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타임-116화 (116/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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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아롤

승한은 아롤의 눈높이에 맞춰 자리에 앉았다. 잠시 그의 눈치를 보던 승한은 조각 같은 그의 외모를 보고 처음 놀랐다.

꽤나 오래 전의 사람인데다가 나이가 꽤 들었을 텐데도 그는 승한과 비슷한, 어쩌면 그보다도 더 어려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본모습일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왜 그렇게 봐?”

“아, 아닙니다.”1

너무 뚫어지게 봤는지 아롤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신기하게 아롤의 얼굴을 뜯어보던 승한은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이런저런 잡담도 나누고 싶어. 우리 세계의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건 꽤 오래간만이거든. 그런데 시간이 많이 없네.”

“다음에 또 언제 볼 수 있습니까?”

“네가 듀란달을 더욱 완벽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그냥 [성검]의 레벨을 하나 올리면 나를 만날 수 있을 거야.”

아롤은 확실히 지금까지 만난 다른 존재들과는 달랐다.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던 [올림포스]의 존재들과 두루뭉술하고 알듯 말듯하게 이야기를 하는 붉은 천사와는 달리 그는 승한이 처한 상황과 현실에 가장 적절하고 이해하기 쉽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모든 능력의 레벨이 하나씩 오를 때마다 아롤님이나 붉은 천사와 같이 저에게 능력을 준 존재들을 만날 수 있는 겁니까?”

“비슷한데 좀 다르지. 네 능력의 레벨이 하나 오를 때마다 우리는 널 만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는 거고, 거기에 대해 널 만날지 말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어. 사실 붉은 천사는 이번엔 널 만날 생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나 때문에 나타난 거야.”

“그렇군요.”

“뭐, 이런 것보다는 네가 직접적으로 궁금한 건 따로 있겠지?”

“……네. 하지만 대답해 주실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하지만 물어보면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이야기 해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야기 해줄 수는 있어. 그것도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전부 이야기 해줄 수 있을 거고.”

전부가 아니더라도 일부만이라도 궁금한 건 산더미같이 많았다. 나르샤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기에 한계가 있었다.

“그냥… 전부 궁금합니다. 갑자기 저희들에게 생긴 능력이나 시간이 멈출 때 나타나는 괴물들, 그리고 잠을 자면 꾸게 되는 이 또 다른 현실의 스테이지까지. 모든 게 어떻게 된 일인지 혼란스럽습니다.”

“질문의 범위가 너무 광범위한데? 그거에 대해 전부 이야기 해 달라고?”

“최소한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라도 알고 싶습니다. 이 일로 천사들이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도요.”

승한은 무언가 하나를 콕 집어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궁금한 게 너무 산더미같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롤은 승한의 물음에 잠시 고민했다. 아무래도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생각중인 모양이었다.

“거기에 대해서 대답해 줄 수 있는 건 얼마 없을 것 같네. 차라리 다른 걸 물어 봤다면 좋았을 텐데. 내가 뭐 하던 사람인지나, 어떻게 이렇게 강해질 수 있었던 건지나…….”

“그런 건 됐고, 어서 제 물음에나 대답해 주세요.”

단호한 승한의 말에 아롤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궁금하지 않다면 어쩔 수 없지. 나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나 하자고. 자, 그럼 뭐부터 말 해 줄까…….”

“왜 저희에게 힘을 주는 겁니까?”

“그거에 대해서는 대답해 주기 어려워. 다음 질문.”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천사에 이어 [올림포스]의 신들과 같은 존재들, 그리고 아롤님까지… 그냥 천사와 악마들간의 싸움은 아니죠?”

“뭐, 그냥 그 년놈들의 싸움이었으면 우리가 끼어들 일은 아니었겠지.”

아롤은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넌 악마가 뭐하는 놈들이라고 생각하냐?”

“글쎄요……?”

생각해 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악마에 대한 이미지는 결코 좋지 않았지만 그들이 무얼 하는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하나도 없었다.

“하긴, 알 리가 없지. 여기에 대해서는 왜곡된 이야기가 많으니까.”

“어떤 왜곡입니까?”

