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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216화 (216/232)

216화

에스타가 내민 문서는 놀라운 것을 넘어, 충격적이기까지 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바로 가멜다 왕국의 일부 귀족들이 대신전과 ‘협조’를 약조했다는 내용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보통 일이 아닌데, 협조의 내용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바로 지금의 ‘광전사 사태’에 대한 전적인 협조를 약속하고 있었다.

심지어 필요하다면 다르센 왕국과도 협조할 수 있다는 내용까지 있었다.

“…….”

사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고, 머리도 정신없이 돌아갔다.

대체 이런 문서를 어떻게 받아 낼 수 있었을까.

아니, 그 전에 앞서 이 문서가 진짜이기는 한건가.

사울은 문서를 몇 번이나 반복해 읽어 보았다.

그리고 문서에 있는 이름들을 기억할 수 있을 만큼 기억해 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이름도 있었지만, 가멜다 왕국에서도 명망이 높아, 사울 또한 아는 이름도 있었다.

문서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그를 둘러싼 모든 정황들.

나아가 이 문서를 넘겨준 에스타와 아미스에 대한 신뢰도.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나오는 결론은 하나였다.

‘가짜는 아니군.’

이래저래 궁금한 것투성이지만, 일단 이 문서는 진짜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에스타나 아미스가 가짜 문서 따위로 사울을 농락할 사람은 아니며, 다른 음모가 개입할 여지도 없어 보였다.

어설픈 계략에 사울이 속아 넘어가리라는 보장도 없고, 만에 하나 속이는 데 성공한다 해도 사실이 드러난 순간 대신전은 불바다가 될 테니까.

사울은 받은 문서를 일행에게도 보여 주었다.

모두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일행 중 사오니엘만이 문서를 당장 보지 못했다.

이제 와서 그를 못 믿는다기보다는, 이종족인 그에게도 문서를 보여 주려면 허락이 필요했다.

“여기 사오니엘은 나와 함께 활동하고 있어요. 이자에게도 문서를 보여 줘도 될까요?”

세상에 드러나면 그 파급력이 어마어마할 문서.

아마 세상에 존재가 드러난다면, 그것만으로도 여럿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것이다.

“전하께서 저분을 믿으신다면, 보여 주셔도 좋습니다.”

결국 사오니엘까지 문서를 보게 되었고, 역시 경악했다.

그렇게 이 자리의 모두가 문서에 대해 알게 되었고, 사울이 물었다.

“이 문서에 대한 경위를 듣고 싶군요.”

아미스가 대답했다.

“가멜다 왕국의 몇몇 인사들과 접촉하여 그분들의 협조를 받았습니다.”

“그렇군요. 분명 가짜는 아닌 것 같아요. 하지만 어떻게 가멜다 왕국 귀족들에게 이런 문서를 받아 냈는지 설명이 더 필요해요.”

“네. 전하께서 광전사라 부르는 자들에 대해 저도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가만히 지켜보기엔 너무나도 심각한 사태였으니까요.”

“그래서요?”

“두 왕국의 신전을 통해 이번 일을 조사했고, 그 과정에서 가멜다 왕국의 몇몇 귀족과 접촉을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은 가멜다 왕국의 몇몇 귀족이 이 광전사 사태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가멜다 왕국 귀족 몇몇이 지금의 광전사 사태에 관련되어 있다.

가능성은 충분한 이야기다.

가멜다 왕국의 실권자 중 한 명이자 사울의 진짜 원수로 추정되는 안소니 맥캘런 백작도 킬리안 비셔스와 연관이 있지 않은가.

킬리안이 광전사 사태와 연관이 있다면 안소니 역시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 안소니 맥캘런 백작도 이번 일과 관련이 있나요?”

사울의 입에서 안소니의 이름이 나오자 아미스는 흠칫했다.

사울은 그녀의 순간적인 표정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아미스는 사울보다도 안소니에 대한 원한이 더 클 수 있다.

사울이 자신이 죽은 뒤의 상황을 보고 들었다면, 아미스는 직접 상황을 겪은 당사자이니까.

오빠가 죽은 후 아미스는 안소니에게 어떤 배신감을 느꼈을까.

그때 느꼈을 분노와 증오를 사울은 이해하고도 남았다.

