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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타임-123화 (123/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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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가치

주희라는 이름에 승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면서 스마트폰의 부재중 내역을 확인했는데, 윤재가 건 전화 외에도 모르는 번호가 하나 찍혀있었다.

아무래도 이 번호가 바로 주희의 전화였던 모양이었다. 070으로 시작하는 걸 보면 인터넷 전화였는데, 제 번호로 전화를 한 게 아닌 걸 보면 아직까지 자신의 번호를 알려주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거 맞죠?”

“070으로 시작하는 번호긴 했지.”

“뭐래요? 변명이라도 하던가요?”

“그런 건 없더라. 미안하다는 말은 무슨. 미안해서 연락한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자기 따라서 미국으로 가자고 하더라.”

“……결국 그거였어요?”

승한과 윤재는 주희가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미국이나 다른 국가로 그녀가 넘어간 것이라고 예상했다. 거의 확신하고 있긴 했지만 막상 그 말을 주희의 입에서 듣자 기분이 많이 언짢아졌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뭐라고 했긴.”

윤재는 주희와 통화했던 때를 이야기했다.

**

-윤재 오빠, 저 주희에요.

전화를 받은 윤재는 익숙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이주희? 너야?”

-네. 혹시 어디 다친 데는 없으세요? 이번에 나타난 괴물들이 꽤나 강하던데.

진심인지 가식인지는 알 수 없지만 주희는 가장 먼저 윤재의 몸을 걱정했다. 윤재는 괜찮다고 대답하고는 화제를 돌렸다.

“왜 갑자기 사라진 거냐? 연락도 없이.”

-오빠도 아실 거 아니에요?

“……역시 돈 받고 다른 나라로 간 거냐? 이야기 들었다. 대피소로 너희 가족들도 안 나타났다고.”

-네. 지금 저 미국이에요. 여긴 정말 되게 좋네요. 헌터들에 대한 대우도 한국보다 훨씬 좋고. 가족들도 저와 마찬가지로 대우를 받고 있어요. 대체 왜 그동안 한국 땅에 있었을까 싶다니까요?

통화음 너머로 들려오는 주희의 목소리는 밝았다. 지금까지 윤재가 들어온 어딘가 한 톤 가라앉아 있던 주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미국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오빠도 여기로 오는 게 어때요?

“……뭐?”

-아마 오빠도 와 보시면 깜짝 놀랄 걸요? 여긴 한국과는 대우가 차원이 달라요. 물론 한국도 나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좀 더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일하는 게 낫지 않아요?

“……그거 때문에 연락한 거냐?”

윤재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성격 좋은 그의 얼굴에 짜증이 번졌다.

그는 주희가 미국으로 넘어가든, 영국으로 넘어가든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리 알고 지냈던 동생이라도 윤재가 그녀의 인생에 이래라 저래라 참견할 권리는 없었으니까. 더 좋은 대우를 약속받고 그곳으로 넘어간다는 건 굳이 헌터가 아니라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연락 한 통 없다는 건 기본적인 예의 문제였다. 더군다나 괴물들과 싸우는 헌터들의 일을 생각해 보면 그녀는 승한과 윤재의 목숨을 위험하게 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다행히 승한의 능력이 뛰어나서 망정이지 다른 헌터였다면 둘이서 다른 괴물들 모두를 상대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미안하다는 말은 못할망정, 기껏 연락해서 한다는 말이 자신이 있는 미국으로 넘어오라는 것이라니.

“왜, 거기서 한국에 있는 다른 헌터들을 끌고 오면 돈이라도 두둑하게 챙겨 준다고 하던?”

가시가 박힌 윤재의 물음에 주희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그런 게 아니더라도 여기로 오면 오빠도, 승한이 오빠도 분명 좋을 거예요.

“너 때문에 한국 땅을 떠난 가족들도 좋아하냐?”

-그럼요. 여기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데요. 저는 오빠를 생각해서…….

입에 발린 주희의 말에 윤재가 스마트폰에 입을 가까이 대고 대답했다.

“꺼져, 이 썅년아.”

