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사울은 자신에게 특별한 세 사람과 만나기로 했다.
처음 만난 건 아미스였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바쁠 텐데 일을 방해한 게 아닌지 모르겠군요.”
“괜찮습니다.”
아미스는 이번 전투에 직접 참여하진 않았다.
하지만 마을을 관리하고, 병자와 부상자를 돌보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렇게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사울은 굳이 만남을 청했고 또 아미스도 받아들였다.
조금은 이기적인 행동일지 모른다.
하지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신관 아미스가 아닌, 전생의 여동생에게.
“…….”
막상 아미스를 마주하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말을 언제, 어떻게 할지 생각해 둔 건 많은데, 정작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그렇게 주저하는 사울의 모습을 바라보던 아미스가 문득 쿡 웃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죄, 죄송합니다, 전하.”
아미스가 저러는 이유는 안다.
사울에게서 다른 누군가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신의 오빠 말이다.
설마 사울이 그 죽은 오빠와 같은 존재라는 건 짐작도 못 하고 있겠지만.
사울은 작게 웃었다.
그리고는 아미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지막으로, 사울은 말했다.
“무운을 빌어 주세요.”
“물론입니다. 전하께서, 그리고 연합군 모두가 이기고 또 무사히 돌아오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부탁해요.”
그렇게 아미스와의 만남은 끝났다.
전생 이야기를 꺼낼 생각도 했지만, 지금은 참기로 했다.
그 이야기는 살아 돌아온 후 해도 충분하다.
귀여운 여동생에게 오라버니를 한 번도 아닌 두 번을 잃는 아픔을 맛보여 줄 수는 없었다.
* * *
두 번째로 사울은 아이나를 만나러 갔다.
“전하.”
“아이나.”
가족 모두가 반역자가 되었고, 모두 죽었음에도 자신은 여전히 왕자와 함께인 기구하며 비극적인 운명의 소녀.
과연 이 소녀가 다시 웃는 날이 올까.
사울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말했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아마 삼백 년 전쟁도 사실상 마무리될 것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대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아이나는 잠시 생각하다 조심스레 말했다.
“저희 가문은 이미 무너졌습니다.”
“…그래요.”
“저희 가문을 되살리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만, 이젠 의미 없는 일 같습니다.”
“그러면요?”
“아버님을 그렇게 만든 자들에게 책임을 묻고 나면…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볼 생각입니다. 한때는 전하 곁에 평생 있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어려울 것 같으니까요.”
아이나의 말에 사울은 흠칫했다.
“나의 곁에 있고 싶다는 건…….”
“전하의 배필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랬군요.”
사울도 아이나에게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아예 모르진 않았다.
스스로 그런 마음을 품진 않았지만, 당장 아이나의 마음을 쳐 낼 생각도 없었기에 별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미안해요. 그대의 마음을 받아 주지 못할 것 같으니.”
“괜찮습니다. 저는 반역자의 딸이고, 전하의 마음도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으니까요.”
“…….”
아이나가 말하는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 사울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이름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사울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도 그대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에요. 부디 그대도 살아남아 승리의 기쁨을 맛보고 또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 전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마워요.”
* * *
마지막으로 사울은 카스텔을 찾아갔다.
“전하.”
“선생님.”
카스텔은 항상 그렇듯, 표정 없는 얼굴로 사울을 맞이했다.
그런 카스텔의 모습을 본 사울의 머릿속에 지금까지 보아 온 그녀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의 카스텔은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전생 때, 생애 마지막 순간이 된 전장에서 철 가면을 쓴 카스텔과 처음 만났고, 허망하게 죽음을 당했으니까.
이후 전생의 적국 왕자로 다시 태어났고, 카스텔 ‘선생님’과 다시 만났다.
분명 다시 태어난 사울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카스텔은 철 가면을 쓰고 왔다.
왕자를 협박하려 가면을 쓴 게 아니라, 생각 없이 편한 대로 행동한 끝에 발생한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었다.
그렇게 기묘한 사제 관계가 맺어졌고 사울은 카스텔을 ‘선생님’이라 불렀다.
처음에는 카스텔을 증오했다.
전생의 자신을 죽인 장본인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증오를 숨기고, 카스텔을 철저히 이용할 생각이었다.
