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4 / 0223 ----------------------------------------------
9. 붉은 거미
‘남색? 흰색이 아니었나?’
안석환의 보고에 따르면 보스는 흰색이었다. 승한이 생각하기에도 저만한 덩치의 거미라면 다른 색의 거미들을 다 제치고서라도 보스라고 생각할 만했다.
하지만 안석환이 알려준 보스와 승한이 발견한 보스와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온 몸에 두드러기처럼 나 있는 수많은 작은 눈들도 그렇고, 덩치도 그렇고, 모든 게 흡사했다. 흰색이 아닌 남색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사각-.
거대 거미는 입 안에 물고 있던 노란 거미를 꿀꺽 집어삼켰다. 입 안에서 꿈틀거리던 노란 거미는 아무런 저항 없이 거대 거미의 입 속으로 사라졌다.
그 때, 초록 거미 하나가 거대 거미에게로 다가갔다. 녀석은 느릿하게 다가갔는데, 거대 거미는 녀석을 두 개의 손으로 잡아서 다시금 입 안으로 가져갔다.
사각-.
그리고 다시 먹는다.
입 안으로 밀어 넣는 거대 거미의 입은 느릿했다. 녀석의 몸에 있는 수많은 눈들은 마치 승한을 감상하는 것처럼 보였다.
승한의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온 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거미들이 나타나고, [수호신]을 얻고부터 거미들에게서 어떠한 두려움도 느끼지 못했던 승한은 처음으로 괴물들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분을 되새길 수 있었다.
‘끔찍하군.’
거미들은 거대 거미를 향해 자기 스스로를 바쳤다. 녀석이 언제든 배가 고프거나, 힘을 원할 때면 녀석의 입에 씹어 먹히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은 숭고한 희생이라기보다는 우두머리에게 잡아먹히는 먹이사슬의 아래층의 운명이었다.
승한은 녀석이 거미를 먹는 모습을 보고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저 녀석도 다른 거미들을 잡아먹는 건가?’
거미들은 다른 거미들을 잡아먹는다. 검은 거미부터 시작해 빨강과 주황, 노랑, 색이 보라색에 가까울수록 점점 더 강해지고 더 아래의 거미들을 잡아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보스도 마찬가지. 애초에 보스인 거대 거미는 검은 거미와는 달리 흰색이었다. 진정한 의미로 색이 없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그런 녀석이 다른 거미들을 씹어 먹으며 점차 보라색에 가까워졌다. 지금까지 호계동으로 모여든 거미들의 수가 수백이었는데, 이 자리에 보이는 거미들은 그 반의반도 되지 못했다.
아무래도 녀석이 다 먹어 치운 모양이었다. 거미들은 애초에 거대 거미의 먹잇감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색 거미… 보스가 하나, 파란 거미가 하나. 그리고 초록 거미가 하나.’
초록과 파랑, 남색 거미가 각각 하나씩이었다. 그 중 남색 거미인 거대 거미는 풍기는 분위기가 한층 달랐는데, 승한은 녀석을 가장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 가능할까?’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에 절로 긴장이 되었다. 파란 거미가 나타났을 때만 하더라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회의감이 들었다. 거대 거미라도 없다면 모를까, 아무리 생각해도 저 많은 거미들을 혼자서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따가가가가각-.
그 때, 거미들이 일제히 승한을 향해 덮쳐왔다. 아파트 벽에 붙어 있던 거미들은 벽면을 빠르게 밟으며 움직였다.
그 순간, 승한은 이제 도망칠 수도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몸을 돌려 도망친다면 그건 더 좋지 못한 상황을 가져올 뿐이었다. 무엇보다…….
‘이 근처가 호계체육관이란 말이지.’
저런 위험한 녀석들을 가족들이 대피해 있는 장소 근처에 두고 싶지 않았다. 다시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면 녀석들은 분명 사람들이 모여 있는 호계체육관으로 달려들 것이다.
