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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나르샤
비산동에서 구로구까지 날아가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몇 분 걸리기 않았다. 비행기라도 탄 것처럼 순식간에 날아간 주작은 방금 전 싸웠던 흔적을 쫒아 천천히 움직였다.
“이 근처였던 것 같은데…….”
승한은 주위를 둘러보며 마족들과 싸웠던 자리를 찾았다. 그러던 중, 몇 명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헌터들인가?”
그들은 어느 한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승한은 그들이 움직이고 있는 방향을 눈으로 쫒았다. 그리고 마족들의 시체 사이에 앉아있는 나르샤를 발견했다.
“……형!”
“알았어.”
윤재가 서둘러 주작을 움직였다. 승한은 헌터들이 나르샤를 발견해 그녀를 해칠까봐 노심초사했다.
안타깝게도 승한과 윤재가 도착하는데 걸린 시간보다 헌터들이 나르샤에게 다가간 시간이 한 발 빨랐다. 헌터들은 이미 나르샤를 발견하고 달려가고 있던 상태였고, 주작은 움직이고 있던 방향을 틀어 급하게 막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르샤를 발견한 헌터들이 막 그녀를 공격하려던 때였다.
“멈춰어어-!”
쩌렁쩌렁한 승한의 목소리가 주위를 가득 메웠다.
아니,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승한의 힘이, [올림포스]가 총 세 명으로 이루어진 헌터들의 몸을 짓눌렀다. 힘을 조절했기에 큰 충격은 아니었지만, 움직임을 제한할 정도는 되었다.
쿠구구구-.
거대한 주작이 나르샤와 헌터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승한은 주작의 위에서 내려와 나르샤를 힐끔 바라봤다.
“스, 승한씨?”
나르샤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그나마 가까이 있던 승한과 윤재가 겨우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승한은 나르샤에게서 잠시 시선을 거두고 다른 세 명의 헌터들을 돌아봤다.
“누구십니까?”
“여기는 저희 구역입니다만…….”
세 명의 헌터들은 승한과 윤재를 보고는 경계하는 눈빛을 보냈다. 승한과 윤재의 또래, 혹은 그보다 조금 나이가 되어 보이는 그들은 바로 구로구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헌터들이었다.
그들 입장에서 승한과 윤재의 존재는 타 구역을 난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간이 멈춰 있을 때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괴물들이 정리가 되고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지금, 승한과 윤재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무엇보다 방금 전 승한의 외침과 함께 자신들을 묶어둔 힘.
그 이질적인 힘은 분명 괴물들의 힘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자신들과 같은 헌터가 가진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보나마나 그 힘을 자신들에게 사용한 헌터는 승한이나 윤재, 둘 중 한 명이었다.
“죄송합니다. 해를 끼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설명이 필요하겠는데요.”
“네. 우선 저는 안양 지역에 소속된 헌터, 김승한이라고 합니다. 여기 있는 형은 김윤재라고 하고요.”
“……김승한 헌터?”
세 명의 헌터는 승한과 윤재의 이름을 듣더니 깜짝 놀랐다. 특히 그 중, 승한의 이름에 가장 놀란 눈치였다.
“혹시 안양 지역의 김승한 헌터 맞습니까?”
“네.”
승한의 대답으로 인해 확실해졌다. 승한이라는 이름이 딱히 특이한 이름이 아니라 동명이인이 아닐까 했는데, 안양 지역의 헌터 중 김승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던 것이다.
단번에 승한과 윤재를 바라보는 세 명의 헌터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헌터들 사이에서 승한이 가지는 이름은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다. 특히 서울 지역에서는 안양 지역의 헌터들의 수준이 높다는 게 꽤나 알려져 있었고, 그 중 김승한이라는 헌터의 이름은 독보적이었다.
하지만 경계는 풀렸을지언정, 의문은 남아있었다. 안양 지역을 담당하고 있을 승한과 윤재가 갑자기 서울 구로구에 나타났으니 말이다.