카스텔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모두 배우고, 뽑아낼 수 있는 것을 뽑아 먹은 뒤 없애 버릴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 카스텔을 향한 증오심은 옅어졌고, 결국 사라졌다.
그 자리를 다른 감정이 채웠다.
많은 것을 가르쳐 준 데 대한 호감?
자신의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 준 데 대한 감사함?
물론 그런 감정도 있다.
그리고 그 이상의 감정도 있는 것 같다.
무어라 확실히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생각이 좀처럼 정리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투는 코앞에 다가왔고, 어쩌면 카스텔과 한가로이 이야기를 할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우선 사울은 카스텔에게 물었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선생님은 어떻게 할 건가요?”
카스텔은 곧바로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계획하고 있는 건 없나요?”
“있지만 제가 결정할 건 아닙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데요?”
“제 생각 같아서는 전하와 계속 함께하고 싶습니다.”
“함께하고 싶다고요?”
“네, 전하.”
사울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카스텔의 말이 선생 혹은 측근으로서 함께 있고 싶다는 뜻임을 안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 이상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불필요하지 않겠는가.
사울은 카스텔이 이야기한 만큼만 속내를 내비치기로 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카멜 산 문제를 정리하고 삼백 년 전쟁이 끝나도 우리 같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은 적지 않을 테니까.”
“말씀대로입니다.”
“알았어요.”
사울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모두 함께 살아남자고요.”
“네, 전하.”
* * *
2만의 다르센 왕국군.
5천의 가멜다 왕국군,
1천의 교단군.
세 세력이 연합한 연합군이 출병했다.
연합군의 목적지는 바로 카멜 산이었다.
수많은 연합군이 도열한 가운데, 총대장 역할을 맡은 사울이 연설했다.
사울의 목소리가 마법의 힘을 빌려 수만 명 모두에게 똑똑히 전달되었다.
“모두들 반갑다. 지금 이 자리에는 이전부터 나와 함께 싸운 자도 있을 것이고, 나와 함께 싸우지도, 그렇다고 창칼을 맞댄 적도 없는 자가 있을 것이다. 물론 나와 창칼을 맞댄 자도 있겠지.”
“…….”
“모두가 마찬가지다. 다르센 왕국군도, 가멜다 왕국군도 친구는 물론 과거의 적과 함께 있다. 그것도 삼백 년이나 싸워 온 적과 함께하고 있다.”
“…….”
“그만큼 이 전투는 중요하다. 과거의 적에게 품었던 온갖 복잡한 감정과 생각들은 접어 둬라. 지금 우리는 말도 통하지 않고,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 모두를 멸망시키려 하는 희대의 미치광이들과 싸우려 하고 있다. 그 미치광이들의 만행은 이미 극에 달했다. 가멜다 왕국은 수도가 불탔고, 다르센 왕국도 수많은 마을과 도시가 불탔다. 지난 6년 전쟁 동안 잃은 목숨보다 지난 몇 달간 카멜 산의 공격으로 잃은 목숨이 더 많다.”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는 가운데, 사울이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마라. 삼백 년 묵은 원한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잊어라! 가족을 죽이고 동료를 죽이고 나라를 불바다로 만든 적들을 물리치는 것만 생각해라! 나는 그를 위해 목숨 걸고 앞장서 싸우겠다. 그리고 난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나와 같은 마음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자, 나와 함께 싸울 준비가 되었는가?”
“와아아아!”
3만에 가까운 병사들의 외침이 지면을 뒤흔들었다.
그 광경을 본 사울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 사람들을 살폈다.
중립 지대에 있는 다르센 왕국, 가멜다 왕국, 대신전의 실력자들은 모두 이번 전투에 투입되었다.
그중에는 가르시아 남매나 세드처럼 과거 목숨 걸고 싸웠던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만은 과거의 감정 따윈 다 잊을 때다.
카멜 산을 무너뜨린 이후 생각해도 늦지 않다.
사울은 진심을 담아 모두에게 말했다.
“모두들 힘을 합쳐 싸우고, 꼭 이깁시다.”
“네, 전하.”
다르센 왕국 사람들은 물론, 가르시아 남매를 비롯한 모두가 사울에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사울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진 않지만, 이 자리에 참석한 크리스티안에게 예를 표했다.
“부디 꼭 이기고 돌아오도록 하오.”
“명심하겠습니다.”
이렇게 연합군은 카멜 산으로 출병했다.