승한의 머릿속에 누나인 승아와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리고 호계도서관에서 거미들에게 먹혀 시체조차 온전히 남지 않은 이주호와 차상민이 떠올랐다.
그 모습들이 겹쳐졌다. 가족들이 거미들에게 씹어 먹혀 살덩이가 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리고 그것은 승한이 이 자리에서 도망치면 필연적으로 생기게 될 일이었다.
‘그렇게 둘 순 없지.’
결국 승한은 몸을 돌리지 못하고 검과 방패를 들었다. 그리곤 [수호신]을 비롯한 모든 힘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휘이이이이-.
사아아아-.
승한의 온 몸이 [광휘]의 빛으로 둘러싸였다. 미미한 빛에서 그쳤던 이전과는 달리, 한데 정제되고 뚜렷해진 빛은 거미들에게 더욱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3200타임 포인트를 소모하였습니다.]
[‘능력 - 수호신’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승한은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타임 포인트를 이용해 [수호신]의 레벨을 올렸다. 다른 능력은 6400타임 포인트, 12800타임 포인트를 요구로 하는데 비해, [수호신]은 레벨이 낮아서 요구 타임 포인트가 낮았다.
지금까지는 3레벨의 [수호신]만으로도 충분했다. [수호신]의 방어력은 거미들의 이빨은 물론, 독성까지도 모두 막아주었다. 승한의 힘이 다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로 ‘절대적인’ 방패였다.
하지만 그 힘이 과연 눈앞에 있는 거대 거미에게까지 통할까? 승한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당장 초록 거미나 파란 거미에게만 해도 [수호신]의 힘이 완벽하게 통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아무리 레벨이 하나 올랐다고 해도 말이다.
‘신중하게.’
승한은 이번 전투를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끌어갈 생각이었다. 지금까지는 웬만한 공격은 다 맞아주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초록 거미와 파란 거미, 그리고 남색의 거대 거미.
이 세 마리의 거미는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승한은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노란 거미를 향해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쉬이이익-!
촤아악-.
승한의 돌진에 노란 거미는 온 몸에서 가시를 둘렀다. 고슴도치처럼 날카로운 가시를 온 몸에 두르고 달려오는 노란 거미의 모습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승한은 멈추지 않았다. 방패를 살짝 앞으로 들고, 정면에서 달려오는 노란 거미의 머리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강화]의 빛이 노란 거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노란 거미의 몸뚱이가 반으로 갈라졌다.
서걱-.
피잇-.
승한의 허리에 작은 생채기가 생겨났다. 정면으로 노란 거미를 베어내면서 가시에 베인 것이다.
원래라면 가죽이 벗겨지고 내장이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9레벨의 [강인함]과 4레벨의 [수호신]은 승한의 상처를 이 정도에서 그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승한에게 있어서 이 정도의 작은 생채기는 전투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타닥-.
승한의 몸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주황 거미의 독은 4레벨로 오른 [수호신]의 방어력을 뚫지 못했다. 승한이 신경 써야 하는 건 노란색 이상의 거미들이었다.
그렇게 승한이 노란 거미와 주황 거미를 포함한 몇 마리의 거미들을 베었을 때였다.
촤아악-.
파란 거미가 승한의 앞에 나타났다. 녀석은 깜짝 놀랄 만큼 기다랗게 다리를 뻗어왔다. 덩치도 다른 거미들보다 족히 두 배는 컸는데, 다리의 두께 역시 만만치 않게 두꺼웠다.
승한은 급히 검을 들어 파란 거미의 다리를 막았다. 검날을 세워 [강화]를 입힌 터라 그대로 거미의 다리가 베어져 나갈 것이라 생각했다.
까앙-!
헌데, 파란 거미의 다리에서는 의외로 쇳소리가 났다.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닌, 마치 강철 같았다.
파란 거미의 다리에는 깊은 흠이 파여 있었다. 아무래도 승한의 검을 두드리면서 입은 상처인 듯했다. 아무리 단단하다고 해도 아무런 피해가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작정하고 달려든다면 파란 거미를 처리할 자신도 생겼다. 물론 파란 거미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할만 했다.
