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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여섯번째 꿈
승한은 곧장 안석환에게 연락을 넣어 방금 전 스테이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미 안석환은 다른 헌터에게 연락을 받은 바가 있는지 듣고 무덤덤했는데, 그는 그렇지 않아도 다른 헌터들에게 연락을 돌리는 중이었다.
이른 저녁이 되자, 누나인 승아와 어머니가 비슷한 시간에 들어왔다. 평소보다 조금 빠른 퇴근 시간이었는데, 아무래도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보니 늦게까지 일하기가 그랬던 모양이었다.
“승한이니? 일찍 왔구나.”
승한의 어머니는 승한에게 맛있는 걸 먹여야 한다고 장을 한 가득 사 왔다. 승한이 괴물들과 싸우면서 고생하는 걸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그 누구보다 안타까워하고, 자랑스러워 하는 어머니였다.
사실 어머니는 승한에게 싸우지 말라고 말렸었다. 하지만 승한은 헌터 일을 그만 둘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자신이 아니라면 누군가는 위험해 질 것이고, 괴물들을 사냥해서 더 강해지지 못한다면 오히려 나중에는 더 위험해 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와 승아는 승한을 위해 한참 동안 음식을 만들었다. 승아가 요리를 잘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간만에 동생인 승한에게 자기도 요리를 하나 해 주겠다고 나섰다. 승한도 돕겠다고 했지만 결국 두 사람의 만류로 방에서 기다려야했다.
한 시간쯤 요리하는 소리가 들리고, 저녁상이 완성되었다. 8시라는 조금 늦은 시간에 만들어진 상이었는데, 거실로 나가보니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이걸 다 한 거예요?”
“너 새우 좋아하잖아? 그래서 솜씨 좀 발휘해 봤지.”
승한이 좋아하는 새우 버터구이에 새우 소금구이, 매운탕, 꼬막 무침, 도토리 묵 등등.
승한이 평소 좋아하는 음식들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비교적 만들기가 쉬운 새우 요리는 누나인 승아가 한 모양이었다.
바로 어제 김현수 중령에게 비싼 코스 요리를 얻어먹었지만 그보다 훨씬 먹음직해 보이는 한 상이었다. 승한은 입안에 군침이 돌아 얼른 자리에 앉았다.
가족들과 함께, 분위기 좋은 식당보다는 집에서 어머니가 차려준 음식들을 먹는 것. 밖에서 비싼 돈을 사고 먹는 비싼 요리들과는 결코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다. 승아가 입 안으로 음식들을 먹으며 승한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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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좋게 저녁을 먹고 난 뒤, 승한은 다시 이른 시간에 잠에 들었다. 당장 하루 뒤인 수요일 점심에 강동훈 소령을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는데, 달리 할 일이 없어 일단 쉬는데 집중했다. 근래 들어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데, 피로가 갑작스럽게 몰려드는 모양이었다.
승한은 잠자리에 들고 얼마 되지 않아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스테이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그저 단잠에 빠져들었다.
10시라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잠이든 승한이었다. 꿈도 꾸지 않고 단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그렇게 승한이 잠이 든 상태로 시간이 흘러갔다.
그리고 12시가 넘은 순간.
‘여긴……?’
승한의 눈이 번쩍 떠졌다. 잠결에 녹아들었던 정신이 살아났다. 하지만 그의 눈은 현실이 아닌, 전혀 다른 세상과 한 명의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봐요. 갑자기 왜 그래요?”
승한의 멍한 표정에 여인이 물었다. 승한은 눈을 깜박이며 여인의 눈을 응시했다. 분명 낮잠을 잘 때 보았던 여인이었다.
‘스테이지가 다시 시작된 건가?’
잠에 한 번 빠져들 때마다 다음 스테이지가 시작되는 걸까? 하루마다 한 번씩의 스테이지가 진행되는 거라면 화요일 새벽에 잠이 들었을 때에 첫 번째 스테이지가 시작되었어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스테이지 6.2]
달성 조건 : 마족 여인 나르샤를 도시까지 안전하게 호위하라.
제한시간 : 10시간
남은시간 : 10시간
보상 : 6.3스테이지로의 이동
‘역시.’
다시 잠이 들자, 다음 스테이지가 시작되었다. 순간 실패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나르샤가 이름인가? 그런데 마족?’
승한의 눈에는 눈앞에 있는 여인의 이름보다는 ‘마족’이라는 단어가 더 깊게 들어왔다. 대충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마하니 뿔을 가졌다고 해도 마족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마족이면… 악마 같은 건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족이라는 이름보다는 악마라는 생각에 눈앞에 있는 가냘파 보이는 여인이 무섭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금 그녀의 눈을 보니, 분명 그녀는 승한을 경계하고 조금은 무서워 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그러시는 거죠?”
승한의 마음을 읽은 마족 여인, 나르샤가 물었다. 그녀는 승한의 생각은 아니더라도 마음이나 감정을 읽을 수 있었고, 승한이 느끼는 두려움도 읽어낼 수 있었다.
승한은 그 점을 떠올리고는 다시 가슴을 진정시켰다. 새로운 스테이지가 시작되고 나서 승한은 계속해서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스테이지의 내용을 확인하고, 그녀의 이름과 정체를 알아낸 뒤 마족이라는 사실에 경악했던 것이다.
‘어차피 이건 현실이 아니야. 무서울 것 없어.’
무엇보다 딱 봐도 마족이라고는 하나 눈앞에 있는 이들은 승한보다 약했다. 당장 승한이 뒤쪽에 있는 뱀 괴물들을 쓸어버린 것을 보고 경계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죠?”
