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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아롤
승한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만큼 지금 한시가 촉박하다는 뜻이었다.
아게일 역시 안타깝긴 했지만 공과 사는 구분할 줄 알았다. 천족들의 시신을 처리하는 건 나중에 해도 될 일. 지금 당장은 다음 악마의 알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바로 움직인다.”
아게일과 승한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천족들은 별다른 불평을 늘어놓지 않고 지시에 따랐다. 그들 역시 다음 악마가 완전한 상태에서 부활하게 될 경우 생기게 될 일이 짐작이 가는 것이었다.
‘남은 알이 하나가 아니면 어떻게 하지?’
더 이상 남아있는 타임 포인트도 없었다. 여러 상황에서 필요한 능력에 타임 포인트를 투자하려고 남겨 두었는데, 남겨두었던 타임 포인트도 모두 소모했다.
더 이상 승한에게는 밑천이 남아있지 않았다. 듀리안 정도 수준의 악마가 나타난다면 모를까, 듀란달과 성화의 조합에도 쉽게 쓰러지지 않는 악마가 둘, 셋 이상으로 남아있다면 승한도 금방 지쳐 쓰러질 것이다.
승한은 부디 남아있는 악마가 하나뿐이길 바랐다. 붉은 천사가, 혹은 아롤이 말한 ‘그’가 자신에게 어디까지 바라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발 바라는 게 적당한 수준이었으면 할뿐이었다.
“그나저나 다음 알은 어디에 있는 거지? 또 악마의 손에서 그 구슬 같은 거라도 깨야 하는 건가?”
아게일의 물음에 승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전과는 달리 이번엔 승한도 악마의 알에 대한 단서가 남아있지 않았다.
“글쎄요, 저도 그건 잘…….”
[가장 깊은 곳으로 가라.]
승한은 갑작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른 메시지에 잠시 말을 멈췄다. 그것은 이전에 봉인석과 악마의 씨앗에 대해 머릿속에 떠오른 메시지와 흡사한 것이었다.
“…알 것 같습니다. 가장 깊은 곳으로 가면 됩니다.”
“가장 깊은 곳?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롭니다. 이 지붕이 덮어져 있는 장소 중, 저희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숙한 곳에 악마의 알이 있을 겁니다.”
승한은 ‘가장 깊은 곳’이라는 의미를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땅 아래를 뒤덮고 있는 새까만 천장의 가장 깊숙한 곳, 바로 그곳에 악마의 알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승한은 그 정확한 방향을 알 수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승한의 머릿속에 이 모든 정보를 직접 넣어준 것처럼 말이다.
“이쪽입니다.”
“……대체 그런 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알게 되네요.”
“그런가? 천사님의 계시일지도 모르겠군. 부러워.”
아게일은 승한이 말한 ‘그냥 알게 된다’의 의미를 천사가 내려준 계시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이 정답일지도 모르지만 승한은 어딘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졌다.
‘과연 천사일까?’
자안이라는 천족을 이들 사이에 끼워 넣은 건 붉은 천사의 계시가 분명했다. 그것만큼은 승한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테이지 시작부터 스테이지에 관한 내용과 봉인석이나 악마의 씨앗, 그리고 악마의 알에 관한 단서까지. 승한의 머릿속에 직접 정보를 넣어주는 이게 과연 붉은 천사가 행한 일이 맞는지는 의심이 갔다. 봉인석이나 악마의 씨앗과 같은 정보는 스테이지 진행의 일부라고 볼 수 있었는데, 이런 진행에 대한 메시지는 1스테이지부터 지금까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성화는 물론이고, [광휘]조차도 얻지 못했을 때 붉은 천사가 승한을 돕고 있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승한은 자신에게 힘을 주는 존재가 단순히 붉은 천사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올림포스]의 존재들과 아롤, 그리고 아롤이 말한 ’그‘라는 존재.’