“악마를 단순한 악마로 생각하는 것부터가 잘못 됐다는 소리지. 그들은 악마라고 하기엔 너무 강하니까. 악마라기보다는 마신(魔神)이라고 생각하는 게 좀 더 정확할 걸?”

“마신?”

신(神)이라는 단어에서 승한은 악마라는 이름보다 훨씬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악마라는 존재가 과연 그 정도로 대단할까 싶기도 했다.

“인간들은 끊이지 않고 전쟁을 반복하지. 싸우고, 죽이고, 빼앗고. 하지만 실제로 이면을 따져보면 인간들은 참 평화로워.”

“평화롭다고요?”

“그래. 그들이 모르는 이면에서는 항상 끊이지 않고 싸움이 반복되고 있으니까. 잠시도 쉬지 않고 말이야.”

“그게 바로… 천사와 악마들입니까?”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 악(惡)은 마(魔)와 함께 악마라는 존재들로 하나가 되었지만, 선(善)은 명(明)과 나누어져 있으니까.”

쉽게 와 닿지 않는 말이었다. 악(惡)과 마(魔)는 하나이지만, 선(善)과 명(明)은 나누어져 있다?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려워 승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여기에 대한 더 깊은 이야기는 아직 하기 어려워. 하나만 확실하게 이야기 해 주자면 악마들과 싸우는 건 천사들만이 아니라는 소리야. 그들과 싸우기엔 천사들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니까.”

“붉은 천사, 수호의 천사, 단죄의 선차, 자애의 천사…….”

“그래. 악마는 많아. 하지만 천사는 넷뿐이지. 그래서 네가 만난 [올림포스]의 그들과, 나와 같은 존재가 필요한 거야. 물론 우리가 전부는 아니지. 악마와 대적하는 존재들은 무수히 많아. 그렇지 않았으면 우리 세상은 물론, 온 세상이 전부 악마들 손에서 춤추고 있겠지.”

“……갑자기 너무 스케일이 커지네요.”

“뭐,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는 말라고. 적어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뿐이니까.”

승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지금껏 천사나 [올림포스]의 존재들 외에 다른 누군가를 생각해 보지 않았던 승한에게 아롤이 처음으로 다른 존재를 언급한 것이다.

“그가 대체 누구입니까?”

“자, 이야기는 여기서 끝. 시간 다 됐다.”

그 순간, 아롤이 두 번 크게 박수를 치며 일어났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던 승한은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럼 건투를 빌어, 고향 친구.”

아롤과 승한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

“대체 뭐가 다를 거라는 거지?”

다시 돌아왔을 때, 승한의 시야에 처음 보여진 건 비웃음을 짓고 있는 듀리안의 모습이었다. 승한은 잠시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아롤의 말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악마라…….’

듀리안 역시 한 때 아포피스와 같은 악마의 반열에 있었던 존재. 어떤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죽임을 당하고 지금에는 다시 부활한 상태지만, 알에서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은데다가 승한의 방해로 인해 제대로 된 힘을 갖추지 못한 탓에 한참 약해져 있는 상태였다.

붉은 천사, 그리고 아롤과의 만남은 승한에게 꽤나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시간이 당장은 없었다. 우선은 듀리안과의 싸움을 마무리하고, 스테이지를 모두 끝낸 후에나 좀 더 생각할 여유가 있을 것이다.

“뭐가 다르냐고?”

까까강-.

승한은 씩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러자 듀리안은 입가에 있던 웃음기를 지우며 눈살을 찌푸렸다.

“포기한 건가?”

“아니.”

스스스스-.

휘이잉-.

그 순간, 승한의 손에서 옅은 빛이 솟아났다. 듀리안은 승한이 또 다시 성화를 일으키는 건가 싶었는데, 성화와는 전혀 다른 기운이 승한의 손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빠르게 형체를 갖췄다. 은색의 손잡이가 생겨나고, 그 위로 새하얀 검신이 나타났다. 색을 제외하면 특별할 게 없는 기다란 장검일 뿐이었는데, 그 검을 바라보는 듀리안은 절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알아보겠냐?”

“……짜증나는 놈과도 연관이 되어있었군.”

