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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가치
나르샤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 바로 생각해서 내뱉은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 세상에 그녀 혼자 남겨진 순간부터 계속해서 생각해 오던 말을 승한에게 건넨 것뿐이었다.
승한은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했다.
나르샤의 말대로 그녀는 인간이 될 수 없었다. 아무리 현대 과학 기술이 좋다고 해도 종족을 바꾸는 기술은 없었다. 그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일이었고, 당장 인간의 기술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마족처럼 보이는 그녀를 인간처럼 보이게 할 수는 있었다.
마족은 기본적으로 인간과 매우 흡사했다. 얼굴이나 신체 구조, 목소리 등, 모든 것이 비슷했다. 나르샤가 비록 인간의 언어를 모른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인간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언어야 배우면 그만이었다.
붉은 피부와 두 개의 뿔. 그 정도는 인간의 기술로 어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만 어떻게 할 수 있다면 나르샤를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위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녀가 다른 사람들 속에서 보통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알 수 없었다. 성화의 힘을 간직한 채, 보통 사람과 다를바 없는 힘을 가지고 있을 때라면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헌터라는 인간들에게 같은 종족들을 모두 잃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성화를 잃고, 이미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몸을 가지게 되었다. 당장 총알에 맞고도 멍이 든 정도에서 그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것도 종족도 다른 사람들 속에서?
나르샤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렇게 오래도록 승한이 자신을 도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죽으실 건 아니지 않습니까?”
승한이 해 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여기서 사실 생각이 없으시다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방법이라도 찾아 봐야죠.”
“어떻게요?”
“잘요. 올 방법이 있으면 돌아갈 방법도 있지 않겠습니까?”
“돌아가 봤자 남은 마족은…….”
“정말 한 명도 없습니까? 마족들은 애들도 없고, 노인도 없습니까?”
혹시나 싶어 던진 말이었는데, 나르샤의 표정이 급변했다. 아무래도 모든 마족들이 이곳으로 넘어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돌아가야죠. 인간들과 함께 살 생각이 없다면요.”
“……네.”
나르샤는 고개를 푹 숙이며 다시 승한의 뒤를 따라왔다. 승한이 한 말이 다시 그녀의 다리에 힘을 불어넣었다.
승한은 나르샤를 데리고 집으로 도착했다. 시간이 꽤 늦어서인지 승한의 어머니와 승아는 이미 집에 와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승한아! 어디 나가지 말라니까 어딜 다녀오니?”
“승한이 왔어?”
승한이 집으로 돌아오자 거실에 있던 어머니가 가장 먼저 걱정에 잔소리를 늘어놓았고, 방에 있던 승아가 뛰쳐나왔다. 승한은 묵묵히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가고 뒤에서 쭈뼛거리고 있는 나르샤의 손목을 잡아 집 안으로 들였다.
“승한아, 뒤에는……?”
나르샤를 처음 발견한 어머니가 깜짝 놀라 물었다. 승한과 함께 왔다지만 어머니의 눈에 그녀는 아직까지도 괴물에 지나지 않았다.
“엄마를 보고 놀라서 집을 나간 손님이에요.”
“소, 손님?”
“네. 당분간 저희 집에 머물 거예요. 괜찮죠?”
괜찮냐고는 물었지만 승한의 말은 요구가 아닌 강요에 가까웠다. 어머니와 승아는 승한이 괴물을 데리고 오자 얼떨떨했다.
“대, 대체 무슨 일이니?”
“엄마. 괴물로 보지 마세요. 이 분도 저희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감정이 있어요. 그리고 저에게 도움을 줬던 분이에요.”
“위험하지는 않겠니?”
“전혀요. 위험할 일을 제가 만들겠어요? 믿어 주세요, 엄마.”
“부탁드려요, 어머니.”
나르샤가 허리를 크게 숙여 인사했다. 어머니와 승아는 한국말이 아님에도 나르샤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자 깜짝 놀랐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괴물이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자신들처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적대감이 조금 사라졌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위험할 거 없다며? 괜찮아. 재미도 있을 것 같고. 언제 또 이런 일이 있겠어?”