“저는 구로구 담당 헌터 연동현이라고 합니다. 일단 말로만 듣던 김승한씨를 뵙게 되어 반갑네요.”
“네, 반갑습니다.”
“그런데 승한씨가 갑자기 여기에 나타나신 이유, 그리고 저희에게 갑작스럽게 능력을 사용하신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연동현을 비롯한 헌터들은 승한과 윤재가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구로구에 나타났다는 것도 당황스러웠다. 물론 빠른 이동 수단이야 승한과 윤재가 타고 온 주작을 보면 알 수 있다지만, 문제는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부랴부랴 구로구까지 날아온 이유였다.
“저 여인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저 여인이라면… 저기 있는 괴물을 말하는 겁니까?”
“뭐, 괴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맞습니다. 저 여인을 살리기 위해서 여기로 왔습니다. 바로 여러분 같은 헌터들에게 저 여인이 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요.”
승한은 순순히 연동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누가 봐도 보통 사람과는 다른 괴물이라 할 수 있는 나르샤를 구하기 위해 왔다는 승한의 대답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이었다.
“혹시 저 괴물이 보스입니까?”
“……네?”
“조금 다른 괴물들과 다르게 생기긴 했습니다만… 혹시 보스를 잡고 획득할 타임 포인트 때문에 오신 겁니까? 그런 거라면 죄송하지만 양보해 드리기가 어렵겠군요. 여기는 저희들 구역입니다.”
잠시 생각하던 연동현이 내놓은 대답은 바로 나르샤의 존재를 ‘보스’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외뿔 마족들 보스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나르샤와 함께 있던 마족 베이모, 그리고 그런 베이모가 따르는 마족 나르샤가 진짜 보스라고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연동현의 말대로 나르샤를 죽이면 꽤나 많은 타임 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승한은 나르샤를 죽이기보다는 그녀를 살리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이미 그녀를 통해서 성화의 레벨이 오르고, 다음 레벨에 필요한 타임 포인트가 더 늘어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보상을 얻은 셈이었으니 말이다.
“……저는 저기 있는 여인을 살리기 위해 왔습니다.”
“살린다고요? 괴물을요?”
“네. 저기 있는 여인의 이름은 나르샤. 그녀는 저와 스테이지 속에서 안면이 있는 사이입니다.”
“스테이지 속에서?”
승한의 대답에 연동현을 비롯한 헌터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들은 아직까지 스테이지 속의 세상과 괴물들이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아니, 그런 게 없다고 해도 그녀는 이번에 나타난 괴물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 저 괴물을 스테이지 속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까?”
“정말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괴물이라는 말은 조금 자제해 줬으면 좋겠네요. 다 듣고 있으니까요.”
날이 선 승한의 말에 연동현은 승한과 그 뒤쪽에 있는 나르샤를 번갈아서 돌아봤다. 두 개의 뿔을 가진 괴물, 하지만 승한은 그녀를 살리려고 하며, 괴물이라는 말을 부정했다.
잠시 생각하던 연동현은 옆에 있던 두 명의 헌터와 몇 마디를 나눴다. 별달리 이야기를 하는데 충돌은 없는지 조금 이야기를 나누더니 연동현이 대표로 이야기했다.
“알겠습니다. 승한씨를 믿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하지만 만약 지금 승한씨가 하신 말이 거짓일 경우, 헌터 연합과 정부에 정식으로 항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지금 저희는 아직 영상구를 끄지 않은 상태입니다.”
연동현은 왼쪽 가슴에 달아놓은 영상구를 가리키며 경고하듯 말했다. 승한 역시도 지금까지 자신이 기록해 놓은 영상이 있기에 딱히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정식으로 보고를 올릴 생각입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알아서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연동현을 비롯한 헌터들은 그렇게 자리를 떴다. 세 명 모두 각자 이동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제법 빠른 속도로 움직여 금세 시야에서 멀어졌다.