듀리안은 승한이 꺼내는 성검 듀란달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사실 승한이 꺼낸 검은 완전한 듀란달이라고 보기 어려웠는데, 그래도 그 검에서 풍기는 기운은 분명 흡사했다.

“아롤과는 무슨 사이냐?”

“그러는 넌?”

승한은 듀리안이 어떻게 아롤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 싶어 물었다. 그러자 듀리안은 대답 없이 입을 다물었다.

“설마… 너 아롤의 손에 죽었냐?”

“닥쳐라.”

“어쩐지, 악마 씩이나 되는 녀석이 왜 뒤져서 알속에 있었나 싶었는데, 천사도 아니고 인간 손에 죽은 거였어? 하하핫.”

승한은 듀리안의 심기를 긁을 생각으로 과장되게 웃었다. 뻔한 도발이었는데, 틀린 말은 아니라서 그런지 듀리안은 얼굴을 잔뜩 구기며 승한을 향해 이를 갈았다.

하지만 이전처럼 바로 달려들거나 하지는 못했다. 바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승한은 듀리안에게 절대 밀리지 않고 있었다. 싸움이 지속되면 듀리안에게 승기가 기울긴 했겠지만 성화와 [올림포스]의 힘을 사용하는 승한은 분명 당장에는 듀리안보다 월등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듀란달을 꺼내들었다. 아롤이라는 영웅을 알고 있는 만큼 듀리안은 듀란달이 가진 힘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단순히 다른 검보다 조금 더 단단하고 날카로운 검에 지나지 않았던 듀란달은 아롤과 평생을 함께하며 악마조차 벨 수 있는 성스러운 검으로 변화했다.

“네놈… 듀란달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냐?”

듀리안은 승한이 갑작스럽게 듀란달을 꺼내들자 승한이 지금껏 힘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당연하게도 지금까지 승한이 듀리안을 상대로 여유를 부리고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듀리안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구기는 일이었다. 아무리 생전의 힘에 비해 하찮은 정도에 불과하다지만 그는 악마였다. 힘은 줄었어도 생전의 기억은 그대로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아롤도 아닌, 고작 천족 나부랭이가 자신을 상대로 여유를 부렸다는 것은 감히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다.

“듀란달만 숨기고 있었을 것 같냐?”

승한은 그런 듀리안의 오해를 굳이 풀어주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대로 둘 생각이었다.

‘이번 능력은 조금 특이하단 말이지.’

[백검]이 10레벨이 되어 각성한 능력, [성검]은 여전히 패시브 능력으로 남아있었다. 그 능력 중 하나는 바로 성검 듀란달을 언제 어디서든 마음대로 꺼내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성검]의 능력은 전부가 아니었다. 만약에 성검 듀란달을 얻고, [백검]의 능력이 사라지는 것이었다면 승한은 조금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분명 성검 듀란달은 훌륭한 무기였지만, [백검]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건 안타까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런 것도 되거든, 이제.”

승한은 그렇게 말하며 듀란달을 높게 들어올렸다. 성검 듀란달이 아롤이 아닌 다른 이의 손에서 처음으로 휘둘러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승한의 손에서 듀란달이 휘둘러진 순간.

서억-.

촤아아악-!

듀리안의 가슴에 거대한 상처가 생겨났다. [백검]과 흡사하면서도 다르게 승한의 검격은 듀리안과의 간극을 좁히며 그를 베어낸 것이다.

“이건…….”

듀리안은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고통스럽다기보다는 익숙한 공격에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 전까지 승한이 휘두른 [백검]의 검격과는 달리, 듀리안은 이번 승한의 공격을 방어해 내지 못한 것이다.

“아, 맞다. 너 아롤에게 죽었다고 했지? 그럼 꽤 익숙하겠네.”

“대체 천족이 어떻게 아롤의 기술을 알고 있는 거지? 네놈들은 아롤과 다른 세상의 존재들인 터인데…….”

“그건 알 거 없고.”

화륵-.

승한은 다시금 듀란달을 높게 들었다. 성검 듀란달의 검신에 성화의 불길이 감돌았다.

“클라이막스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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