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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네 번째 꿈
‘지금!’
창끝이 바로 눈앞에 다가온 순간, 승한은 몸을 낮게 숙였다. 그러자 창끝이 바로 승한의 머리 위를 지나가고, 승한의 검은 말의 다리를 노렸다.
콰악-!
승한의 검은 뼈를 무처럼 베어버릴 만큼 위력적이지는 않았다. 만약 상대가 보통 스컬레톤이었다면 그대로 뼈째 베어버릴 수 있었겠지만, 이상하리만치 기사 스컬레톤이 타고 있는 말은 단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승한의 공격이 통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승한의 검은 충분히 위력적이었고, 말의 균형을 급격하게 무너뜨렸다.
쿠웅-!
그 자리에서 말이 앞으로 나뒹굴며 말에 타고 있던 기사 스컬레톤이 바닥에 떨어졌다. 두 개의 다리가 부러진 말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려다 다시 그 자리에 쓰러졌다.
“후우우.”
까다로운 말을 처리하긴 했지만 기사 스컬레톤은 다시 바닥에서 일어나 승한을 향해 창을 겨눴다. 하지만 애초에 기마전을 염두해 두고 만들어진 창인 듯, 두 다리로 서서 거대한 창을 들고 있는 모습은 꽤나 불편해보였다.
승한은 재빠르게 기사 스컬레톤을 향해 달려들었다. 스컬레톤 말은 더 이상 제 구실을 하지 못하니, 기사 스컬레톤의 전력도 함께 반감되었을 것이다.
쩡-!
기사 스컬레톤은 승한이 휘두른 검을 창을 들어 막아냈다. 지금까지 만난 스컬레톤은 승한의 힘을 견디지 못해 뒤로 물러나거나, 검을 놓치곤 했는데 역시 기사 스컬레톤은 달라도 달랐다.
‘힘에서 밀리지 않아?’
승한은 적어도 기사 스컬레톤을 힘에서 밀어붙일 수 없다는 사실을 한 번의 공방을 통해 깨달았다. 기사 스컬레톤은 뼈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만큼 탄탄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입고 있는 갑옷도 지금까지 만난 스컬레톤들이 입고 있던 허술한 갑옷과 투구가 아닌, 제대로 된 철제 플레이트 메일이었다. 승한은 과연 저 갑옷을 뚫고 스컬레톤에게 제대로 된 타격을 줄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승한은 기사 스컬레톤에서 잠시 떨어졌다. 다행히 힘이나 내구도는 제법인 듯했지만, 움직임 자체는 승한에 비해 굼뜬 편이었다. 하긴, 저 무거운 갑옷을 입고 승한처럼 가볍게 움직이기는 힘들 것이다.
승한은 눈살을 찌푸리며 기사 스컬레톤을 바라봤다.
‘기껏 말이라는 문제를 하나 해결해 놨더니만.’
말 아래로 내려놓기만 하면 상대하기가 쉬울 줄 알았더니, 역시 최종 보스라 그런지 달라도 달랐다.
‘약점은 머리인데…….’
다른 곳은 공격해봤자 소용없었다. 스컬레톤들은 팔이든 다리든, 어딜 베어도 상관없다는 듯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살과 피를 가진 생명체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을 부상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하긴, 어차피 뼈로 이루어진 괴물.
베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으니, 겁낼 게 없긴 할 것이다.
‘투구가 제법 단단해 보인단 말이지.’
더군다나 방금 전 스컬레톤 말의 내구도를 생각해 보면, 기사 스컬레톤이 가지고 있는 뼈의 내구도도 제법 단단할 것이다. 부수거나 베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투구를 뚫고 그 단단한 뼈를 어쩌기는 힘들었다.
‘남은 방법은…….’
생각이 정리될 즈음, 기사 스컬레톤이 창을 앞으로 겨눈 채 승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비록 말은 없었지만 무거운 중갑을 걸친 채 힘차게 달려드는 기사 스컬레톤의 위엄은 제법이었다.
힘에서 우위에 있다면 모를까, 거대한 창을 상대로 정면 대결은 무모한 짓이었다. 비록 말의 도움을 받지 않아서 위력이 약해졌다고 해도 말이다.