아롤은 악마와 대적하는 존재들이 무수히 많다고 말했다. 승한을 돕는 붉은 천사나 [올림포스]의 존재들, 그리고 아롤은 그런 존재들 중 일부에 불과했다.
승한은 자신의 세상에 나타난 헌터들, 그리고 그들에게 능력을 준 존재들이 바로 그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껏 승한의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어질러져 있던 퍼즐들이 조금은 맞춰진다.
승한은 아게일을 재촉해 최대한 행군 속도를 높였다. 메시지에서 말하고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 도달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는데, 천족들의 행군 속도에 맞춰 천천히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게일도 승한에게 말을 들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다음번에 부화할 악마가 점점 더 강해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부상을 입은 천족들을 그 자리에 내버려두고 행군 속도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수가 확 줄었군.”
사상자를 모두 빼놓고 가자 천족의 수는 반 이하로 뚝 줄어들었다. 전혀 아무런 부상을 입지 않은 천족은 아게일과 승한을 포함해 고작 열셋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달리듯이 승한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 많은 마물들과 싸우면서도 조금도 다치지 않은 만큼 남아있는 천족들은 다들 실력이 뛰어난 이들뿐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어진 쉼 없는 전투로 인해 꽤 지쳐있었고, 승한이 움직이는 속도에 조금씩 뒤처지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잠시 쉬었다 갈 수 없겠나?”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도 지쳐가는 천족들이 있지 않나? 이대로는 도착해도 제대로 싸우지도 못할 것이야.”
벌써 네 시간째 제대로 쉬지도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천족들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아게일도 슬슬 지쳐가기 시작했는데, 다른 천족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지치지 않는 건 [귀신]이라는 능력을 이용해 움직이고 있는 승한뿐이었다. 승한도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느라 조금씩 지치긴 하지만 체력적인 문제는 대부분 4레벨의 [불굴의 육체]덕분에 해결이 된 상태였다.
오히려 승한은 이렇게 움직이면서 소모한 힘을 조금씩 채워가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천족들은 힘과는 별개로 체력적인 면에서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안 됩니다.”
“그렇게 시간이 촉박한가?”
“네. 낙오한 천족들은 두고 움직입니다. 아게일님 혼자 남는 한이 있어도, 시간을 더 지체할 수는 없습니다.”
“꼭 그렇게까지…….”
“아게일님은 모르시겠습니까?”
승한이 잠시 고개를 돌려 아게일을 바라봤다.
“지금 저희가 가고 있는 방향에서 어떤 녀석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까?”
“……벌써 악마의 알을 발견한 건가?”
“꽤 멀리 있습니다. 상당히요. 이 속도로 가도 30분은 더 가야 될 겁니다.”
[스테이지 7.3]
달성 조건 : 두 번째 알을 부숴라.
제한시간 : 14 : 47 : 44
남은시간 : 10 : 49 : 11
보상 7.4스테이지로의 이동
승한은 남은시간을 계속해서 확인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시간제한에는 여유가 있었지만, 악마의 알의 기척을 처음 발견하고부터 승한은 마음에 여유를 둘 수가 없었다.
‘엄청난 게 나올지도 모르겠어.’
악마의 알에서 풍기는 마기는 심상치 않았다. 듀리안이 부활했던 악마의 알보다도 훨씬 더 지독한 마기가 풍겨오고 있었다.
거리가 꽤나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그 마기는 이미 승한의 몸을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한 충격을 주고 있었다. 승한은 성화의 힘 덕분인지 다른 천족들보다 마기를 감지하는 능력이 월등했는데, 아게일과 다른 천족들은 승한보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악마의 알에서 풍기는 마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으음…….”
오 분 정도가 지난 후, 아게일이 처음 악마의 알에서 풍기는 마기를 감지하고는 신음성을 흘렸다. 그 역시 악마의 알에서 풍기는 마기가 듀리안이 나타났던 알에서 풍기는 마기보다 훨씬 지독하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여유 부를 게 아니긴 하군.”
“속도를 더 높힙니다.”