어머니는 조금 떨떠름한 듯한 반응이었지만 승아는 오히려 반기는 분위기였다. 옛날부터 말괄량이 기질이 있었던 그녀는 위험하지만 않다면 오히려 즐기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방은? 그분은 어디서 재우려고?”
“아마 당분간은 내 방에서…….”
“야, 그래도 여자인데 네 방에서 재우는 게 말이 되냐? 안 돼! 거실에서 따로 재우던가 해야지.”
승아는 승한이 나르샤와 한 방에서 자는 걸 절대 반대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여자라고 말하는 걸 보면 나르샤를 마냥 괴물로만 보는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당분간만이라면 언제까지 말이니?”
“집을 구해 볼 생각이에요. 가능하면 방이 3개 이상 있는 집으로요.”
“집을?”
“아, 맞다. 괴물들 잡아서 돈 번다고 했지? 얼마나 들어왔어?”
승한이 괴물들을 사냥하고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는다는 건 승한의 어머니와 승아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이미 승한이 정부와 계약을 할 때 두 사람에게 말을 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당장 어머니와 승아는 아무리 보상이 많이 돌아온다지만 승한이 괴물들과 싸우는 걸 반대했었다. 가족이 괴물들과 위험하게 싸운다는데 환영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어차피 싸워야 한다면 최대한 많은 보상을 받는 게 나은 일이었다.
“글세, 나도 확인을 안 해봐서…….”
승한은 스마트폰으로 통장으로 입금된 내역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돈이 입금된 내역을 확인했을 때도 꽤 많은 돈이 들어와 있었는데, 지금은 아마 말레이시아에서의 성과급도 함께 들어와 있을 것이었다.
[4,724,447,000]
“…….”
승한은 통장 잔고를 확인해 보고는 할 말을 잃었다. 말레이시아에서의 성과급이 꽤 많을 것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예상보다도 훨씬 많은 돈이 입금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잡은 괴물이 더 많은 모양인데.’
하긴, 말레이시아에서 승한이 잡은 보스만 해도 둘이었다. 더군다나 이틀 동안 쉬지 않고 움직이며 괴물들을 사냥한 덕분에 아무리 말레이시아에 있는 괴물이 한국보다 훨씬 적다지만 꽤나 많은 괴물들을 사냥했다.
더군다나 이 액수는 아직까지 괴물의 사체에 대한 보상이 포함되지 않은 액수였다. 아직까지도 괴물의 사체에 대한 정확한 보상은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고, 그 보상은 계속해서 미뤄지고 있었다. 승한의 예상으로는 지금까지 얻은 보상을 모두 더한 것보다도 괴물의 사체에 대한 보상이 더 클 것이었다.
“얼만데 그래?”
“47억 정도요.”
현실감이 없는 액수에 승한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역시나 승한의 어머니나 승아는 깜짝 놀라며 다시 물었다.
“47억?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정확히는 47억 2천 400만원이야.”
“지, 진짜?”
승아는 입을 쩍 벌렸다. 어머니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승한이 말한 액수는 현실성이 없는 액수였다.
옆에 있던 나르샤는 승한이 말하는 액수가 얼마나 큰돈인지는 알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가운데, 승아가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너, 너 출세했다?”
“고마워, 누나.”
“집 옮긴다는 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네. 그 정도면 안양에 있는 작은 건물도 하나 사겠는데? 아니, 아닌가?”
정확한 집값이나 건물 값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승아는 47억이라는 돈이 얼마나 큰돈인지에 대한 감이 없었다. 마냥 집 하나를 사기에는 지나치게 큰돈이라는 것만 알뿐이었다.
“아마 이 정도 돈이면 강남권에서도 꽤나 큰 집을 살 수 있을 걸? 뭐, 강남에 욕심은 없지만.”
승한은 아직 들어올 돈이 더 남아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것까지 미리 알려주어 김칫국을 마시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얼마나 나올지도 아직 모르고 말이야.’
괴물의 사체에 대한 보상. 그것은 현재 헌터 연합이 정부와 조율을 하는 중이었다. 에너지원의 개발에 대해서도 한 시가 급하니 아마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조정이 될 것이다.