카멜 산도 연합군을 맞이할 준비는 끝낸 상태였다.
출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연합군은 각종 공격과 방해 공작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아군 기사 몇 명이 저격을 당했습니다!”
“범인은 잡았나?”
“숲에서 숨어 저격한 것이라 찾기가 어렵습니다!”
은신하기 좋은 지형이다 싶으면 어김없이 연합군의 발목을 잡기 위한 공격이 이어졌다.
이를 막기 위해 정찰병을 보내면, 그 정찰병이 사라지거나 시체로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함정을 파거나, 수송 부대를 공격하는 등의 일도 이어졌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연합군의 진군을 막거나 크게 늦추지는 못했다.
이 정도는 예상 범위였고, 사울을 비롯한 연합군 수뇌부는 파훼법을 내놓았다.
“정찰병의 숫자를 늘리고, 또 자주 보내어 적들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해라.”
“네, 전하. 함정은 어떻게 할까요?”
“마법사들을 동원해라. 마법으로 함정을 찾아내고 제거하면서 움직인다.”
“알겠습니다.”
양으로도, 질로도 병력이 부족하진 않았다.
덕분에 연합군은 순조롭게 진군해 나갔고, 이에 카멜 산도 그에 맞춰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전하. 적들이 전방에서 진로를 막고 있습니다!”
“적 병력은?”
“천 명 정도이지만,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정탐병이 그려 온 상황을 살폈다.
확실히 중립 지대를 손바닥 보듯 하는 카멜 산답게, 적재적소에 병력을 투입하여 아군의 진로를 효과적으로 차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또한 예상 범위 안이었다.
이미 적들이 유리한 지형을 확보했다면 가장 좋은 파훼 방법은…….
“가르시아 자작.”
“네, 전하.”
“선생님.”
“네, 전하.”
사울은 연합군을 대표하는 강자, 가르시아 남매와 카스텔을 불렀다.
“적들의 기선을 제압하는 임무를 맡아 줄 수 있을까요?”
사울은 평소보다 정중한 태도로 가르시아 남매에게 부탁했다.
가르시아 남매는 이 ‘정중한 명령’을 받아들였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하는 수 없지. 우리가 적들의 기세를 제압할 테니 전하께서 대군을 이끌고 우리 뒤를 받쳐 주시오.”
“그렇게 하겠어요. 모두들 조심해요.”
자신들이 보유한 카드를 최고의 아끼느냐, 혹은 적극적으로 쓰느냐.
사울은 후자를 택했고, 다른 수뇌부의 의견도 같았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하니 최고의 카드를 아끼는 대신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진군 속도를 높이고, 하루빨리 카멜 산에 당도한다는 게 연합군이 세운 작전이었다.
그렇게 카스텔, 그리고 가르시아 남매가 함께 움직였다.
두 나라를 대표하는 세 명의 실력자들은 소수의 정예와 함께 앞장섰고, 모두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놈들을 막아라! 으악!”
“막을 수 없습니다!”
“저 괴물들을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카스텔의 마법, 베일의 검, 마리안의 활.
세 명의 강자의 합동 공격은 지형과 머릿수에 우위를 점한 적들의 방어를 한 방에 무너뜨렸다.
세 사람이 실전에서 함께 싸우는 건 처음이다.
이에 셋이 함께 싸우면 손발이 맞지 않을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모조리 박살 내 주마!”
가장 먼저 베일이 앞장서 불과 얼음의 검으로 눈에 띄는 적은 닥치는 대로 베어 넘기고, 부숴야 할 것은 모조리 때려 부쉈다.
“…….”
베일이 광폭하게 날뛸 때 카스텔은 고요하고 효율적으로 적들을 처리해 나갔다.
때때로 베일이 마음껏 날뛸 수 있도록 그를 돕기도 했고, 도울 필요가 없을 땐 그녀 역시 마법으로 적들을 쓸어버리고, 또 장애물을 파괴했다.
“잠시 진군을 멈춘다! 원거리에서 두 명을 원호하라!”
마리안은 소수의 정예병을 지휘하고, 또 스스로 활을 들어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렇게 세 명의 실력자와 소수의 정예병들은 어마어마한 활약을 보여 주었다.
머릿수로는 수십 배나 되며, 지형의 우위까지 가져간 적들도 끝내 버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