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이미 카멜 산 쪽 병사들의 기세는 꺾였다.
적극적으로 연합군에 맞서려는 자들은 거의 없고, 물러가는 자들만 눈에 띄었다.
“뭔가 이상하군.”
곁에 있던 카스텔도 사울의 말에 동의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전력은 아군이 앞서고 있으니 적들이 밀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문제는 적들이 너무 순순히 물러나고 있다는 것.”
“네. 더군다나 이곳은 저들의 보금자리인데 말입니다.”
겁쟁이라도 자신의 집이 위험한 상황에서는 용감해지게 마련이다.
연합군이 카멜 산에 올랐고, 그 중심인 생명수까지 온 건 집이 완전히 무너지기 직전인 상황이다.
이쯤 되면 보통은 저항이 거세야 할 것임에도, 카멜 산의 병력들은 어느 순간부터 너무나도 쉽게 물러났다.
마치 그러라는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하지만 저들에게 도망칠 곳은 없어요.”
“그러니 더 이상한 일입니다.”
이미 카멜 산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후퇴한다고 해도 패잔병들이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설령 도망친다고 해도, 카멜 산이라는 구심점을 잃은 저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또 하나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
“세네카는 생명수 안에 있는 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카멜 산의 중심이자 이 모든 사태의 원흉으로 여겨지는 세네카가 있는 곳.
생명수.
자연스럽게 생명수를 중심으로 포위망이 형성된 가운데, 베일이 다가와 물었다.
“당장 쳐들어가 쓸어버리던가, 그게 아니라면 일단 외부에서 공격하는 게 낫지 않겠소?”
과격하지만, 그 또한 하나의 방법이다.
여기까지 와서 무작정 시간을 끌어 봐야 좋을 건 없을 테니까.
하지만 사울은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전황이 지나치게 순조롭게 흘러가는 게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무작정 저 안에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이런 사울의 생각에 동조하는 자도 적지 않았다.
베일의 누나인 마리안도 그중 하나였다.
“베일. 나도 여기 왕자님과 생각이 같아.”
“세네카가 무언가 수작을 부리고 있단 말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허망하게 카멜 산의 주력군이 흩어질 리 없지.”
“상관없어. 무슨 수작을 부리든 그 전에 박살 내 버리면 그만이야. 들어가는 게 위험하다면 저 커다란 나무를 통째로 놈들의 관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괜찮겠지.”
사울은 베일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들었다.
이대로 저 생명수에 공격을 퍼부어, 생명수와 안에 있는 자들까지 모조리 묻어 버리자는 것이다.
그런 베일의 의견에 찬동하는 사람은 더 있었다.
“밖에서 공격하는 건 괜찮은 생각입니다.”
카스텔이었다.
사울이 그런 카스텔에게 물었다.
“생명수와 세네카를 한꺼번에 날려 버리자고요?”
“가능하면 그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겠지요.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섣불리 생명수 안으로 들어가기보다는 바깥에서 공격을 퍼부어 처리하거나, 하다못해 적의 반응을 살펴보자는 것.
이건 꽤 그럴듯한 의견이었다.
정말 적이 생명수 안에 함정을 파 두었다면, 함정에 들어가기보다 밖에서 때려 부수는 쪽이 안전할 테니까.
‘이 생명수는 카멜 산의 이종족들이 대단히 소중히 생각하는 나무야. 이것을 파괴한다면 두고두고 말이 나오겠지. 하지만…….’
지금은 훗날에 벌어질지 모를 분쟁거리를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또 지금 생명수를 공격한다고 해도, 저 거대한 나무를 파괴할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사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일단 섣불리 접근하지 않고, 외부에서 생명수를 공격한다.”
모두들 생명수를 공격할 채비를 마쳤다.
사울을 비롯한 실력자들부터 그를 뒤따라 온 백 명도 넘는 마법사들이 각각 공격을 준비했다.
수백 명이 넘는 궁수들도 불화살을 준비했다.
아무리 생명수가 예사롭지 않은 나무라 해도, 이 정도의 공격을 한 번에 받으면 단숨에 잿더미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공격하라!”
사울의 명령과 함께 연합군은 생명수를 향해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제아무리 튼튼한 요새의 성벽이라도 부술 수 있을 위력의 공격이 생명수를 덮쳤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아니?”