“이럴 게 아니라 당장 이사할 집부터 알아봐야겠네. 꺄악! 동생 덕분에 드디어 방 세 개짜리 집으로 가는구나.”
승아는 이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들뜬 모양이었다. 성인이 되고부터 말을 아끼긴 했지만 그녀는 아직까지도 자신의 방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어서 돈을 모으겠다는 생각 때문에 자취나 독립도 먼 훗날 일로 미뤄둔 그녀인 만큼 더욱 기쁠 수밖에 없었다.
‘뭐, 아무튼 잘 된 것 같네.’
다행히 가족들은 나르샤를 크게 부담스러워 하거나 거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특히 승아의 반발이 두려웠던 승한은 오히려 그녀가 나르샤를 반기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나르샤는 당분간 승한의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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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더 지나자 금세 금요일이 되었다. 윤재의 말대로 승한은 하루를 바쁘게 시작했다. 반드시 만나야 될 사람이 벌써부터 둘이나 정해져 있었던 것이었다.
승한은 강동훈 소령과 안석환 중, 누구를 먼저 만날까 하다가 강동훈 소령에게 먼저 연락을 넣었다. 강동훈 소령은 승한의 연락에 다른 일을 다 제쳐두고 그를 만날 약속을 잡았다.
집은 승한의 어머니가 알아봐 두겠다고 했다. 당장 어느 위치에 있는 어떤 집으로 이사를 가고 싶은 계획이 없었던 승한은 일단 어머니가 알아봐 오는 집을 보고 이사를 결정하기로 했다.
강동훈 소령은 승한이 준비를 모두 마칠때 쯤 승한의 집앞으로 차를 타고 찾아왔다. 아무래도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출발해서 온 모양이었다. 승한은 강동훈 소령이 직접 움직여서 이렇게 빨리 오자 얼떨떨해 하며 그가 몰고 온 차에 탔다.
“오래간만입니다.”
“오래간만이라기엔 며칠 안 되지 않았습니까?”
강동훈 소령은 몰라도 승한은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게 마치 어제처럼 느껴졌다. 말레이시아에서 귀국 후 그를 화요일날 보고 바로 집에서 스테이지를 끝낸 게 어제였고, 그 뒤 하루가 지나고 만나게 된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강동훈 소령은 승한이 스테이지를 끝내자 이틀이 지나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다. 물론 그 게 아니더라도 사흘 만의 만남인 만큼 그렇게 오랜만이진 않았다. 강동훈 소령의 인사는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면이 있었다.
“하하. 사흘이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같은 때는 더더욱 말입니다.”
“하긴, 일주일 단위로 괴물들이 나타나는데 사흘이면 긴 시간이죠.”
“그렇습니다. 어디로 가서 이야기 하시렵니까? 주로 가시는 데라도 있으십니까?”
일전에는 승한을 동등한 위치로 대하던 강동훈 소령이 이제는 승한을 마치 윗사람처럼 대했다. 그만큼 승한은 이제 강동훈 소령이 감히 대하기가 어려운 사람이 되었다.
승한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위치를 점점 실감하고 있었다. 근래 들어서 헌터에 대한 위치는 재조명이 되고 있었다. 단순히 괴물을 잡기 위한 편리한 도구에서 반드시 필요한 무기와 같은 존재로 말이다.
‘편리한’과 ‘필요한’은 느낌이 많이 달랐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때와 반드시 필요한 경우는 판이하게 달랐으니 말이다. 특히나 그런 헌터들 중에서도 세계적으로도 최고로 꼽히는 승한은 군부대의 소령에 지나지 않은 강동훈 소령이 함부로 대하기는 어려웠다.
“글쎄요… 딱히 찾아가는 곳은 없습니다. 그냥 근처 커피숍으로 가죠.”
“그럼 시청 근처로 가겠습니다. 가장 처음 승한씨와 이야기를 나눴던 곳이 그쪽이었고, 시장님께서도 승한씨를 한 번 뵈었으면 하십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던 강동훈 소령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특별하게 기다리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