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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가치
타닥, 타닥-.
루시퍼의 머리가 성화에 불타는 모습을 보며 승한은 옆에 있던 천족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 천족은 서둘러 루시퍼에게 목덜미를 물린 아게일에게 달려갔다.
“아게일님!”
천족들은 아게일의 상태를 급하게 살폈다.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아게일은 루시퍼에게 목덜미가 물려 반쯤 쓰러져 가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조금의 부상도 없었던 그가, 숨을 헐떡거리며 가슴 통증을 호소했다.
“썩을 자식. 뒤질 거면 곱게 좀 뒤지지…….”
승한은 새까맣게 타 버린 루시퍼의 머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루시퍼의 머리는 웃고 있었다. 죽을 때 남긴 저주와 다시 부활할 것이라는 예언이 신경 쓰여 승한은 이겼음에도 웃을 수 없었다.
그렇게 승한이 오열하는 천족들과 죽어가는 아게일을 바라보던 때였다.
[7.4스테이지를 완료하였습니다.]
[‘능력 - 강신’을 획득하였습니다.]
**
승한이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대낮이었다. 오후 무렵에 막 잠이들었을 때와 비슷한 시간이었다.
승한은 스테이지를 끝내고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눈살을 찌푸리며 이불을 걷었다. 스테이지를 완료하긴 했지만 마지막 순간 오열하는 천족들과 죽어가는 아게일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기분 더럽네.’
다른 때였지만 찝찝하긴 했겠지만 이렇게까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승한은 이미 스테이지 속에서 만난 다른 천족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그들이 얼마나 아게일을 믿고 따르는지 잘 알고 있었고, 그만큼 승한은 아게일의 죽음이 자신의 책임처럼 느껴졌다. 방심하지 않고 자신이 루시퍼를 죽였다면 아게일이 죽을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고 들었던 것이다.
승한은 새로 얻은 능력을 확인했다. 두 번째 능력으로 각성하지 않은 능력은 승한이 가진 다른 능력들에 비해 투자해야 할 타임 포인트가 훨씬 적었다.
[스테이지 7 - 강신]
* 분류 : 엑티브
* 레벨 : 1
* 요구 타임 포인트 : 3600p
* 소모 타임 포인트 : 100000p
승한은 새로 얻은 능력에 대해 생각하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효과를 가진 능력인지는 알겠는데, 그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영혼의 융합이라…….’
강신은 말 그대로 승한의 몸에 신을 받아들이는 능력이었다. 현실에서도 흔히 쓰이는 말로 다른 말로는 접신(接神)이라고도 하는데, 승한은 강신은 그 접신이 보다 고차원적인 능력으로 변한 형태였다.
능력의 형태는 알겠지만 이 능력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승한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롤의 영혼도 불러올 수 있으려나?’
승한이 알고 있는 가장 강한 존재. 그가 바로 영웅 아롤이었다. 신도, 악마도, 천사도 아닌 인간의 몸으로 악마를 쓰러뜨린 존재인 그의 힘을 직접적으로 빌려올 수만 있다면 능력의 효율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소모하는 타임 포인트도 만만치 않은데?’
한 번 능력을 사용하는데 10만이나 되는 타임 포인트를 소모했다. 능력을 사용하는데 타임 포인트를 사용하는 경우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래서는 시험 삼아 능력을 사용해 보지도 못 한다.
그래도 아롤의 힘을 빌려올 수만 있다면 이 정도 타임 포인트를 소모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당장 능력의 레벨을 올릴수록 빌려오는 힘도 점점 많아질 테니 말이다.
“나르샤는 어디로 갔지?”
새로 얻은 능력에 대해 생각하던 승한은 집안에 있던 나르샤를 찾았다. 잠들기 전까지는 자신의 옆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승한은 나르샤를 찾으러 침대에서 일어나며 책상 위에 올려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전원을 켜 보니 화면이 어두웠다. 베터리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이거 왜 이래?”
불길함에 날짜를 확인한 승한은 깜짝 놀랐다.
“모, 목요일?”