“저럴 수가!”
연합군 모두가 경악했다.
어마어마한 위력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생명수는 멀쩡했다.
말 그대로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사울은 생명수 주변에 흐르는 마법의 힘을 알아보았다.
“방어 마법인가.”
분명 공격을 날리기 직전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힘이다.
“적들이 공격해 올지 모른다!”
“모두들 대비하라!”
이렇게 강력한 방어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위협적인 공격 마법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들 있을지 모를 공격에 대비하는 가운데, 마침내 생명수 쪽에서도 반응이 왔다.
거대한 나무 곳곳이 은은히 빛나는가 싶더니, 어마어마한 양의 마나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이건……!”
사울도, 다른 자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무언가 강력한 힘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했지만, 이건 상상을 초월한 수준이었다.
심지어 카스텔이나 가르시아 남매 기준으로 봐도 어마어마한 힘이었는지, 셋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새 생명수 전체가 빛나기 시작했다.
나무 전체가 검붉은 색으로 은은히 빛나는 가운데, 점점 빛이 강해졌다.
빛나지 않는 곳은 오직 생명수 안으로 출입할 수 있는 입구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마침내 생명수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생명수에 흐르던 빛이 수십, 수백 가닥의 촉수가 되어 생명수를 포위한 병력을 덮쳤다.
“으아악!”
검붉은 빛의 촉수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하나하나가 통나무처럼 굵은 촉수는 어지간한 무기나 방패, 마법도 뚫고 들어와 아군을 깔아뭉갰다.
비슷한 기술을 사용하는 카스텔의 것과 비교해도 위력이 월등했다.
“마, 막아라!”
“으아악!”
“막을 수가 없습니다!”
순식간에 생명수를 포위하던 병력들은 혼란에 빠졌다.
수십, 수백 가닥의 촉수는 마치 파리를 때려잡듯 주변의 모든 것들을 쓸어버렸다.
생명수를 공격하고 있던 병사들은 정예 중의 정예였지만, 그럼에도 이런 공격에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사울처럼 뛰어난 실력자들은 그래도 상황이 나았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통나무 같은 마법 촉수에 맞거나 깔려 죽을 판이라 방심할 수 없었다.
사울은 날아드는 공격을 피하거나 막으며 재빨리 머릿속을 정리했다.
‘지체하면 피해만 늘어날 뿐이야.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어. 저 생명수 안에 세네카가 있는 건 틀림없으니……!’
이 모든 것이 생명수 안의 세네카의 수작인 듯 하다.
생명수 안으로 들어가 세네카를 처리하기만 한다면…….
“생명수 안으로 돌입할 수 있는 자들은 모두 돌입하라!”
“전하! 지금 병사들이 돌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돌입 가능한 실력자들이 들어가고, 나머지는 저 촉수가 닿지 못하는 곳까지 후퇴하라!”
“알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적들이 원한 것일 수도 있다.
거대한 생명수 대부분이 검붉은 마나의 기운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출입구 부분만 뻥 뚫려 있는 것은 대놓고 함정이나 유인책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저 안으로 들어가면 생명수 안으로 들어갈 수 있고, 생명수 어딘가에 있을 세네카와 만날 수 있다.
그를 없애면 모든 게 끝날 것이다.
아마도.
이에 사울을 비롯한 실력자들은 생명수 안으로 쳐들어갔다.
생명수에 들어간 건 약 백 명 정도였다.
생명수 안은 의외로 평온했다.
텅 빈 건 같지는 않았지만, 당장 내부에 쳐들어 온 사울을 공격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생명수 안은 사울이 몇 번 찾아왔을 때와 거의 똑같았다.
아무리 생명수가 크고 넓다지만, 백 명이 넘는 병력이 함께 움직이는 건 비효율적이었다.
이에 사울은 생명수 안에 들어온 부대를 몇으로 나누었다.
“내부를 수색하라!”
“너희들은 매복을 찾고, 너희들은 저 망할 촉수를 멈출 방법을 찾아라!”
몇 개로 나누어 진 부대들이 각각의 목표를 가지고 흩어졌다.
생명수에 몇 번 들어와 본 적 있던 사울 또한 목표를 정했다.
