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대신전에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감이 가득했다.
사울이 방문한 것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사울 못지않은, 아니, 사울보다 위협적일 수 있는 존재의 방문 때문이기도 했다.
가르시아 남매 말이다.
“어서 오십시오.”
사울을 맞이한 신관과 성기사들의 표정에도 긴장감이 묻어났다.
“가르시아 남매는 어디 있나요?”
“전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르시아 남매는 대신전 회의실에서 사울을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 속에 회의실 문이 열리고, 가르시아 남매의 모습이 드러났다.
“오랜만이에요. 전하. 그리고… 카스텔.”
가르시아 남매의 누나 마리안이 먼저 인사말을 건넸다.
“그래. 정말 오랜만이군. 그대들을 반가워해야 할지, 아닐지는 모르겠지만.”
“후훗.”
뼈가 있는 사울의 말에 마리안은 미소로 답했다.
동생인 베일도 사울에게 눈인사를 했다.
여전히 무례한 태도였지만, 당장은 살기나 적의까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카스텔이 사울에게 속삭였다.
“당장은 별일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알았어요.”
사울과 함께 온 세드와 아론도 가르시아 남매와 눈짓을 주고받았다.
가르시아 남매는 그들에게도 특별히 적의를 내비치진 않았다.
적국 왕자도, 조국을 버리고 도망친 자들도 지금은 크게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모두들 오셨군요.”
에스타와 아미스까지 회의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모일 사람들은 모두 모였고, 모두들 자리에 앉았다.
중재자 역할을 맡은 에스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 에스타는 사울과 가르시아 남매, 양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자리는 두 나라의 전쟁을 넘어, 율렌 섬 전체의 운명을 가늠하는 자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현재 율렌 섬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중대하며,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조만간 손을 쓸 수 없게 될 테니까요.”
그러자 가르시아 남매, 그중 누나인 마리안이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이야기를 해도 될까요?”
“네, 자작님.”
마리안은 회의장을 슥 둘러보곤 말했다.
“우선 현재 상황에 대해, 각자 알고 있는 대로 이야기를 하죠.”
사울도 입을 열었다.
“그게 좋겠다. 서로 신뢰를 쌓을 겸, 각자 아는 것을 모두 이야기하도록 하지. 먼저 그쪽부터.”
“…….”
마리안도, 베일도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불리한 건 사울이 아니라 가르시아 남매 쪽이었다.
사울은 이곳에 오기 직전 정보를 들어 알고 있었다.
가르시아 남매는 사실상 조국에서 쫓겨난 처지라는 것을.
왕자로서 지위와 권한을 유지하고 있는 사울보다 훨씬 상황이 나빴다.
베일이 발끈하면서도, 아무 말 못 하고 있다는 게 이를 증명했다.
결국 마리안은 사울의 뜻에 따랐다.
“좋아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먼저 이야기를 해 드리지요.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 조국이 뒤집어졌어요. 버서커라는 놈들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해 왕국 곳곳을 공격하고 쑥대밭으로 만들었지요.”
“버서커로 인한 피해를 본 건 우리 왕국도 마찬가지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전하나 그쪽 나라의 사정은 아직 나아 보이더군요.”
사울은 마리안의 무례함을 지적하는 대신, 질문을 했다.
“피해가 어느 정도지?”
“솔직히 말하겠어요. 어쩌면 지금쯤 가멜다 왕국은 더 이상 나라가 아니게 되었을지도 몰라요.”
나라가 아니다.
말하자면 국가가 붕괴되었거나, 그에 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뜻이 아닌가.
어느 정도 예상한 사울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정도란 말인가?”
“그래요. 다르센 왕국은 아직 국가 존망을 걱정할 수준은 아닌 것 같지만, 우리 나라는 달라요. 내 짐작이지만 지금쯤 왕국 수도도 버서커에게 공격을 받고 있을 거예요.”
“그렇게 사태가 심각하다는 말인가?”
“좀 더 자세한 정보가 들어오면 확실해지겠지요. 하지만 나와 내 동생이 겪은 일들과 돌아가는 상황을 생각해 보면, 사태는 대단히 심각해요. 그것이 우리가 왕자님의 목을 베는 대신 협상을 하려는 이유이지요.”