어쩌면 이번 일에도 그런 감정적인 동기가 있을지 모른다.

사울은 그 점을 꼭 확인하고 싶었다.

“왜 안소니 백작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나 또한 이번 일에 대해 많은 조사를 했어요, 그중에는 킬리안과 안소니 백작이 관련 있다는 정보가 있었지요. 그리고 킬리안은 이번 광전사 사태와 확실히 연관이 있지요. 가멜다 왕국 귀족 중 이 일에 관련된 자가 있다면, 안소니 백작일 가능성이 높을 테니까요.”

“…전하의 말씀대로입니다.”

“역시 이번 일도 그자와 관련이 있나요?”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번 일을 제보한 자들은 안소니의 정적들이었습니다.”

순수한 선의가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있는 제보라는 것이다.

탓할 일은 아니다.

세상에 순수한 선의라는 건 드문 법이니까.

상대의 의도가 어떻든 제보를 한 측이 이번 일과 무관하고, 안소니 백작 등이 이번 일과 관련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럼 제보자는 믿을 수 있는 자들인가요?”

“최소한 이번 일과는 관련 없는 자들임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럼 안소니 백작에 대해 조사를 해 보아야 하겠군요.”

“그럴 생각입니다. 가멜다 왕국에 있는 신전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정말 안소니 백작이 이번 일과 관련이 있다면… 이단 혐의로 처형할 수 있겠지요.”

처형이라는 말에 아미스의 얼굴이 순간 움찔거렸다.

쭉 얼굴을 보고 대화하는 게 아니라면 알아채기 힘든 반응이었지만, 사울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개인적이고, 또 감정적인 반응이다.

역시 아미스도 안소니 백작에게 감정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분노, 원한, 증오 같은 것이리라.

하지만 아미스는 격정에 휩쓸리는 대신, 조용히 말했다.

“심판은 제 몫이 아닙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가 이단자임에 확실하다면 처형되어야 할 거예요. 그것이 신의 뜻이니까요.”

“신은 자애로운 분이십니다. 그게 누구든 심판보다는 용서를 원하시겠지요. 회개한다면 말입니다.”

아미스의 말에서 가식이나 위선은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소니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일이 그런 안소니를 합법적으로 제거할 절호의 기회라는 것도.

하지만 아미스는 안소니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또 그에 대한 감정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음에도 성직자로서의 모습을 잃지 않았다.

‘정말… 대단하구나.’

사울도 자신의 감정을 접어 두기로 했다.

아무래도 가족의 복수를 하는 건 자신의 역할인 모양이었다.

여동생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을 수 있다면,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그럼 신의 뜻대로 일이 잘 풀리기를 바라야겠군요.”

“그렇습니다.”

냉정을 되찾은 사울이 다시 말했다.

“지금까지 나온 말을 종합해 보면 대신전과 가멜다 왕국의 일부 귀족들이 은밀히 우리에게 협조하고 그 대가로 대놓고 카멜 산과 관계를 끊지는 않는다. 이게 그쪽의 요구인가요?”

“그렇습니다.”

“카멜 산은 영악하고 정보력도 대단한 자들이에요. 이런 연극이 통할까요?”

“언제까지 통할 것이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언젠가는 저들도 알게 되겠지요. 가능하면 그 전에 일이 마무리 지어지길 바랄 뿐입니다.”

“차라리 카멜 산의 모든 행태를 폭로하고, 가급적 빨리 일을 마무리 짓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미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중립 지대의 마을 중 카멜 산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습니다. 대신전에서 관리하고 있는 마을이나 난민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이것이 대신전이 카멜 산을 대놓고 적대하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카멜 산이 폭주하면 대신전이 관리하는, 아니, 중립 지대의 수많은 주민들이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카멜 산이 대신전을 배신자라 규정하고, 대신전과 그 영향력 아래에 있는 마을까지 공격한다면?

끔찍한 사태가 벌어질 건 불을 보듯 뻔했다.

‘역시 저들이 양보할 가능성은 없겠군.’

대신전과 그에 속한 모두의 안위가 달린 일이다.

아미스도, 또 에스타도 대놓고 카멜 산과 적대하는 건 결단코 거부할 것이다.

“좋아요. 그렇다면 대신전이 우릴 어디까지 도울 수 있을지 확실히 말을 해 줘요.”

