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
순간 적막이 흘렀다.
비로소 사울은 이 모든 상황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적들은 바로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족한 전력으로 몰릴 대로 몰리면서도, 마지막 한 방으로 역전시킬 순간을 말이다.
그리고 방금 전 공격은 그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건… 말도 안 돼.’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상황.
하지만 현실이었다.
세네카는 부족한 전력으로 이 전쟁을 이기기 위해 이렇게 판을 짠 것이다.
방금 전 공격 한 번으로 수백, 아니, 수천의 병력이 손실되었다.
저런 공격이 계속해서 가해진다면?
지금 카멜 산을 포위한 연합군은 전멸할 테고, 제아무리 대군을 이끌고 몰려와도 저들을 막진 못할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막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끝장이다.
아마 두 번의 기회는 없을 것이다.
“막아야 해.”
사울의 말에 모두들 동의했고, 모두를 대표하여 카스텔이 말했다.
“전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사울은 명령했다.
“모두들, 세네카를 막아라.”
“네, 전하!”
모두와 함께 사울 역시 마법 검을 치켜들고 돌진했다.
그러자 다시 카멜 산 병력의 머리 위에 마법진이 떠오르고, ‘빛의 기둥’이 생성되었다.
빛의 기둥은 수십 갈래로 쪼개져 사울이 이끄는 병력을 덮쳤다.
여전히 광범위하고, 또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하지만 최고의 실력자로 구성된 사울 쪽도 만만치 않았다.
혹은 마법으로, 혹은 창칼로, 혹은 체술로 날아오는 마법을 막거나 피해 냈다.
덕분에 두 번째 공격으로 말미암은 피해는 크지 않았다.
‘이 마법은 소수의 실력자보다는, 다수의 병력을 쓸어버리기 위한 마법인 것 같군.’
달리 말하면, 지금 여기서 사울 일행이 이 전투를 끝내지 못하면 남은 병력은 전멸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무조건 여기에서 끝장을 내야 했다.
“……!”
사울은 멀리 세네카가 무어라 손짓을 하는 것을 보았다.
그와 함께 세네카 휘하의 병력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세네카 곁에 있는 건 카멜 산의 최정예들일 것이다.
머릿수도 이쪽 못지않았고, 하나하나 마나를 다루는 데 능숙한 실력자가 분명했다.
그렇게 생명수 위에서, 두 정예 부대가 맞붙었다.
“전하, 조심하십시오!”
“알고 있어요!”
카스텔의 경고가 아니라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적 하나하나가 대단한 실력자라는 사실을.
“죽어라!”
한 드워프가 똑바로 사울에게 달려왔다.
짤막한 다리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빠른 속도로 달려와 도끼를 휘둘렀다.
도끼날에 서린 푸르스름한 기운은, 마나가 한껏 실린 강력한 공격임을 뜻했다.
사울도 지지 않고 검을 펼쳤다.
막은 뒤 반격하는 게 아니라, 맞서 반격하는 게 더 유리한 상황이다.
우선 사울은 빠른 검격으로 날아오는 도끼를 견제했다.
드워프도 만만치 않았다.
눈속임에 가까운 검격에는 넘어가지 않고, 강맹한 기세로 사울의 목을 노렸다.
그렇지만 사울은 거기까지 예상했다.
검을 휘둘러 순간적인 빈틈을 만들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준비해 두었던 마법을 날렸다.
매직 미사일.
가장 간단한 마법 중 하나이지만 누가 어떻게, 어떤 상황에 쓰느냐에 따라 위력과 쓰임새는 천차만별이다.
사울이 날린 매직 미사일은 빠르고 강력하게, 그리고 정확히 드워프의 빈틈을 때렸다.
드워프 역시 상당한 수준의 전사라 그것만으로 쓰러뜨리기는 어려웠다.
매직 미사일을 맞고 움찔거리는 드워프 전사를 향해 사울의 검이 날아갔다.
검집에서 빠져 나온 날카로운 검끝이 드워프를 관통했다.
“……!”
빠르고 정확한 공격에 드워프는 그대로 쓰러졌다.
한 명의 적을 쓰러뜨림과 동시에 사울은 자신의 등 뒤를 노리는 적의 존재를 파악했다.
사울이 미처 손을 쓰기 전에 아이나가 사울의 뒤를 막았다.
아이나의 방패에 한 엘프가 쏜 화살이 막혔고, 아이나는 엘프에게 도끼를 내던졌다.