말투는 무례하지만, 거짓말이나 수를 쓰는 건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가르시아 남매씩이나 되는 자들이 고작 거짓말로 사울을 어떻게 하려고 여기까지 찾아왔겠는가.
“옳은 말이다. 우리 왕국의 사정도 녹록한 건 아니다. 이래저래 심각한 상황이지.”
“그러니 우리들이 이곳을 찾았고, 또 전하와 의논을 하려는 것이에요.”
“귀순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다르센 왕국에 나와 내 동생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은 셀 수도 없이 많을 텐데요?”
“그대들이 진심으로 귀순을 한다면 내가 신변을 보장해 줄 수 있다.”
사울로서는 예의상 해 본 말이었다.
마리안도 그 사실을 짐작한 듯 웃으며 말했다.
“사양하지요. 이번 일만 처리되면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어요.”
“네 말대로라면 가멜다 왕국은 더 이상 온전치 못할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지요. 나와 내 동생은 다르센 왕국을 멸망시켜 살아있는 전설이 되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우리 남매가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사울은 지금까지 입을 열지 않은 베일에게 물었다.
“네 뜻도 같은가?”
베일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렇소.”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 볼 수 있겠군.”
사울은 에스타와 아미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신관님, 그리고 아미스 신관.”
“네, 전하.”
“상황이 무척 심각해요. 가멜다 왕국에는 큰 변고가 일어난 것 같고, 우리 왕국도 지속적인 공격을 받고 있지요. 그 때문에 두 나라간의 전쟁은 중단된 것이나 다름없고요.”
“알고 있습니다, 전하.”
“당장 대신전에서 카멜 산에 선전 포고를 하라고 강요하진 않겠어요. 하지만 때가 되면 그들과 완전히 손을 끊어야 할 거예요.”
쉽지 않은 선택이겠지만 더 이상 이 문제를 미룰 순 없었다.
때가 되면 대신전이 완전히 카멜 산과 관계를 끊고, 이쪽 편을 들어 준다는 확답이 필요했다.
결국 에스타도, 아미스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하나만 약속해 주십시오.”
“뭔가요, 아미스 신관?”
“우리가 카멜 산과 관계를 끊는 것과 동시에, 귀국이 우릴 도와주십시오. 이 대신전과 우리에 속한 마을의 방위 말입니다.”
사울은 그런 아미스에게 말했다.
“카멜 산에서 대신전뿐만이 아니라 이종족이 사는 마을까지 공격할까요?”
“최악의 경우는 대비해야 하니 말입니다.”
“그렇군요. 좋아요. 지금 내가 데리고 있는 병력을 동원해 대신전과 마을 방위에 나서는 건 물론, 아바마마께 추가 병력 지원도 요청하겠어요. 카멜 산과 싸워야 한다면 이곳 주민들의 협조를 얻는 게 좋으니 아바마마께서도 반대하진 않으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전하.”
“대신 확실히 약속해 줘요. 때가 되면 카멜 산과 모든 관계를 끊겠다고.”
“이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에게 책임을 물을 때까지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울도 수긍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어차피 이종족은 인간과 쉽게 섞이기 어려운 물과 기름 같은 사이다.
이종족이 자신들의 세력을 만들고, 그 세력 속에서 질서 있게 살아가며 인간과 다투지 않고 지낸다면 차라리 그것이 낫다.
그것이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이 카멜 산을 건드리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물론 두 나라가 서로 다투기 바빴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였지만.
“알겠어요. 어차피 카멜 산을 완전히 무너뜨릴 생각은 없으니.”
사울은 이 자리에 참석한 사오니엘을 가리켰다.
“여기 사오니엘처럼 지금 카멜 산의 움직임에 반대하고, 나아가 막으려 하는 이종족도 적지 않을 거예요. 그들의 도움을 받아 일을 해결한 후 그들을 새로운 카멜 산의 수뇌부로 만드는 게 바람직하겠지요.”
사울의 말에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있었다.
“그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베일이었다.
그게 누구든 반대가 나올 줄 사울은 예상하고 있었다.
“쉬운 일은 아니지. 대족장 세네카가 카멜 산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절대적이고, 지배력 또한 대단할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카멜 산에 속한 모두를 죽일 수는 없지 않나?”