혹시 스마트폰이 잘못 되었나 싶어 승한은 벽에 걸려있는 전자시계를 확인했다. 하지만 전자시계도 역시나 승한의 스마트폰과 같은 날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이틀이나 지났다고?’
승한이 잠이 들었던 날이 화요일이었다. 잠깐 잠이 들며 혹시라도 스테이지가 시작된다면 몇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겠지 싶었는데, 하루도 아니고 이틀씩이나 지나고 난 뒤에 일어나게 된 것이다.
분명히 스테이지 속에서는 하루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승한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었는데, 저쪽 세상과 승한의 세계에 시간 차이가 있다고 생각할 뿐 정확한 건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갑작스럽게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간 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르샤!’
승한은 이틀 동안 자신 없이 혼자 있었을 나르샤를 떠올렸다. 그녀가 사라진 건 당연했다. 승한이 잠들어 있는 사이, 승한의 가족들이 집으로 찾아왔을 테니 말이다.
승한은 얼마 남지 않은 베터리로 가족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가장 먼저 전화를 건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
-승한이니? 일어났구나!
승한의 어머니는 무척 반가운 목소리였다. 하긴, 승한이 이틀 동안 잠들어 있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까지 계속 깨어나지 않으면 병원에라도 데리고 갈 생각이었는데. 어디 몸은 좀 어떠니?
“전 괜찮아요. 그보다 엄마, 혹시 붉은색 피부를 가진 여자 못 봤어요? 분명 제 방에 있었을 텐데…….”
-그 괴물 말이니?
승한은 어머니의 대답에 나르샤가 가족들과 만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르샤를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어머니도 마족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괴물이라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는데… 맞아요. 붉은색 피부를 가지고, 머리에 두 개의 뿔을 가진 여자요.”
-봤지. 옷장 안에 숨어서 널 보고 있었는데, 얼마나 깜짝 놀랐던지. 혹시 승한이 네가 쓰러져 있었던 것도 그 괴물 때문이니?
“아니에요. 그래서 그 여자는 어떻게 됐어요?”
-우리가 발견하자마자 창문으로 뛰어내리더니 어디론가 도망가더구나. 급히 신고를 하긴 했지만 아직 발견했다는 연락은 못 받았다.
창문 아래로 뛰어내렸다고?
아무리 승한의 집이 2층이라는 높지 않은 위치에 있다지만 맨 발로 뛰어내리기엔 결코 낮지 않았다. 아무리 마족이라지만 나르샤는 성화 때문에 다른 마족들에 비해 턱없이 몸이 약하지 않았던가?
‘성화가 사라지고 다른 마족들처럼 변한 건가?’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아무리 허약하다지만 나르샤는 엄연히 마족이었다. 본래 마족은 보통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신체 능력을 타고나니, 성화가 없어진 만큼 나르샤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신체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알았어요. 이따 다시 연락드릴게요.”
-몸조심하고,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라. 오늘은 어디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라.
“이제 괜찮아요. 그럼 끊을게요.”
승한은 급하게 어머니와의 전화를 끊었다. 누나인 승아에게도 연락을 해야 했지만 다른 생각보다는 나르샤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승한은 어떻게 해야하나 하는 답답함에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그 때, 윤재가 남긴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보였다.
[나르샤 내가 데리고 있다.]
**
승한은 급히 윤재에게 연락했다. 어디로 사라졌나 싶어서 걱정하던 차에 윤재가 나르샤를 데리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승한은 늘 윤재와 만나던 카페로 가서 먼저 기다렸다. 잠시 카페에 앉아 기다리고 있자 윤재가 모자를 눌러쓴 한 명의 여인과 함께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형, 여기요!”
승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어차피 카페 안에는 사람도 없었는데, 윤재는 주문을 뒤로 미루고 승한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승한은 윤재에게 인사를 하고는 옆에 따라온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르샤는 모자를 조금 올리더니 승한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깨어나셨네요.”
“다행입니다. 잘못 되지 않아서.”
승한은 자신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나르샤가 다른 경찰들이나 도시 내를 순찰하고 있는 군인들에게 걸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이들보다 먼저 윤재에게 발견이 된 모양이었다.