다행히 큰 충돌 없이 세 명의 헌터들이 물러나자 승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나르샤는 승한과 다른 헌터들을 바라보고 있더니 물었다.
“괜찮은 건가요?”
“네, 괜찮습니다.”
“아뇨. 승한씨 말이에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
나르샤가 바보가 아닌 이상 승한과 연동현의 대화에서 승한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것쯤은 눈치 챘을 것이다. 사실 승한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괴물이라고 할 수도 있는 나르샤를 이렇게 옹호하고 보호하는게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있는 일인지 말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도 설마 국내에서는 물론, 세계에서도 이름을 떨치고 있는 헌터인 자신을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문제가 되는 일이라 해도 승한은 자신의 이름값으로 어떻게든 무마가 되리라 여겼다.
“괜찮습니다. 나르샤님은 몰라도 저 여기서는 꽤 알아주는 인간이거든요.”
“그, 그래요? 하긴, 베이모를 쓰러뜨릴 정도의 인간이라면…….”
“네. 아마 제가 보증한다고 하면 나르샤님이 해를 당하실 일은 없을 겁니다.”
승한은 나르샤가 다른 헌터들의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도와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정부와 헌터 연합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내 이름값으로 어떻게든 되려나?’
승한은 아직까지 자신의 이름이 어느 정도 무게를 가지고 있는지 실감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정부나 안석환을 통해 꽤나 많은 헌터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그게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감을 잡지는 못했다.
승한의 이름이 알려진 계기는 승한이 안양시 내에 있는 헌터들 중 가장 수준이 높다는 이유와 거미 괴물들의 출현에서 유일하게 보라색 거미를 사냥한 헌터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남색과 보라색 거미가 출현한 나라 중에서 단신으로 남색 거미를 잡은 사례는 있어도 보라색 거미를 잡은 사례는 승한이 유일했다.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르샤는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언제부턴가 악마를 자신의 부모라 믿고, 그 시기와 비슷하게 남아있던 일족을 비롯한 모든 마족들이 함께 악마들을 자신의 부모라 믿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아포피스의 봉인을 풀겠다는 집념 하나로 살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승한 덕분에 최면에서 깨어나고,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성화의 힘이 사라진 만큼 나르샤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제는 돌아갈 곳도, 돌아갈 동료도 남아있지 않았다.
“일단… 저와 함께 가시죠.”
“승한씨와요?”
“네. 묻고 싶은 게 산더미입니다.”
사실 승한은 나르샤를 비롯한 마족들에 대한 상황보다는 나르샤가 어떻게 해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가 제일 궁금했다.
대체 괴물들이 나타나던 공간의 균열은 무엇인지.
그들을 이곳으로 보낸 존재가 누구인지.
그 모든 것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나르샤였다. 그녀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면, 그동안 괴물들이 균열을 통해 나타나게 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르샤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어차피 그녀는 어디 갈 곳도 없는 몸이었다. 그나마 이곳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승한 한 사람뿐이었다. 더군다나 이곳에는 자신을 괴물이라고 부르며 죽이려는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결국 그녀가 믿을 수 있는 건 승한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르샤는 승한에게로 다가갔다.
“어서 오세요.”
승한은 나르샤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곤 윤재가 타고 있던 주작의 위로 풀쩍 뛰어올랐다. 윤재는 깜짝 놀라 주작의 불에 나르샤가 타지 않게 조절했다.
승한은 주작의 위에 올라가 나르샤를 조심히 내려놓았다. 주작이 막 위로 날아 오르기 시작한 순간, 승한이 그녀를 보며 인사했다.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르샤님.”
============================ 작품 후기 ============================
일요일이라고 해야할지 월요일이라고 해야할지.. 일요일에 쓴 글을 밤 12시에 올리는거라 그런지 일요일 연재라는 느낌이 드네요.
매주 일요일에는 아무래도 조금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늘은 1연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