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타임-89화 (89/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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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마족

새하얗게 변했던 눈앞이 다시 색을 찾아갔다. 천천히 찾아가는 색상은 지루할 정도로 느렸다. 눈은 보이지 않아도 정신은 살아있어, 승한은 생각했다.

‘이건…….’

이상한 현상이었는데, 비슷한 현상을 겪었던 적이 있었다. 바로 [광휘]를 10레벨까지 달성하며 성화의 힘을 얻었을 때였다.

그 때, 승한은 갑작스럽게 정신을 잃고 새로운 세상에서 순백의 천사를 만났다. 경외감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천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승한의 눈에 선명하게 남아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강화]를 10레벨까지 올렸을 때는 별다른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수호신]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천사를 만나는 건가?’

흐릿하게 나타난 색은 점차 제 모습을 찾아갔다. 천사가 나타날 줄 알았던 승한의 앞으로는 전혀 다른 형상이 나타났다.

‘산?’

눈앞을 가득 채운 거대한 산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하늘과 땅은 나타나지 않고 여전히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도화지 같은 흰색의 공간이었지만, 승한의 앞으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은 산 하나가 나타나 있었다.

승한은 그 산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누군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었다.

‘올림포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궁전이 있다는 산. 3천 미터에 가까운 높이의 거대한 산은 금방이라도 승한을 깔아 뭉갤 것처럼 압도적인 위엄이 있었다.

그 산의 이름은 곧 승한이 새로 획득한 능력과 같았다. 승한은 [수호신]이 진화한 그 능력이 바로 올림포스라는 산의 이름을 따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대체 이 산은 뭐지?’

천사의 등장도 의아하긴 했지만 올림포스라는 산의 등장은 더욱 의외였다. 대체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곧 완전한 모습을 찾게 된 올림포스는 승한의 앞에 단순히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승한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고,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거대한 산의 위용을 바로 앞에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현상이 다른 헌터들에게도 일어날까 싶었는데, 그런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4스테이지의 능력인 성화를 얻었을 때, 승한은 천사를 만났지만 당장 윤재만 하더라도 4스테이지의 능력인 여우비가 다음 능력으로 변할 때 이런 과정을 겪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을 겪는 건 승한뿐이라는 소리였다. 아니, 어쩌면 더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적어도 승한이 아는 한 4스테이지의 능력을 10레벨까지 도달한 헌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응? 저건…….’

그 때, 승한의 시선이 올림포스 위쪽으로 향했다. 필연인지 우연인지 그것은 때마침 승한의 눈에 들어왔다.

뿌연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던 그것은 거대한 궁전이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궁전처럼 화려하고 웅장한 궁전은 올림포스 위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올림포스 궁전 앞으로 몇 명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제각기 다른 색의 머리를 가진 사람들은 아무런 옷도 입고 있지 않았다. 하나같이 잘생기고 아름다운 남자와 여자들이었는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임에도 추하다거나 하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천사를 보았을 때처럼 경외감이 들 뿐이었다. 승한은 그들을 보고 인간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인간인 자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들이었다.

신일까? 천사일까?

날개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신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또한, 천사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니, 알 수 없었다. 승한의 잣대로는 그들의 정체를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뿌연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새하얀 나신들 속으로 그 정체는 꽁꽁 숨겨져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승한에게로 향했다. 승한은 감당하지 못할 시선에 숨이 막혔다. 하지만 이내 잠시 후, 다시 원래대로 숨이 돌아왔다.

‘날 해치려는 게 아니야.’

승한은 곧 그들의 시선 속에 담겨있는 호의를 읽었다. 아무리 인간 같지 않은 존재들이라지만, 그들의 눈빛은 인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눈빛 속에는 사람들처럼 적대감이나 호의와 같은 여러 감정들이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 승한에게로 향하는 그들의 시선은 호의에 가까웠다. 그들이야말로 성화의 힘을 주었던 천사처럼 승한에게 힘을 주는 존재들이었다.

‘날 지켜 주려는 건가?’

그들의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이 힘을 감당할 수 있는가?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올림포스를 타고 승한의 몸을 짓눌렀다. 말 그대로 목소리가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만큼 거대하고, 압도적인 힘을 가진 음성이었다.

승한은 감히 대답할 수 없었다. 힘을 감당한다? 아직까지는 그 의미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힘을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승한의 머릿속에 문득 천사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 때, 천사도 비슷한 질문을 하긴 했었다.

‘성화를 가지고 무엇을 할 거냐고 물었었나?’

천사는 성화라는 힘을 가지게 될 승한에게 그 힘을 사용할 방향에 대해 물어봤다. 그 때에도 승한은 그 힘을 가지고 명확히 무엇을 해야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언제나처럼 승한은 그 힘을 가지고 괴물들과 싸울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올림포스라는 능력을 가지고도 마찬가지였다. 그 힘을 준 존재가 누구이던 간에, 그 힘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감당이라…….’

승한은 당연하게 생각했다.

‘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 해야만 하겠지.’

그리고 그런 승한의 생각은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또렷이 전해졌다.

-썩 괜찮은 마음가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승한은 [올림포스]라는 능력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거대한 산 속에서 들리던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알아차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궁전에 있는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올림포스라는 거대한 산의 것이었다.

**

승한은 멍한 기분으로 정신을 차렸다. 윤재의 뒤쪽에 앉아 주작을 타고 이동하던 중이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잠시 동안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승한아, 괜찮아?”