“물론이오. 다만 거기 다크 엘프처럼 스스로 넘어온 게 아니라면, 사정을 봐줄 여유 같은 건 없소. 늦기 전에 세네카에게 저항하거나, 하다못해 도망치지도 못한 자들까지 살려 둘 필요는 없지.”
“적이 아닌 자들을 포용하기 위해 노력이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에겐 그럴 여유가 없지 않소?”
윤리는 제쳐 두고 실용적인 측면에서 보면 베일의 말이 마냥 틀린 건 아니다.
옥석을 가리는 건 꽤나 수고롭고 힘이 많이 드는 일이었으니까.
사울은 베일도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득할 필요를 느꼈다.
죄 없는 이종족을 해치는 건 옳지 않다는 논리 같은 건 먹힐 자가 아니니까.
“이미 가멜다 왕국은 붕괴하였거나, 그에 준한 상태라고 하지 않았나? 다르센 왕국의 사정 또한 좋지 않고. 이런데 중립 지대 모두와 전면전을 하는 건 어렵지 않겠나? 어쩌면 카멜 산이 노리는 게 그것일 지도 모르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이오?”
“적이 아닌 자들은 포용해야지. 진정한 적은 카멜 산이고, 적의 숫자는 적을수록 좋은 법이니까.”
베일은 불만스런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별다른 반론을 하지는 못했다.
따지고 보면 베일이나 마리안이나 결코 좋은 처지는 아니었다.
정말 나라가 무너진 수준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잘못 안 것이라 해도 사실상 조국에서 도망친 꼴이 아닌가.
아무리 구국 영웅에 막강한 힘을 가진 실력자들이라 해도 혼자서 살 수는 없는 법.
그나마 말이 통하는 대신전이나 사울 앞에서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결국 베일은 입을 다물었고, 마리안이 다시 말했다.
“전하의 말씀이 옳아요. 저희들도 그 방침에 따르겠습니다.”
“이해해 준다니 고맙군.”
이번에는 세드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힘을 합친다 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소?”
“이미 가멜다 왕국에 대대적인 공격이 가해졌다면, 카멜 산에서도 머잖아 완전히 드러낼 거다. 그 직후 대신전에서는 관계를 끊고, 대신전의 세력을 유지하면서 카멜 산으로 가 적의 숨통을 끊는 전략이 유효하겠지.”
말을 마친 사울은 에스타와 아미스를 바라보았다.
대신전에서 협조해야 고려할 수 있는 전략이었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결국 에스타, 아미스도 수긍했다.
이렇게 대강의 방침이 정해진 가운데, 점점 의견이 모아졌다.
사울과 가르시아 남매.
오랜 적국 사이에 개인적으로도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관계였지만, 그런 것 치고는 이야기의 진전이 빨랐다.
그만큼 지금 사태가 심각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갈 때.
회의장 문이 열리며 고위 성기사 한 명이 들어왔다.
“대신관님! 큰일입니다!”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고서야 왕자와 가르시아 남매가 있는 회의장에 함부로 들어올 순 없다.
하지만 이번에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카토리아와 그 주변 지역이 버서커에게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답니다!”
카토리아, 가멜다 왕국의 수도.
그런 곳이 버서커의 대대적 공격을 받았다면, 그것도 그 소식이 대신전에 직접 전해졌다면 사태가 얼마나 심각할 지는 뻔했다.
이미 언질을 받은 에스타, 아미스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피해는 어느 정도인가?”
“그것이… 소식을 가져 온 사절에 따르면, 카토리아는 함락 직전 상태였다고 합니다.”
가멜다 왕국 수도가 함락 직전이다.
어쩌면 지금쯤, 정말 함락되었을 수도 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
사울을 비롯한 다르센 왕국 측의 인사들 누구도 기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삼백 년 전쟁’을 통틀어 두 나라의 수도가 적국에게 함락된 적은 없다.
그런데 이종족 세력에 의해, 또 버서커라는 예기치 못한 수단으로 인해 한 나라의 수도가 무너질 줄이야.
“최악이군.”
사울의 중얼거림이 모두의 심정을 대변했다.
가멜다 왕국 사람이든, 다르센 왕국 사람이든, 나아가 율렌 섬 대부분이 똑같이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전례가 없는 최악의 위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