거기까지 말한 윤재는 바로 통화를 끊었다.

**

윤재는 승한에게 주희와의 통화 내용을 말해주었다. 승한은 윤재의 말을 듣고는 절로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만큼 주희의 말은 경우가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고요?”

“자기가 뭘 잘못한 건지도 모르는 눈치더라. 하긴, 알고 있었으면 그렇게 쉽게 전화는 안 했겠지. 전화로 그렇게 쉽게 너와 함께 미국으로 오라는 개소리도 못했을 거고.”

윤재는 승한과는 달리 주희를 그렇게 밉게 보지 않고 있었다. 승한은 갑작스럽게 말도 없이 사라진 주희를 비난하는 반면, 윤재는 그동안 승한이 주희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을 때며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며 변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주희의 전화로 인해 그 윤재마저도 그녀에 대한 정을 뚝 끊어낸 모양이었다. 그 정도로 주희의 행동은 경우가 없는 것이었다.

“잘 했어요. 그 녀석은 욕을 좀 먹어도 싸요.”

승한은 윤재가 욕을 했다는 게 상상이 가질 않았다. 윤재는 욕을 달고 다니는 요즘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언행에 신중했다. 말투도 사근사근하고 성격도 착해서 주희에게 욕을 했다는 게 더욱 더 통쾌했다.

“나도 그래서 그랬지. 알다시피 나 욕 잘 안하잖아.”

윤재도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욕을 잘 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말에 승한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쉽네요. 전화 받았으면 제가 더 시원하게 욕 해줄 자신 있었는데.”

“아마 한 번은 다시 전화가 갈 걸? 나도 그렇지만 아마 미국에서는 널 데려가고 싶어 할 테니까.”

윤재는 주희가 진심으로 자신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연락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미국 측에서 주희가 윤재, 승한과 인연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꾀어내기 위해 주희라는 카드를 이용했을 것이다.

윤재도 마찬가지지만 승한의 이름은 이미 한국과 말레이시아, 그리고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중이었다. 보라색 거미를 잡았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승한은 이번 사건으로 총 네 마리의 보스를 혼자 잡은 경력을 쌓았다.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보스의 수는 총 백 마리 안팎으로 집계되었다. 그 중 네 마리, 그것도 압도적인 힘으로 보스를 제압한 승한은 헌터로서 최고 수준이었다.

보스 뿐만이 아니었다. 승한과 윤재가 말레이시에아에서 세운 업적은 다른 헌터들이 감히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였다. 순식간에 두 마리의 보스를 동시에 상대해 쓰러뜨렸으며, 어마어마한 속도로 말레이시아 내에 나타난 괴물들을 사냥했다. 고작 이틀이라는 시간 동안이었지만 그간 승한과 윤재가 세운 업적은 다른 헌터들의 수십 배에 달했다.

그리고 그런 승한과 윤재를 보며 군침을 흘리는 나라는 꽤나 많았다. 당장 미국뿐만이 아니더라도 여러 나라에서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물론 승한은 이미 한국에서도 충분히 많은 성과를 올려 돈을 벌었고, 다른 나라로 가겠다는 생각을 완전히 접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윤재도 마찬가지였다.

“저희를 포섭하려고 주희를 이용했다? 진짜 별의별 짓을 다 하네요.”

“뭐, 어쩔 수 없겠지. 널 데려가고는 싶고 돈으로 회유하는 건 실패했으니까. 친한 사람이 함께 가자고 하면 덥석 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거 아니겠어?”

승한이나 윤재나 기분이 나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까운 지인을 이용해 자국으로 끌어들이려는 모양새가 썩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냉큼 승한과 윤재에게 뻔뻔하게 연락을 한 주희에게도 다시 한 번 실망하기도 했다.

“뭐, 어차피 주희야 두 번 다시 연락할 일이 없을 테니 신경 끄면 되겠지. 혹시 너도 주희 전화를 받으면 길게 이야기 하지 말고 그냥 통화 끊어버려.”

“저도 시원하게 욕 좀 해 주고요. 아 참, 나르샤님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 나온 거 없죠?”