엘프는 도끼를 피했지만, 이어 사울이 날린 ‘아이스 스피어’ 주문은 피하지 못했다.
“고마워요.”
“제가 할 말입니다.”
짧게 인사를 주고 받은 사울과 아이나는 계속 싸웠다.
그런 사울의 눈에 아르멜이 적과 싸우는 광경이 보였다.
아르멜은 위기에 빠져 있었다.
자신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오크의 괴력에 밀려 검을 떨어뜨리기 직전이었다.
사울은 아르멜의 지원에 나섰다.
사울이 마법으로 날린 불덩어리가 아르멜을 공격하던 오크의 안면에 직격했다.
무식하게도 오크 전사는 안면에 화상을 입고도 아르멜을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순간의 빈틈 덕분에 아르멜은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이어 사울이 다시 마법을 날렸고, 이어 아르멜도 공격을 퍼부어 오크 전사를 쓰러뜨렸다.
“…….”
순간 사울과 아르멜의 눈이 마주쳤다.
제대로 인사를 주고받을 겨를이 없어 눈빛만으로 감사를 표하고, 또 받았다.
지금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 후로도 사울은 직접 싸우며, 혹은 아군을 도우며 전투를 이어나갔다.
실력자와 실력자의 전투이며, 머릿수도 비슷했기에 어느 쪽도 쉽사리 우위를 못했다.
그리고 뒤늦게 카멜 산의 최강자가 움직였다.
‘세네카…….’
몇 명의 호위와 함께 세네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네카도 세네카지만, 세네카와 함께 있는 ‘호위’들을 본 사울은 적잖이 놀랐다.
허리에는 도끼를, 등에는 커다란 석궁을 찬 세네카의 호위대장 모데아의 존재는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모데아 옆에 있는 세 사람은 정말 예상치 못했다.
킬리안 비셔스와 그의 충복인 제온, 칼립소였다.
“전하.”
“선생님.”
어느새 카스텔이 사울 곁에 다가왔다.
“지금부터 저와 함께 움직이시지요.”
카스텔의 말에 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어차피 세네카를 쓰러뜨려야 전투가 끝날 테니까.”
“…….”
카스텔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을 것이다.
전장에서 도망치지는 않아도, 세네카의 개입으로 더 위험해진 전장에서 사울을 지키려던 것이리라.
하지만 사울에게는 자신의 안전만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쨌든 세네카를 쓰러뜨려야 했다.
결심한 사울이 큰 소리로 명령했다.
“모두들! 세네카를 공격하라!”
세네카도 지지 않고 명령했다.
“적들을 모조리 죽여라!”
명령과 함께 세네카가 양손을 치켜들었다.
한 손은 피와 살로, 또 한 손은 뼈만 남은 앙상한 손.
그런 세네카의 양손에서 어마어마한 힘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저 마나는?”
세네카의 힘을 본 사울도, 다른 자들도 경악했다.
조금 전 ‘빛의 기둥’ 마법은 거대한 마나를 담은 마법 도구, 즉 일종의 마법 병기를 만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세네카 개인의 힘이었다.
세네카가 가진 어마어마한 힘이 순식간에 수백, 수천의 병사들을 죽였던 것이다.
‘저럴 수가…….’
사울은 자신보다 강한 자들을 많이 봐 왔다.
그렇기에 상식적으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힘의 한계가 어느 정도인지도 잘 알았다.
가르시아 남매나 카스텔.
그것이 상식적인 개인이 가질 수 있는 힘의 한계다.
어느 정도 더 강해질 수는 있겠지만, 지금 세네카의 힘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가르시아 남매나 카스텔과 비교해도 몇 배, 아니, 몇십 배는 더 강해 보였다.
세네카가 사울을 향해 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조금 전 보았던 어마어마한 위력의 ‘빛의 기둥’이 똑바로 사울을 향해 날아왔다.
수십, 수백 갈래로 갈라지지도 않고, 기둥이 통째로 사울 쪽을 덮쳐 왔다.
대장인 사울부터 제거할 심산이 분명했다.
‘젠장!’
사울은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공격에서 살아남야 했다.
사울은 본능적으로 전력을 다해 스스로를 지키는 데 전념했다.
무엇보다 직격을 피하기 위해 기둥을 주시하며 바삐 움직였다.
저런 공격을 정통으로 맞으면 살 수 없다.
그렇다고 완전히 피하기에는 공격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
방법은 하나다.
피할 수 있는 데까지 피하고, 막을 수 있는 데까지 막는 것.
