서요. 거기에서 들어오는 세금만 가지고도 예산은 꽤나 메워질 텐데요?”
“그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부족하겠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부의 몫 아닙니까? 우리 헌터들이, 그리고 제가 그것까지 신경 써야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거기까지 말한 승한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러자 박원영은 승한을 설득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는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미 승한은 한국 정부를 그렇게 신용하지 않는 상태였다. 그것은 6.25참전 용사에게 제대로 된 복지를 내려주지 않은 정부의 업보였다. 당장 승한뿐만 아니라 다른 헌터들 중에서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꽤나 있을 것이다.
‘한 번의 실수가 뼈아프군.’
박원영 역시 참전용사들을 방치한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국무총리인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면 그들의 처우를 다르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원영은 굳이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고, 국무총리인 그는 모든 것을 신경 쓰기에는 너무 바빴다.
하지만 국민이 원하는 정치와 정치인들이 원하는 정치는 달랐다. 박원영은 뼛속부터 정치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민의 민심을 저버린 죄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분들에 대한 처우를 잘못해서 믿음이 가지 않으신다면 어쩔 수 없죠. 그거야 저희 잘못이니까요.”
“이해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다행히 박원영이 크게 따지지 않고 넘어가자 승한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박원영이라는 사람은 그렇게 강압적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승한이 가진 위치가 결코 낮지 않다는 것도 한 몫 했겠지만 말이다.
“그럼 알겠습니다. 승한씨가 잡은 괴물의 사체에 대한 권한은 오롯이 승한씨에게 양도해 드리겠습니다. 단, 사체의 거래에서 생기는 세금은 엄중히 관리할 것입니다.”
“너무 터무니없게만 측정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세금이 너무 강하면 헌터들의 반발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야겠죠.”
승한이 생각하기에는 굳이 정부와 헌터들이 괴물의 사체를 직접 거래하지 않더라도 괴물의 사체를 거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세금만으로도 정부의 예산 문제는 대부분 해결될 것 같았다. 예산이 부족하더라도 헌터들도 괴물의 사체가 돈이 되는 이상 사냥을 멈추는 최악의 경우는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 이제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승한씨에 대한 보상 문제로 주제를 바꿔 볼까요?”
“그 이야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전 승한씨를 보려고 온 거라고 말입니다. 저희들 입장에서는 승한씨를 어떻게 해서든 붙잡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승한씨가 아직 이 나라에 있기를 원하시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보상을 높여 저를 잡아 두시려는 겁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더 좋은 대우를 약속한 곳을 거절하시긴 했지만, 적어도 저희가 그들보다 더 좋은 대우를 해 드려야 하는 게 도리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저희도 불안하지 않을 테고요.”
말은 길었지만 결국 돈을 더 줄 테니 가능한 한국에 계속 붙어 있으라는 뜻이었다. 정부도 눈이 없는 게 아니니 그간 승한에게 미국이 반복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어차피 승한은 미국이든 어디든 외국으로 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상을 높여 주겠다는데 거절할 생각도 없었다. 주겠다면 받는 게 승한에게도 더 이익이었다.
“뭐, 그런 거라면 저야 좋죠. 그런데 단순히 그런 이유라면 다른 사람을 보내도 될 텐데요? 여기 있는 강동훈 소령님과 이야기를 해도 되고요.”
“아무래도 승한씨는 자신의 위치를 아직 잘 모르나 봅니다.”
“네?”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승한씨 한 사람이 가지는 가치는 현재 웬만한 국회의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습니다. 향후 몇 년, 혹은 앞으로 계속해서 괴물들이 나타나게 될 경우, 승한씨의 가치는 국가원수 이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국가원수 이상의 가치. 국무총리인 박원영이 하는 말이었다. 그는 절대 허언을 할 사람이 아니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승한은 도를 넘어선 칭찬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쩌면 그 말이 썩 틀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괴물이 나타나기 시작한지 이제 막 한 달이 되었다. 그간 한국은 인명 피해나 자산 피해를 입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 물론 헌터들의 피해는 있었지만 민간인들의 피해는 없었다. 그것은 한국의 헌터들이 수준이 뛰어났고, 괴물들을 미연에 막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헌터들의 수준이 떨어지고 헌터들의 수가 적은 다른 나라는 아니었다. 그런 곳의 인명피해와 국가적 자산 피해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헌터들이 사라지게 되면 한국도 그런 곳과 마찬가지가 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리고 승한은 홀로 보스를 잡을 능력이 있는 헌터였다. 만약 승한이 없다면 보스를 잡기 위해 많은 헌터들이 죽을 것이고, 그 피해가 누적되면 한국도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가 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그 때문에 정부는 실력이 뛰어나 홀로 보스를 잡을 수 있는 승한을 주시하고 있었다.