“오늘 연락이 오긴 했어. 별 다른 문제없는가 하고. 아무 능력이 없으면 몰라도 그쪽에서도 불안하긴 하겠지. 총에 맞고도 끄떡 없는 걸 보면 다른 괴물들과 크게 다를 게 없긴 하잖아?”

“그거야 저나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뭐, 그렇긴 하지. 하지만 사람들이 다 그렇잖아?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신경을 많이 쓰고 말이야.”

승한은 윤재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자신 역시 나르샤가 아니었다면 마족을 집에 들이거나 그냥 살려두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나르샤를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 나르샤를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튼 넌 아마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다.”

“왜요?”

“나르샤님에 대한 문제도 있고, 강동훈 소령이나 안석환이나 널 찾는 사람이 많더라. 아주 인기가 넘쳐 흘러.”

윤재의 말에 승한은 그들이 왜 자신을 찾는 건지 알 수 있었다.

“괴물의 사체 때문이에요?”

“그거 말고 더 있냐? 그렇지 않아도 나도 그 문제로 골이 좀 아파. 정부와 헌터 연맹 사이에 껴서 일이 복잡해졌어.”

“복잡할 게 있나요? 둘 사이에서 알아서 조율을 하면, 저희는 그저 사체에 대한 보상만 따로 챙기면 되는 거잖아요. 사실 지금까지 저희가 잡은 괴물의 사체에 대해 정부가 그냥 가져간 걸 생각해 보면…….”

승한은 말을 잇다 말고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르샤를 바라봤다. 윤재 역시 자신이 말실수를 한 것을 때달았다.

승한이나 윤재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괴물이라며 쉽게 말했지만 나르샤에게 있어서 마족들은 생전에 동료이자 같은 일족이었던 이들이었다. 같은 일족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남아있지 않은 자신과 같은 종족이었다.

그들의 시체를 가지고 돈으로 옆에서 승한과 윤재가 저울질을 하는 게 그녀에게 있어서는 잔인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승한은 나르샤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리를 긁적였다.

“……전 괜찮아요. 편하게 이야기 하세요.”

“그래도…….”

“어차피 악마에게 정신을 잃고 제 마음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이들이었잖아요?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 거예요. 승한씨나 윤재씨, 그리고 인간들을 원망하진 않으니 걱정 마세요.”

말은 그렇게 해도 어두운 표정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목소리도 조금 울적하게 느껴졌다.

승한은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윤재와 따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강동훈 소령이나 안석환이 자신을 보고자 했다고 하니 그들과도 따로 이야기를 하면 될 것이다.

‘나르샤님에게는 미안하지만…….’

승한은 마족들의 사체에 대한 권한을 그냥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헌터인 승한에게 있어서 응당 챙겨야 할 권한이었다. 마족들의 시체를 찢어, 그들의 몸속에 있는 에너지원을 뽑아내는 것이었다.

승한은 일부러 나르샤를 신경써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윤재 역시 눈치가 있어서 승한이 말하는 대로 대화의 방향을 돌렸다.

나르샤는 다시 말 없이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

윤재와 대화를 마친 승한은 나르샤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조금 늦은 점심때에 집에서 나와 윤재와 대화를 끝마치고 카페에서 나오자 해가 거의 지고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저, 따라가도 되는 거예요?”

나르샤의 물음에 승한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족들에게는 제가 잘 말 해 놓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하지만 승한씨 가족들은 저를…….”

“그 때는 제가 자고 있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오해가 있었습니다. 가족들은 제가 깨어나지 않는 게 나르샤님 때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더라고요.”

승한은 자신이 잘 설명하면 가족들도 이해할 것이라 생각했다. 자세한 사정을 말 한다면 승한의 가족들도 그리 야박하게 굴지는 않을 것이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 승한씨 집에서 지내야 하나요?”

나르샤의 물음에 승한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선뜻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르샤 역시 알고 있었다. 마족인 자신이 언제까지나 승한의 집에서 평생 신세를 질 수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승한씨. 저는… 인간이 될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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