문제는 승한이 상대할 거미가 파란 거미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쿵쿵쿵-.
‘온다!’
승한은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거대 거미를 보며 숨을 죽였다. 녀석은 바닥에 있는 거미들을 발로 짓밟으면서 다가왔다. 거미들은 거대 거미가 움직이자 사방으로 퍼졌는데, 그럼에도 밟히는 녀석들은 몇몇 있었다.
승한은 가까이 다가온 거대 거미를 올려다보았다. 거미는 거대한 앞발을 들어 승한을 향해 짓누르듯 발을 뻗었다.
쿠웅-!
승한이 빠르게 옆으로 몸을 날려 거대 거미의 발을 피해냈다. 하지만 거미의 발은 하나가 아니었고, 눈은 온 몸에 달려있었다. 무엇보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거대 거미의 움직임은 너무 빨랐다.
쿵, 쿠쿠쿵-.
승한을 노리고 거대 거미의 발이 계속해서 움직였다. 옴 몸에 있는 눈동자는 흉물스럽게 깜박이며 승한을 주시했다. 승한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거미의 발을 피하더니 어느 순간 도약해 거미의 발을 밟고 배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푸욱-.
거대한 덩치의 배 아래로 승한의 검이 박혔다. 생각보다 거대 거미는 그렇게 단단하지 않았다. 방금 전, 파란색 거미의 방어력을 생각해서 힘껏 내지른 검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느낌이 싸해졌다. 너무 쉽게 검이 먹히다 보니 오히려 불안감만 더해졌다. 그리고 그 불안감의 정체는 금세 눈앞으로 나타났다.
꾸르륵-.
촤좌좍-.
승한의 검을 타고 거대 거미의 살점이 올라왔다. 마치 흐르는 액체처럼 움직이는 거대 거미의 살점에 승한이 깜짝 놀라 검을 휘둘렀다.
사악-!
거대 거미의 살점이 승한의 검에서 떨어져 나갔다. 동시에 거대 거미의 배에 큰 검상이 생겨났다.
승한의 몸이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거대 거미의 눈은 여전히 승한을 노려보고 있었고, 다시금 다리가 움직였다. 공중에 떠 있던 승한은 다리를 피하지 못하고 급하게 방패를 들었다.
꽈앙-!
방패 위를 두드린 거대 거미의 공격에 승한의 몸이 멀리 날아갔다. 방패로 막아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수호신]이 몸을 지켜 주고 있다고 해도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쿠웅-.
바닥에 떨어진 승한을 향해 거미들을 덮쳐왔다. 승한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검을 휘둘렀다. 노란색 이하의 거미들은 승한의 검에 낙엽처럼 베어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승한은 다른 거미들은 보지 않고 거대 거미를 노려봤다. 그 중 승한의 눈에 방금 전 자신이 남긴 거대 거미의 상처가 들어왔다.
‘회복되고 있어?’
승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공격이 너무 쉽게 먹힌다 했더니, 방금 전 승한이 남긴 상처가 꾸물거리며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방어력보다는 회복능력이 훨씬 뛰어난 녀석인 모양이었다.
‘더 골치 아프군.’
오히려 그런 타입이 훨씬 골치가 아팠다. 방어력이 뛰어나다면 오히려 상대하기가 편할 것이다. 승한은 [강화]를 검에 집중하면 아무리 단단하더라도 거미 정도는 충분히 베어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베어내도 다시 회복하는 녀석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검으로 베어낼 수 있는 면적에는 한계가 있고, 다시 회복한다면 한 번에 죽이지 않는 이상 소용이 없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승한은 결국 거대 거미의 머리 외에는 다른 곳을 노릴 수 없게 되었다.
‘어라?’
그 때, 거대 거미의 상처 부위를 살피던 승한이 뜻밖의 모습을 발견했다.
상처 부위에 남아있는 작은 불빛이 상처 부위를 괴롭히며 회복을 더디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