“캐나다 지역에 총 두 마리의 보스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보스에게 목숨을 잃은 헌터가 도합 쉰 명에 달합니다.”
“……쉰 명이요?”
“네. 다행히 보스의 수는 적어졌지만, 그만큼 강해졌습니다. 대부분의 국가가 마찬가지입니다. 보스를 잡기는 했지만 헌터들의 피해가 최소 스물 이상인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하지만 우리 한국은 고작 네 명의 피해가 전부입니다. 바로 승한씨 덕분이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한국에 나타난 두 마리의 보스 모두를 승한이 잡았으니까.
하지만 승한은 지금껏 자신이 보스를 잡은 것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었다. 정부에서도 그저 조금 까다로운 괴물을 잡았구나, 정도로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부는 승한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보스로 인한 각국의 피해 상황을 집계 내린 뒤였다. 또한 보스를 잡은 헌터가 승한이라는 것과 승한이 말레이시아에서도 두 마리의 보스를 잡았다는 사실을 통해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 상황에서, 그리고 장기적으로 볼 때 승한이 가지는 가치는 단순히 헌터 한 명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승한씨를 만나기 위해 제가 움직이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강동훈 소령을 비롯해 아래에 있는 사람이 움직이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죠. 일정이 있으셔서 오지 못하셨지만, 이 자리에는 제가 아니라 대통령께서 오셨어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국무총리 박원영이 이 자리에 온 것은 일종의 리액션이었다.
우리가 너를 이만큼 신경 쓰고 있으니, 어디로 사라지거나 하지 말아 달라는. 그리고 그 리액션에 박원영이 직접 움직인 것은 분명 효과가 있는 일이었다.
“……저를 그 정도까지 신경 쓰고 계시는지는 몰랐군요.”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있나요. 자세한 이야기는 조만간 결정이 될 겁니다. 간단하게 식사라도 하시겠습니까?”
“먹고 왔습니다. 그리고 뒤에 약속이 잡혀 있어서요.”
“그렇군요. 그럼 혹시 나중에 연락 주실 일 있으시면 이쪽으로 연락하시면 됩니다.”
박원영은 승한에게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연락처를 찍어주었다. 국무총리의 개인 핸드폰 번호를 받은 승한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죠.”
그렇게 국무총리 박원영과의 만남은 짧게 이어진 뒤 끝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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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서 나온 승한은 약속 장소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박원영의 호의를 거절하고 밖으로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능력을 사용해서 빠르게 움직이고 싶었는데, 그건 너무 눈치가 보여서 결국 택시를 탔다.
‘더 같이 있다가는 부담스러워서 체하겠어.’
얼떨결에 번호까지 받긴 했지만 승한은 박원영과의 만남이 썩 즐겁지는 않았다. 승한은 가능한 정치와 관련된 사람과는 만남을 피하고 싶었다.
근처에서 택시를 잡아 탄 승한은 평촌동으로 이동하며 안석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잠시 이어진 뒤, 안석환이 전화를 받았다.
-아, 이제 끝나셨습니까?
“연락이 늦었습니다. 어디십니까?”
-평촌역으로 오시면 됩니다.
약속 장소를 정한 승한은 평촌역에서 내렸다. 2번 출구 앞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익숙한 노란 머리의 청년이 다가왔다.
“오래간만입니다, 승한씨.”
“다들 만나기만 하면 그 소리군요. 그렇게 오래 되지는 않았는데.”
“하하. 그렇습니까? 전 꽤 오래 된 느낌이라서 말이죠. 스테이지 속에서 닷새 동안 헤맸더니요.”
“닷새씩이나요?”
승한은 잠들어 있던 시간에 비해 스테이지 속에서의 시간 자체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10시간이 조금 넘는 정도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안석환은 승한과 반대의 경우인 모양이었다. 현실의 시간은 그리 많이 지나가지 않았는데, 스테이지 속에서의 시간은 닷새씩이나 되었다. 하긴, 그렇다면 승한을 오랜만에 본 것처럼 느낄 수도 있었다.
“네. 자세한 이야기는 자리를 옮겨서 하도록 하죠.”
“어디로 가려고요?”
“식사는 하셨죠?”
“그럼요.”
“카페에 다녀오셨다니 또 카페로 가기는 그렇고… 시간이 조금 이르긴 한데, 가볍게 한 잔 하시겠습니까? 꽤 멋진 술 집을 아는데…….”
안석환은 손가락으로 술잔을 드는 흉내를 냈다. 잠시 고민하던 승한은 또 다시 카페로 가는 것보다는 가볍게 한 잔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는 안 마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