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타임-90화 (9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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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나르샤

-노량진에 있는 보스가 하나가 아니라는 정보가 있습니다.

그 때, 승한의 머릿속으로 전음구를 통한 안석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뜻밖의 정보에 승한이 급히 전음구를 꺼내 대답했다.

“하나가 아니라니요?”

-하나의 뿔을 가진 괴물이 하나, 그리고 그 옆으로 조금 특이하게 생긴 다른 괴물이 하나 더 있다고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자의 모습에 가깝다는데, 워낙 먼 거리에서 확인한 터라 확실하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여자의 모습?”

-네. 다른 괴물들과 특이하게 구분되어서 보스로 규정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의 뿔을 가진 마족이 하나 이상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

안석환의 보고에 승한은 한 명의 마족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마족들 중 여자라면 한 명밖에는 없었다.

‘나르샤인가?’

설마 했지만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아니, 이미 승한은 노량진에 나타났다는 보스 중 하나가 나르샤일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성화가… 반응하고 있다.’

승한이 가진 힘인 성화는 비슷한 힘끼리 만나면 반응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성화의 힘이 노량진 방향에 가까워지면서 그와 비슷한 힘에 반응하며 날뛰고 있었다.

저 방향에 있는 누군가가 성화를 가지고 있다는 뜻. 그리고 승한이 알기로 자신 외에 또 다른 성화를 가진 존재는 나르샤뿐이었다.

“노량진에 다른 헌터들이 도착한 겁니까?”

-네. 두 명의 헌터가 정찰을 한 모양입니다. 노량진에 있는 마족들은 반수 이상이 남아있고, 보스가 둘이나 있어서 그들끼리는 정리가 힘든 모양입니다.

“그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1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안석환이 다시 대답했다.

-노량진역 안에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보스가 노량진역에서 구로구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구로구 방향으로요?”

구로구 방향이라면 승한과 윤재가 막 움직이고 있는 곳이었다.

‘나르샤도 내 존재를 눈치 챈 건가?’

비슷한 힘에 이끌리는 성화의 특성 상, 나르샤도 승한이 가진 성화의 힘에 이끌려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노량진에 도착하기 전에 마주칠 게 분명했다.

다른 헌터들과 합류해서 싸우는 게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들이 만약 어중간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면 오히려 짐만 될 뿐이었다. 최소한 나르샤의 옆에는 외뿔 마족이 있을 것이고, 그와 함께 다른 마족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윤재나 차재훈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불가능했다.

승한은 자신이 있었다. 외뿔 마족이 하나가 아니라 둘, 셋이 있더라도 당하지 않을 자신이 말이다. 더불어 [올림포스]라는 능력을 손에 넣은 이상, 함께 있는 윤재도 위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순간, 승한의 몸 속에 있는 성화의 힘이 크게 반응했다. 또 하나의 성화가 더욱 가까워진 것이었다.

“……아무래도 곧 만날 것 같습니다.”

-만날 것 같다니요?

“조금 뒤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조금 바쁠 것 같거든요.”

승한은 그 말을 끝으로 전음구를 주머니에 넣었다. 안석환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승한은 대답 대신 검과 방패를 꺼냈다.

“왜 그래?”

“괴물들이 가까이 왔어요.”

“여긴 구로구인데? 노량진까지는 아직…….”

“저희가 찾아가지 않아도, 저쪽에서 저희가 보고 싶나 봐요.”

“그 성화의 힘 때문에?”

윤재 역시 승한과 외뿔 마족이 나누는 대화를 들은 만큼 마족들이 승한을 노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대체 성화의 힘이 무엇인지, 마족들에게 있어서 그 힘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포피스라는 악마를 봉인하고 있는 힘이라는 것만은 대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가 봐요.”

“넌 어떻게 아냐? 괴물들이 여기 오고 있다는 걸. 아직 보이지도 않는데… [불굴의 육체]가 3레벨이 되면 이 거리에서도 알 수 있나?”

“그건 아니고… 그냥 알 수 있어요.”

승한은 나르샤와 성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가 복잡해서 그냥 얼버무렸다. 굳이 비밀로 할 필요는 없지만 일일이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잠시 후, 몇몇 마족들이 승한과 윤재의 눈에 들어왔다. 승한과 윤재가 있던 자리는 이미 다른 헌터들이 마족들을 정리하고 떠난 자리라 마족들의 시체만 가득했는데, 구로구의 위쪽에서 마족들이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 오네.”

윤재가 신기하다는 듯 마족들과 승한을 번갈아봤다. 승한은 윤재의 반응을 가볍게 넘기고 마족들 사이를 살폈다. 아니, 살피지 않아도 또 다른 성화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진짜였네.”

승한은 익숙한 얼굴이 보여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마족들이 주작의 아래로 모여들고 있는 가운데, 한 명의 마족이 두드러지게 보였다. 그것은 단순히 남성 마족들 사이에 있는 유일한 여성 마족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르샤.’

다른 마족들과는 달리 또렷한 초점을 가진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 보통 사람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한 거리였지만 승한의 눈에는 그녀의 모습과 눈이 또렷하게 보였다.

“……형, 조금만 내려가 주실 수 있어요?”

“응? 왜? 여기서 먼저 공격하지 않고.”

“어차피 외뿔 마족이라면 주작을 타고 올라와 있어도 공격받을 수 있어요. 그리고 저 아래에 잠시 볼 일이 있거든요.”

“볼 일?”

마족들밖에 없는 가운데서 볼 일이라니 의아했지만 윤재는 승한의 말대로 주작을 아래로 내렸다. 이상하게도 마족들은 주작이 공격 범위 안으로 들어왔음에도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그것은 나르샤의 옆에 있는 외뿔 마족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은 승한과 윤재를 노려보기만 할 뿐, 별다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명령을 기다리고 있듯이 말이다.