완전히 정신을 차리니 윤재가 자신의 어깨를 흔들었다. 정신을 차린 승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갑자기 왜 그러냐? 너, 방금 잠깐 눈이 풀렸었어.”

“잠깐이요?”

승한은 ‘잠깐’이라는 윤재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체감상으로는 적어도 몇십 분 정도는 올림포스의 앞에 갔다 온 것 같은데, 윤재는 그 시간을 잠깐이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제가 얼마나 그랬어요?”

“응? 나야 모르지. 잠깐 뒤를 돌아봤는데 네가 이상해서… 잠깐 멍 때렸냐? 피곤해?”

“아뇨, 피곤하지는…….”

아무래도 승한이 정신을 잃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은 모양이었다. 승한은 거대한 산, 올림포스와 그 산에 있는 거대한 궁전, 그리고 그 궁전에 있는 존재들을 떠올렸다.

‘단순한 꿈은 아니야.’

천사의 등장만 하더라도 승한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성화라는 힘을 얻었을 때, 그 힘을 건네주었던 존재를 직접 대면했던 것이었으니 말이다.

아마도 그녀는 정말로 승한에게 힘을 건네준 존재일 것이다. 승한은 그녀가 아포피스를 봉인했다던 천사이자, 어쩌면 헌터들에게 힘을 부여한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올림포스]라는 능력을 각성하게 되면서 보게 된 거대한 산과 여러 존재들은 승한의 그 생각을 말끔하게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성화의 힘을 주었던 천사와 견주어도 결코 부족하지 않은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신(神)이었을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궁전이 있다는 산, 올림포스. 그곳에 있는 궁전이라면 신들의 궁전 외에는 생각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그런 곳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그리스 신화의 열두 신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긴, 그들은 신이라고 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 무엇도 함부로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스 신화가 사실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신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승한은 복잡하게 생각하기보다는 그들이 자신에게 준 힘을 직시했다.

‘힘을 감당할 수 있겠냐고?’

[올림포스]라는 힘은 수호의 힘이었다. 그 힘은 승한을 비롯해 승한이 지키고자 하는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이었다.

마치 거대한 산이 앞에서 막아선 것처럼, 이 힘만 잘 이용하면 방어뿐만 아니라 상대의 움직임 자체를 막아버릴 수도 있었다. 상대의 몸을 산과 같은 무게로 짓누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힘의 활용 범위는 무한하다. 방어력도 [수호신]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올림포스]의 힘을 몸에 두르고 있다면, 외뿔 거인의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낸다 하더라도 생채기 하나 입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다른 사람들도 지킬 수 있는 힘이라는 거지.’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지금껏 승한은 자기 스스로가 강하긴 했지만 다른 누군가를 보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단순히 무식하게 괴물들을 죽임으로서 함께 있는 헌터인 윤재를 비롯한 사람들을 지킬 수 있었지만, 직접적인 보호하기보다는 최선의 공격은 방어라는 격언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이제 승한에게는 자기 한 몸을 넘어 타인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났다. 그것도 말 그대로 ‘절대적인’ 보호가 말이다.

“뭐가 좋아서 그렇게 실실 웃어?”

“새로 얻은 능력이 꽤 좋아서요.”

“새로 얻은 능력이? 뭐가 또 변했어?”

“[수호신]을 10레벨까지 올렸거든요. 그런데 이거 꽤 좋네요. 아니, 어쩌면 성화보다 더 좋은 능력일지도 모르겠어요.”

“……성화보다? 그럼 진짜 사기인가 본데. 그나저나 벌써 5스테이지 능력이 10레벨이야? 그거 9레벨에서 10레벨로 올리는데 20만 타임 포인트는 들지 않아?”

[강인함]을 10레벨까지 올리는 것과 [수호신]을 10레벨까지 올리는 것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당장 윤재만 하더라도 주로 사용하는 능력인 [여우비]에 꽤나 많은 타임 포인트를 사용했으면서도 바로 방금 전에 10레벨을 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승한은 [불굴의 육체]를 벌써 3레벨까지 올린 것뿐만이 아니라 6스테이지의 능력을 제외한 모든 능력을 10레벨까지 달성했다. 특히나 5스테이지의 능력인 [수호신]은 10레벨까지 달성하는데 필요한 타임 포인트가 다른 능력들보다 훨씬 더 많았다.

“부자네, 아주. 있는 놈들이 더 한다고…….”

“하하, 형도 주작을 10레벨까지 올려 보세요. 어떤 능력이 될지 기대되는데요?”

“쩝. 그렇지 않아도 지금 8레벨까지는 올렸어. 나도 사실 기대가 되긴 해.”

1레벨일 때와는 달리, 주작은 점차 공격적인 능력에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승한은 윤재가 사용하는 주작의 능력이 10레벨을 달성하는 순간, 어떤 능력으로 변할지 꽤나 기대가 되었다.

‘[백검]은 어떤 능력으로 변하게 될까?’

4스테이지의 능력과 5스테이지의 능력이 10레벨을 달성하며 특이한 현상을 일으켰다. 천사에 이어, 거대한 올림포스 산과 신과 같은 존재들을 만났으니, 6스테이지 능력인 [백검]도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어쩌면 그 때 가면 이 능력을 얻게 된 배경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한은 이 스테이지라는 과정과 괴물들의 등장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계속해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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