“제 말 못 들으셨나요? 뭘 기다리고 계셨던 건지 물었어요.”
나르샤의 물음에 승한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고민했다. 남은 시간이 모두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데, 사실 어떻게 보면 나르샤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승한은 나르샤의 이름을 알 뿐,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5스테이지처럼 곽영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라서 더욱 상황이 복잡했다.
‘가만. 이번에도 호위 임무였지?’
분명 6.2스테이지의 내용은 나르샤를 안전하게 호위하는 것이었다. 제한시간과 남은시간이 동시에 있는 것을 보면 어딘가로 시간이 다 지나기 전에 가야 하는 것 같았다.
“나르샤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 저를요?”
“네. 호위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승한의 물음에 나르샤의 눈이 흔들렸다. 승한이 생각하고 있는 악마에 가까운 종족인 마족이라고는 하나, 붉은색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눈동자가 흔들리는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굳이 스테이지의 내용이 아니더라도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저를… 어떻게 알고 계시는 거죠?”
“그건 말씀 드리기가 어렵네요.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나르샤님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서 나르샤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승한의 말에 대한 대답은 나르샤가 아닌, 그 뒤쪽에 있는 다른 두 명의 마족 남성들에게서 나타났다.
“인간 놈이!”
“나르샤님, 수상한 녀석입니다. 물러서십시오.”
두 마족 남성은 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힘줄이 두드러지는 팔뚝과 날카롭게 벼려진 기다란 손톱을 드러냈다. 그들의 언어는 여전히 승한에게는 생소한 것이었지만, 승한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먼저 무기라고 할 수 있는 손톱을 꺼내들자, 승한 역시 마찬가지로 방패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먼저 공격은 취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검은 들지 않았다.
“잠깐! 오해입니다.”
“그만들 두세요.”
승한의 외침과 나르샤의 말에 두 명의 마족 남성이 나르샤의 눈치를 살폈다. 두 명의 마족 남성은 승한을 향해 손톱을 내려놓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저 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하, 하지만 나르샤님…….”
“저를 믿지 못하나요?”
나르샤의 말에 두 명의 마족 남성은 입을 다물었다. 보아하니 나르샤에 대한 충성도나 믿음이 대단한 듯했다.
‘말을 하길 잘 했군.’
별달리 정황을 지어낼 게 없었던 승한은 그냥 있는 그대로를 말하기로 결정했다. 지구에 관한 것이나 능력에 대한 것은 말할 수 없지만 승한은 나르샤가 가지고 있는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믿었다.
‘적어도 내가 한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을 테니까.’
나르샤를 기다리고, 나르샤를 지키고자 한다는 승한의 말은 진심이었다. 물론 그 동기가 자발적이라기보다는 스테이지 통과를 위함이라는 목적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 말은 거짓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르샤는 그런 승한의 속마음을 알아차렸다. 적어도 자신을 해치지 않겠다는, 오히려 지켜주겠다는 마음을 읽은 것이다.
“저를 지키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나르샤는 겁 없이 승한을 향해 다가왔다. 아무래도 승한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모양이었다.
승한은 그녀의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 눈을 피했다.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라, 그녀의 눈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맞습니다.”
“왜죠? 사실 이곳에 인간인 당신이 있다는 것부터 이상해요. 그런데 저를 알고, 저를 지키고자 한다라… 당신이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아무리 봐도 수상해요.”
“자세한 건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그보다…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승한의 말에 나르샤가 흠칫 놀랐다. 아무래도 승한의 말이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지금도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어.’
승한은 나르샤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조금씩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고, 남은 시간은 계속해서 깎여나갔다. 호위하라는 미션에 시간제한이 있는 걸 보면 무언가에 쫒기고 있거나, 그 시간 안에 어디론가 도착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 아무튼 저희를 도와 주시겠다는 거죠?”
“나르샤님!”
뒤쪽에 있는 두 명의 마족은 반발했지만 승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요. 어디까지 알고 계시는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믿겠어요. 적어도 당신이 하는 말은 진심이니가요. 실력이야… 저것들을 전부 쓰러뜨린 게 당신이라면 의심할 필요가 없을 테고요.”
승한의 합류를 허락한 그녀는 승한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갈 길이 먼 듯, 걸음걸이가 꽤나 다급했다.
“어서 가요. 자칼, 가렝. 그들이 언제 따라올지 몰라요.”
“알겠습니다.”
두 마족 남성의 이름은 자칼과 가렝인 듯했다. 서로 비슷하게 생기고 느낌도 비슷한 이름이었는데, 아무래도 형제가 아닌가 싶었다.
‘그들이라고?’
승한은 나르샤의 말 뜻에서 괴물이 아닌 누군가로부터 쫒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승한이 쓰러뜨린 뱀들과 같은 괴물에게 쫒기고 있다면 ‘그들’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물어볼 수 없었다. 승한은 최대한 나르샤와 나르샤에 대한 일들을 아는 척 하며, 그녀가 죽지 않고 무사히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을 아껴야겠지.’
승한은 말 없이 나르샤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검을 허리춤에 걸고, 방패는 등에 메었다.
툭-.
그 때, 조금 과한 힘으로 승한의 어깨를 마족 남성이 밀었다. 자칼과 가렝 중 자칼이었는데, 그는 승한을 죽일 듯 노려봤다.
“걸리적 거리면 바로 죽여버리겠다.
“……글세, 누가 걸러직 거릴지 모르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