대신, 말이 사라지면서 기동력에서는 승한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무거운 중갑을 걸친 기사 스컬레톤의 움직임은 승한에 비해 훨씬 굼떴다.
쐐액-.
기사 스컬레톤의 창이 승한의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승한은 그대로 검을 휘두를까 하다가 어차피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다른 공격을 택했다.
빠악-!
승한의 다리가 기사 스컬레톤의 다리를 걷어찼다. 아니, 정확히는 걸어 넘겼다. 멀쩡한 상태라면 기사 스컬레톤의 내구도와 갑옷 때문에 넘어지지 않았겠지만 승한은 창을 들고 돌진하던 기사 스컬레톤의 힘을 이용했다.
균형을 잃은 기사 스컬레톤은 달리던 방향 그대로 앞으로 넘어졌다. 승한은 검을 잡고 있던 반대로 돌려 검 끝이 아래로 향하도록 했다.
쉬이익-!
뿌득-.
승한의 검이 기사 스컬레톤이 착용하고 있는 투구와 갑옷 사이 이음새를 파고들었다. 뼈가 끊어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기사 스컬레톤의 몸이 들썩였다.
승한은 서둘러 한쪽 발을 들어 기사 스컬레톤의 등을 밟았다. 혹시라도 기사 스컬레톤이 벌떡 일어나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다행히도 기사 스컬레톤은 잠시 몸을 들썩이더니 움직임을 멈췄다. 승한은 기사 스컬레톤을 쓰러뜨렸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털썩-.
그리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악! 아파 죽겠네. 뭔 놈의 다리가 저리 단단해?”
단단한 갑옷을 입은 다리를 온 힘을 다해 걷어찼으니 아플 만도 했다. 만약 승한이 [강인함]의 레벨을 3레벨까지 올리지 않았다면 그대로 뼈가 부러졌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확실히 익숙해지긴 했어.’
승한은 기사 스컬레톤과의 싸움을 머릿속에 상기시켰다.
겁 없이 달려드는 말과 창끝을 피하며 스컬레톤 말의 다리를 노렸다. 이어서 다시 기사 스컬레톤의 다리를 노려 그 힘을 이용해 넘어뜨리고, 곧장 투구와 갑옷의 이음새라는 약점을 노린 것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어떻게 싸워야 할지, 어떻게 해야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을지가 머릿속에 착착 정리되었다. 익숙해진 것도 그렇고, 검을 휘두르며 싸우는 게 더 이상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도 승한의 움직임을 크게 변화시켰다.
‘좋은 거겠지.’
앞으로도 싸울 일은 많을 것이다. 그게 꼭 스컬레톤이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전혀 다른 종류의 괴물일 수도 있다.
잠시 주저앉았던 승한은 다시 일어나 멀리 보이는 파란색 문으로 향했다. 기사 스컬레톤을 쓰러뜨렸기 때문인지 파란색 문을 열고 나갈 수 있었다.
다시금 나타난 새하얀 공간.
그리고 승한의 눈은 다음 번 남색과 보라색 문을 찾아 움직였다.
‘이제 두 개 남은 건가?’
만약 보라색 문이 진짜 문이라면, 남색 문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이제 보니 빨간색이나 주황색 문과는 달리, 남색과 보라색 문은 개수가 무척 적었다. 비율로 보자면 빨간색 문에 보라색 문보다 정확히 7배 쯤 많은 듯했다.
문의 색과 이번 4스테이지가 연관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승한은 남색 문 앞으로 가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기사 스컬레톤과의 싸움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건 반드시 필요했다.
쉼 없이 빨간색부터 파란색 문을 통과한 승한은 알게 모르게 피로가 꽤 누적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파란색 문의 미로은 승한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꽤 피곤하게 만들었다.
승한은 남색 문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작정하고 쉬기로 마음먹었다. 검과 방패를 내려놓고, 한 시간이 넘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스테이지 4]
달성 조건 : 진짜 문을 찾아라.
제한시간 : 48시간
남은시간 : 38 : 34 : 58
보상 : ??
벌써 4스테이지를 시작하고 9시간이 넘었다. 체감상으로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시간은 꽤 남아있었지만, 언뜻 불안감이 들었다.