“우리는 세네카를 찾는다.”
사울은 카스텔과 아이나, 아르멜 등 그동안 함께 싸워 온 가장 믿을 수 있는 전우들과 함께 움직였다.
생명수 내부 구조를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사울은 기억을 더듬어 세네카의 방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세계수 내부는 텅 빈 게 아니었다.
사울 등이 세계수 안으로 들어오고, 또 흩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공격이 시작되었다.
“적이다!”
“맞서 싸워라!”
세계수는 백 명 가까이 되는 연합군과 카멜 산의 병력이 맞서 싸울 만큼 충분히 넓었다.
하지만 크고 복잡한 세계수의 구조 때문에 사실상 시가전이 전개되었다.
숨어 있던 적들이 튀어 나오고, 아군은 그런 적에 맞서 싸운다.
거대한 나무 안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시가전.
그런 가운데 문득 변화가 생겼다.
“뭐지?”
“바닥이 움직인다!”
“아니, 벽도… 천장도 움직인다!”
생명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무 안에서만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정신없이 요동치는 가운데, 사울은 황급히 명령을 내렸다.
“모두들 생명수에서 빠져나가라!”
다행히 입구 및 출입문 역할을 하는 구멍들은 막히지 않았고, 사울과 병력들은 재빨리 생명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니!”
“이건 대체?”
생명수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생명수 안에서 머무르던 카멜 산의 병력도 빠져나와 세계수 위에 섰다.
카멜 산의 병력은 한 남자를 중심으로 뭉쳤다.
사울은 마법을 쓰지 않아도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세네카…….”
사울 곁에 있던 베일이 외쳤다.
“망할 놈들. 우리 가지고 장난이라도 치자는 건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식으로 생명수를 조종할 수 있었다면, 처음부터 연합군을 생명수 안에 들이지 않았어도 될 일 아닌가.
세네카를 중심으로 그를 호위하고 있는 병력은 수십 명에 불과했다.
사울을 비롯한 실력자들의 숫자도 연합군 쪽이 우위며, 산 안팎을 포위하고 있는 수만의 군대가 건재하다.
언뜻 보면 싸움은 이것으로 끝난 듯 보였다.
하지만 사울도, 다른 자들도 깨달았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음을.
“나무가 기울었다!”
요동치던 생명수는 기괴하게 기울어지며 움직임을 멈췄다.
워낙 큰 나무가 거의 땅에 붙을 만큼 기울어진 채 굳어 버려 나무로 만들어 진 거대한 언덕이 새로 생긴 꼴이 되었다.
수백 명이 한꺼번에 올라가도 문제없을 만큼 커다란 언덕이다.
“실로 기괴하기 짝이 없군.”
사울의 말이 모두의 심정을 대변했다.
그 어떤 산전수전을 겪어 온 자도,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전하.”
카스텔의 말에 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보고 느꼈어요.”
전방 카멜 산 병력의 중심.
아마 세네카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상상을 초월한 마나가 느껴졌다.
한 개인의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마나.
수십, 아니, 수백 명의 뛰어난 마법사가 합심해도 이 정도의 마나를 모으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언가 마법이 시전되고 있군요.”
“그렇습니다.”
“대체 어떤 마법이……?”
마법의 정체는 곧 밝혀졌다.
카멜 산의 병력 머리 위에 거대한 빛의 마법진이 새겨지고, 그 마법진 위에서 빛의 기둥이 솟아올랐다.
불길하게 빛나는 검푸른 빛의 기둥은 수백 갈래로 흩어져 ‘적’들을 덮쳤다.
연합군 말이다.
공격을 받은 건 코앞에 있는 연합군만이 아니었다.
수백 가닥으로 흩어진 빛의 기둥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카멜 산을 포위하고 있던 연합군까지 가차 없이 공격했다.
“으아악!”
사울과 가까운 곳에 있던 연합군도 공격을 받고 쓰러졌다.
“으아아…….”
산 아래에서 산을 포위하고 있던 병사들이 공격을 받고 내지르는 비명 소리도 아득히 들려왔다.
수백, 아니, 수천의 병사들이 마법 세례에 쓰러졌다.
말 그대로 순식간에, 단 한 번의 공격만으로 벌어진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