“형, 고마워요.”
“뭐, 고마울 것까지야. 나도 나르샤님을 발견한 건 그냥 운이 좋아서였어. 일부러 찾으러 다녔던 건 아니고.”
“그래도 도움을 주신 게 어디에요?”
다행히도 윤재는 승한과는 달리 스테이지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승한은 나르샤가 가장 먼저 윤재에게 발견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뭐, 도움을 주긴 했는데 나르샤님 능력이 더 컸지. 아마 나 없었어도 지금까지 무사하셨을 걸?”
“무슨 소리에요?”
“싸움 같은 건 모르실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 하시더라고. 군인들에게서 피해가시는 것도 그렇고, 총에 맞아도 무사하신 것도 그렇고.”
“총에 맞아도요?”
승한의 물음에 나르샤가 소매를 걷어 팔뚝을 보였다. 오른쪽 팔에 작은 멍 자국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윤재가 말한 총에 맞은 자리인 모양이었다.
“저도 깜짝 놀랐어요. 살려고 도망치긴 했는데… 지금까지와 다르게 몸이 너무 가벼워서…….”
“성화의 힘이 사라져서 그런 겁니까?”
“그것 밖에는 생각할 수 있는 게 없지 않을까요? 아무튼 덕분에 다른 인간들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으니 다행이에요. 중간에 윤재씨를 만나서 몸을 숨길 장소도 얻을 수 있었고요.”
“너 만큼은 아니어도 내 이름도 꽤 먹히긴 하더라. 너와 내가 보증한다고 하니까 한 발 물러나더라고. 실제로 나르샤님은 공격을 받기만 했지 다른 사람들을 공격한 적이 없었고, 마침 마주쳤던 군 장교도 나르샤가 크게 위험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나봐. 뭐, 이래저래 신경을 쓰는 눈치이긴 하지만 말이야.”
“그게 언제 쯤이었어요?”
“너한테 막 전화를 했을 때쯤. 나르샤님을 발견하자마자 너한테 연락을 했지. 근데 안 받더라고. 대체 무슨 일이냐? 혹시 이번 스테이지 때문이야?”
윤재의 물음에 승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재는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깨어나지 않고 연락이 두절된 헌터들이 꽤 있는 모양이더라고.”
“형은 어떻게 됐어요?”
“나는 좀 다른 경우야. 분명 스테이지 속에서는 며칠씩이나 지난 것 같았는데, 깨어나 보니 한 시간 정도밖에 안 됐더라고. 아무래도 헌터들 간에 스테이지 속 시간차가 꽤 있는 모양이야.”
하긴, 모든 헌터들이 다 똑같은 스테이지를 진행하는 것도 아니고 깨어나는데 시간 차이가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래도 승한은 윤재가 먼저 깨어나서 나르샤를 돌봐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테이지는 어떻게 됐어요?”
“통과했지. 이번엔 진짜 아슬아슬했다. 잘못하면 큰일 날 뻔했어.”
아무래도 윤재도 제법 어려운 스테이지를 겪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통과했다니 새로운 능력을 얻었을 것이다. 승한은 윤재가 스테이지를 통과했다는 사실이 마치 제 일처럼 기뻤다.
“스테이지라는 게 승한씨가 저를 만난 그 세상을 말씀하시는 거죠? 이 세상을 벗어나 또 다른 세상으로 가게 되는…….”
“네, 맞아요.”
“그럼 승한씨도 이번엔 다른 세상에 다녀오셨겠네요?”
“뭐, 그렇죠.”
승한은 나르샤에게 스테이지에 대해 설명했다. 처음 잠에 빠져들어 겪었던 스테이지와 그를 통해 얻게 되는 능력에 대해서도 말이다.
나르샤는 승한이 설명하는 스테이지에 대한 설명을 주의 깊게 들었다. 미션을 통과하면 특별한 능력을 얻는다는 말에 나르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아, 참. 승한아 너 그 연락 받았냐?”
“연락이요?”
“주희 전화 말이야. 부재중 안 찍혀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