‘보라색 문까지 열었는데… 아무 일도 없으면?’
만약 빨간색부터 보라색까지 차례로 열어야 한다는 승한의 생각이 틀린 것이라면?
그거야말로 진짜 절망적이었다. 그 가정이 틀릴 경우, 이 많은 문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승한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렸다. 보라색에 가까울수록 난이도가 높아지는 것이나, 하나의 문을 통과하지 않고 다음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나, 승한의 가설에 무게를 더해주고 있는 증거였다.
복잡해졌던 머릿속을 정리한 승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쉴 만큼 쉬었고, 더 이상 쉬어봤자 머리만 더 복잡해 질 게 뻔했다.
어차피 지금 당장 승한이 해야 할 일은 하나였다.
남색 문을 통과하고, 보라색 문을 여는 것.
보라색 문이 또 다른 미션일지, 아니면 4스테이지를 통과하는 ‘진짜 문’일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보라색 문이 진짜 문이라면, 이 남색 문이야말로 가장 난이도가 높은 문일 것이다.
“가자.”
승한은 남색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덜컥-.
남색 문의 안쪽으로 들어간 승한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에 눈을 깜박였다.
‘뭐지?’
황무지였다. 온통 모래로 가득한 황갈색 땅과 새파란 하늘이 위아래로 펼쳐져 있었다.
마치 2스테이지의 사막을 보는 것 같았다.
한 걸음 안으로 들어가자 뒤쪽에 있던 남색 문이 사라졌다. 이미 익숙한 일이라 승한은 신경쓰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뜨거운데.”
위로는 눈이 부실 만큼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면티 하나와 츄리닝 바지 차림의 승한이었지만 그 뜨거운 열에 땀이 흘렀다.
2스테이지에서는 이 황무지에서 하이에나들이 승한을 쫒았고, 가까운 곳에 오아시스와 함께 나무들이 있었다. 그 덕분에 승한은 자신이 무얼 해야할지 바로 깨닫고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승한은 이 남색 문 안쪽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곧바로 판단할 수 없었다.
“미로도 아니고…….”
미로도 갑갑하긴 마찬가지였다. 어디로 가야할지 명확한 답을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길이 존재하고, 정답이 존재하는 만큼 승한은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허허벌판은 미로와 비교해도 더 갑갑할 만큼 답이 보이지 않았다.
승한은 일단 걸었다. 힌트가 없고, 목적지가 없었다. 남색 문을 열고 들어온 방향 그대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한 시간, 두 시간.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그늘 한 점 없이 걷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스테이지의 진행 상황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허억. 허억.”
더위와 함께 끝을 모르는 황무지의 갑갑함에 숨이 가빠왔다. 땀이 비 오듯 내렸다.
“젠장… 괴물이든 함정이든, 뭐든 좀 나오라고!”
악에 받힌 승한은 결국 아무 것도 없는 하늘에 대고 애꿎은 고함을 질렀다. 이대로 있다가는 시간이 다 지나기도 전에 햇빛에 말라 죽을 판이었다.
아무리 몸이 강해지고, 빨라지고, 무기를 강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자연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다. 지금의 승한에게는 시원한 물도, 편안한 쉼터도 아닌, 몸을 가릴 수 있는 그늘 한 점이 간절했다.
고함을 질러봤자 돌아오는 건 없었다. 승한은 결국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힘없이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방향도 틀지 않고, 텅 빈 머리와 힘없는 몸을 이끌었다. 그러던 중, 승한의 눈앞에 멀리 황무지가 아닌 무언가가 보였다.
“뭐지?”
그게 무엇이든, 설령 괴물이라 할지라도 승한은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어차피 이대로 쓰러지거나, 괴물과 싸우다 쓰러지거나, 쓰러지는 건 매한가지였다. 괴물이라도 있다면 그래도 이곳을 탈출할 방법이 있는 셈이니 다행이었다.
자연스럽게 승한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멀리 보이는 무언가는 쉽게 가까워지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황무지에서, 점처럼 작게 보였던것 뿐이었다.
그래도 계속해서 걸어가니 그게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있었다. 승한에게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괴물은 아니었다.
“오두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