“……알았다. 낙오되는 천족들은 어쩔 수 없지.”
아게일은 천족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속도를 높인다! 정 따라올 수 없는 이들은 이 자리에 남도록. 알겠나?”
“아, 알겠습니다!”
아게일은 바로 앞에 있는 승한의 속도에 맞췄다. 승한은 기존보다 훨씬 더 속도를 높였다. 다른 천족들은 온 힘을 다해 뛰어야 겨우 따라붙을 수 있는 정도였다.
신기하게도 낙오하는 천족들은 한 명도 없었다. 다들 지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지만 정신력으로 뒤를 따라붙었다. 물론 이 상태로 제대로 전투를 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승한은 그 정신력만큼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악마의 알을 발견한 승한은 예상외로 악마의 알이 작아서 더 놀랐다. 듀리안을 감싸고 있던 악마의 알은 거의 작은 집채만 한 크기였는데, 두 번째 악마의 알은 그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하악. 하악.”
“도, 도착 한 겁니까?”
천족들은 악마의 알을 발견하자 겨우 다리를 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쓰러지고 싶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건 언제 악마가 부활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게일도 티를 내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조금 지쳐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승한은 그들을 배려할 생각이 없었다.
“바로 베겠습니다.”
“……그러게.”
아게일도 승한이 왜 이렇게까지 급한 건지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 알속에 있는 악마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승한은 물론, 이 자리에 있는 천족들이 상대해야 할 악마는 더욱 강해진 상태로 부활할 것이다.
승한은 다시금 듀란달을 꺼내들었다. 계속해서 달려오긴 했지만 승한은 그렇게 지친 상태가 아니었다. 오히려 체력적으로는 조금 떨어졌을지 몰라도 힘을 더 회복이 된 상태였다. 마음같아서는 체력도 완전하게 회복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더 지나면 어떤 악마가 튀어나올지 두려웠다.
화르르륵-.
듀란달에 성화의 불길이 맺혔다. [증폭]의 힘이 더해져 황금빛으로 물든 성화의 불길은 3레벨 성화의 힘을 모두 끌어낸 것이었다.
승한은 알을 베어내면서 동시에 그 안에 있는 악마까지 함께 베어버릴 작정이었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조금이나마 타격은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3레벨의 성화, 거기에 성검 듀란달이었다. 잘만 하면 알은 물론, 그 안에 있는 악마까지 한꺼번에 베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알 속에 악마가 잠들어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그럼, 베겠습…….”
승한이 막 검을 휘두르려던 그 때였다.
쩍, 쩌저적-.
보라색 악마의 알 표면에 빠르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승한은 어떠한 충격도 가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악마의 알이 부화하려면 10시간 정도가 남아있었다. 승한은 혹시 시간이 잘못 된 게 아닌가 하며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성검 듀란달이 [백검]의 검격과 함께 황금색의 성화를 쏘아냈다.
화아아아악-!
황금색의 성화가 듀란달의 힘을 머금었다. 승한의 검격은 순식간에 악마의 알을 반으로 베어내며 반으로 쪼개었다.
화르르륵-.
악마의 알이 황금색의 성화에 불타기 시작했다. 아무리 악마의 알이라 해도 황금색의 성화에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인지 보라색이었던 알의 껍질이 검게 타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악마는……?”
알 속에서 나타날 악마를 경계하던 아게일은 알 속에서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혹시라도 승한이 알과 함께 그 안에 있던 악마까지 베어낸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골치 아픈 녀석이 나왔군.”
승한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한 쌍의 검은 날개를 펄럭이는 그는, 날개와 대비되는 새하얀 피부를 가지고 승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스테이지 7.4]
달성 조건 : 타락천사 루시퍼를 죽여라. 한 때는 천사였던 그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악마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결국 단죄의 천사에게 죽임을 당하고 악마로서의 삶을 반복하기를 결정한다. 온전한 힘을 갖추지 못한 이 때, 그를 죽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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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