사울은 이를 악물며 최대한 많은 힘을 쏟아 붓고, 또 몸을 움직였다.
저 괴물 같은 힘을 가진 세네카가 자신을 치는 데 전력을 다한다면, 일단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 할 뿐이다.
“……!”
이를 악물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공격에 대응하던 사울은 자신의 곁에 다가온 사람의 존재를 깨달았다.
역시 카스텔이었다.
카스텔은 눈을 부릅뜬 채 사울과 함께 날아오는 공격을 막았다.
그런 카스텔의 눈빛을 본 사울은 깨달았다.
지금 카스텔은 자신의 목숨을 구할 생각 뿐, 다른 어떤 것도 생각지 않고 있음을.
‘설마… 죽을 생각인가!’
지금 저 공격을 몸으로 받으면 카스텔이라도 무사할 수 없다.
자신의 목숨 또한 지켜야 할 것임에도, 카스텔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울의 목숨을 구하는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오직 사울을 살릴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사울은 깨달았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살아날 가능성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카스텔이 죽을 가능성은 대단히 높을 것이다.
‘그건 안 돼!’
사울은 자기도 모르게 행동을 바꿨다.
자신이 아닌, 카스텔을 지키기 위해 마법을 시전했다.
본래라면 사울 본인을 보호해야 했을 마법 방어막이 카스텔 쪽을 향했다.
‘!!!’
카스텔이 무슨 짓이냐는 표정으로 사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울은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 세네카의 공격은 사울과 카스텔이 최선을 다해도 버텨 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최악의 경우엔 지금 사울의 행동이 자신과 카스텔을 함께 죽이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사울도 그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사울은 카스텔을 보호하는 쪽을 택했다.
카스텔이 살아날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서.
‘이런…….’
순간 사울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다시 태어난 후 항상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행동해 온 자신이다.
그런데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한 순간에, 터무니없이 감성적인 일을 저질렀다.
아직 살아서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은 데도.
그런 와중에 카스텔이 자신을 살리려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쾅!
요란한 굉음이 울려퍼졌다.
하지만 지금 사울은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알아챌 겨를도 없었다.
그저 당장이라도 덮쳐 올 어마어마한 마법에서 운 좋게 살아남기를 바랄 뿐이었다.
마침내 마법이 사울과 카스텔을 덮쳤다.
끔찍한 위력이 실려 있을 빛의 기둥.
그런데 마법이 생각만큼 강하지 않았다.
무시할 정도는 아니지만, 의외로 사울과 카스텔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정도였다.
사울을 지키기 위해 만든 카스텔의 마법 방어막도, 카스텔을 지키기 위해 만든 사울의 마법 방어막도 깨지지 않았다.
둘이 합쳐 한 명을 지키기도 버거울 줄 알았는데, 둘 다 큰 문제없이 버텨 냈다.
생각보다 세네카의 마법 위력이 낮았던 것일까?
아니면 사울이나 카스텔이 기적적인 힘을 발휘한 것일까?
어느 쪽도 아니었다.
힘겹게 몸을 추스른 사울의 눈에, 공격을 받고 있는 세네카의 모습이 보였다.
세네카를 공격한 건 바로 가르시아 남매였다.
가르시아 남매가 달려가 세네카의 마법 시전을 방해한 것이었다.
“세네카! 죽어라!”
베일이 휘두르는 불과 얼음의 검이 세네카를 덮쳤다.
그런 베일을 막기 위해 모데아가 석궁을, 그리고 어째서인지 세네카의 호위병 노릇을 하던 제온까지 활을 들고 나섰다.
두 궁수를 상대한 건 마리안이었다.
“내 동생을 방해하지 마라.”
마리안이 날린 화살이 모데아와 제온을 덮쳤다.
모데아와 제온은 베일 대신 마리안을 상대해야 했다.
베일이 세네카를 직접 공격하고, 마리안이 베일을 엄호함으로서 세네카도 마법 시전에 방해를 받았다.
그것이 사울과 카스텔이 살아남은 이유였다.
상황을 파악한 사울은 다시 한번 쓰게 웃었다.
‘이번에는 가르시아 남매에게 고맙다고 해야겠군. 진심으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베일이 세네카의 마법 시전을 방해하는 가운데, 그런 베일을 노리는 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킬리안과 칼립소였다.
그 모습을 본 사울은 결정했다.
“일단 저 둘부터 쓰러뜨리지요.”
카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
카스텔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지금은 그만두었다.
지금 중요한 건, 오직 싸워 이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