승한은 주작 위에서 훌쩍 뛰어내려 나르샤의 앞에 섰다. 가까이 다가가자 마족들이 나르샤에게 접근하는 승한을 막아섰는데, 나르샤가 한 손을 들어 그런 마족들을 제지했다.

“오랜만… 이네요.”

의외로 먼저 입을 연 쪽은 나르샤였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입을 꾹 다물고, 어떤 말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먼저 대화를 하고자 한다면 다행이었다. 승한도 그녀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오랜만입니까?”

승한이 나르샤와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았던 때가 불과 이틀 전이었다. 오랜만이라고 할 만큼 긴 시간을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나르샤를 바라보던 승한은 그녀는 자신과는 달리 꽤나 오랜 시간을 더 살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표정이나 눈빛, 모든 것들이 불과 이틀 전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리고 역시나, 나르샤의 말을 통해 승한은 자신의 생각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쪽은 그리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은 모양이죠?”

나르샤는 그 붉은색 눈동자를 또렷하게 뜨며 물었다. 이전과 똑같은 색의 눈이었지만, 이전과는 달리 무수히 많은 감정들을 가지고 있었다.

“네. 여기서는 고작 이틀입니다.”

“이틀, 이틀이라…….”

승한과 나르샤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열 걸음 정도만 걸으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는 승한에게 있어서 한 걸음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승한이 나르샤의 목을 베고자 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벨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승한은 나르샤와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건지, 어떻게 해서 이 세상으로 넘어올 수 있었던 것인지.

모든 것들이 숙제이자 문제였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건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르샤밖에는 없었다.

“저희 세상에서는 20년이 흘렀어요.”

“20년……?”

“네. 아무래도 이곳에서 하루가 저희들 세상에서 10년인 모양이네요. 하긴, 어차피 이곳의 시간은 멈춰있으니… 상관없으려나요?”

“많이 달라지셨다 했는데, 그쪽에서는 시간이 많이 지나긴 했군요.”

“아뇨. 제가 달라진 이유는 시간 때문이 아니에요.”

나르샤의 대답에 승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시간이 한 명의 성격과 사고방식을 바꿔놓는데 필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결정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무작정 시간이 흐른다고 한들 성격이 크게 변하거나 은혜를 입었던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필시 그럴 만한 일이 있었을 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당신이 사라지고…….”

나르샤는 입을 열다가 다시 닫았다. 옆에 있는 외뿔 마족의 눈치를 보던 나르샤는 그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다시 말을 이었다.

“십 년이 지난 후, 또 다른 악마가 저희를 찾아왔어요.”

“……또 다른 악마?”

“네. 그리고 그분은, 저희 마족들의 근본이자 신(神)과 같은 존재였어요.”

나르샤의 말에 승한은 그 악마의 등장이 바로 나르샤를 변화시킨 이유임을 알 수 있었다. 아포피스 외에도 분명 악마들은 분명 여럿이 있었고, 그들 중 하나가 바로 마족들을 만들어낸 신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그분은… 성화에 당한 아포피스의 봉인을 풀고 싶어 하셨어요. 하지만 아무리 위대한 분이라 해도, 성화의 불이 가진 절대성은 어찌 할 수 없었죠. 저는 성화의 힘을 피울 수는 있어도 지울 수는 없고 말이죠.”

“잠깐. 나르샤님은 정말로 아포피스의 봉인을 풀고 싶으신 겁니까?”

“네. 아포피스, 그분이야말로 저희 마족들의 근본이자 어미와 같으신 존재. 이대로 저희 버림받은 땅에 모셔두는 건 불경함이 아니겠어요?”

그 순간, 승한의 머릿속으로 아포피스의 말이 떠올랐다.

-악(惡)을 근간으로 하는 악마, 그리고 마족. 성(聖)을 근간으로 하는 천사, 그리고 천족. 이들 사이를 갈라놓는 건 어리석은 짓이지. 그리고 너희 마족들은 바로 이 어미를 봉인시킨 역천(逆天)을 저지르고 있음에, 당장 저 빌어먹을 성화를 꺼뜨리고 나를 해방하라-!

악(惡)을 근간으로 하는 악마와 마족. 그들 사이를 갈라놓는 어리석은 짓. 어찌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악마라는 존재가 정말로 마족들을 만들어 낸 것이라면, 그들을 봉인시킨 악마들이 역천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전부 맞는 말들. 어쩌면 아포피스를 해방시키려던 자르고가 정상이고, 아포피스를 봉인시켜 두려 했던 나르샤가 틀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마족들에게는 악마라는 존재가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니.

하지만 역시 승한은 악마라는 존재에게 어딘가 모를 반감이 느껴졌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그렇겠지만, 승한은 특히 아포피스라는 존재를 만나보면 더더욱 그랬다.

태양신과 싸웠다고 전해지는 대악마 아포피스. 그의 존재는 끝없는 나락과 같았다. 불길한 기운과 그의 분신에게서 느껴지는 더럽고 추악한 느낌은 아직까지도 잊어버릴 수 없었다. 만약 그 때 승한이 성화의 힘을 각성하지 못했다면 싸우다 지치는 게 아니라 먼저 그의 사악함에 물들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승한의 물음에 나르샤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그분은, 그리고 아포피스는 저희를 이끌어 주실 길잡이이자 저희의 부모이십니다.”

그녀의 대답에서 승한은 결론을 내렸다.

나르샤는 더 이상 승한과 같은 길을 걸을 수 없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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