에스타가 말했다.

“일단 저희는 중립을 지킬 것입니다. 하지만 이 광전사 문제에 대해서, 도울 수 있는 건 최대한 돕겠습니다.”

“어떻게요? 병력을 보태 준다거나, 혹은 대신전의 영토를 빌려주는 건 불가능할 것인데.”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희도 이번 일을 대단히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고, 또 정보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 정보를 전달해 드리고, 또 필요하다면 가멜다 왕국과 다리 역할을 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충분한 도움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도움을 받는 게 받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사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어요.”

“감사합니다, 전하.”

“하지만 내가 직접 군대를 몰고 온 이상 순순히 물러날 순 없어요. 그러면 오히려 카멜 산에서 더더욱 의심을 하겠지요. 지금 왕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곳은 그대로 왕국군이 쓰는 게 좋겠어요. 그래야 왕국군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영토 일부를 내줬다며 카멜 산에 변명할 말이 있을 테니.”

“…알겠습니다.”

“걱정할 건 없어요. 나도, 아바마마도 중립 지대를 점령할 생각은 없으니까. 이번 일이 무사히 끝나면 원상 복구 될 것이에요.”

그렇게 사울은 에스타와 아미스를 대신전으로 돌려보냈다.

사울이 주도한 결정에 특별히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문제는 대신전에서 어디까지 우릴 돕느냐로군.”

사울의 말에 아르멜이 의견을 냈다.

“적극적인 도움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나쁘진 않아. 무엇보다도 네 계획을 실천할 기회를 얻은 것 같으니.”

가멜다 왕국과 협조한다.

정말 쉽지 않을 것 같던 계획이 대신전 덕분에 가능해졌다.

“누님께 너의 계획을 허락하겠다는 허락은 받았다. 이제 대신전과도 함께 움직이면서 가멜다 왕국 쪽과 한번 이야기를 해 봐.”

“알겠습니다.”

사울은 중립 지대가 그려진 지도를 펼치곤 몇몇 곳에 말판을 놓았다.

“현재 왕국군이 점유하고 있는 곳들이에요. 에스타와 아미스도 인정을 했으니 당분간은 왕국의 점유가 이어질 테고, 대외적으로는 우리들이 강제로 ‘점령’한 것으로 알려지겠지요. 지역 주민들은 소수이고, 또 상당수가 이미 피난을 같으니 크게 충돌할 염려는 없겠지요. 카멜 산이 개입하지 않는 한은.”

문제는 카멜 산은 개입을 하고도 남을 자들이라는 점이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중립 지대.

그 어느 곳보다 카멜 산의 입김이 강하게 미치는 곳이 아닌가.

“카멜 산도 지금쯤 우리의 의도를 어느 정도 파악했을 거예요. 어쩌면 대신전과 우리가 은근히 손을 잡았다는 사실까지 짐작하고 있을지 몰라요. 당장 대대적인 대응을 하진 못하겠지만, 경계를 늦추지 말아요.”

“네, 전하.”

* * *

사울은 대신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거점을 만들고, 그곳에서 머물렀다.

대신전, 그리고 가멜다 왕국 쪽과 함께 상황을 파악하고 진상을 밝혀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거점을 만들고 한동안은 별다른 일이 없었다.

약속대로 대신전은 왕국군이 점유한 지역을 돌려 달라는 요구 같은 건 하지 않았고, 지역 주민과 마찰도 없었다.

사울 또한 괜스레 지역 주민을 건드려 마찰이 생기는 일을 막기 위해 왕국군을 엄히 단속했다.

그렇게 하나둘 차근차근 진행되었고, 마침내 눈에 띄는 성과가 있었다.

“가멜다 왕국 측의 인사가 우릴 찾아온다고?”

“네, 전하. ‘안소니 백작 반대파’의 일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도 아시는 사람입니다.”

“누군데?”

“아론 메로빙거입니다.”

아르멜의 보고를 들은 사울은 잠시 생각하다 그 이름을 기억해냈다.

“세드 메로빙거 자작의 아들 말인가?”

“네, 전하.”

세드 메로빙거 자작.

가멜다 왕국의 국경 책임자 중 한 명이자 사울과도 인연이 있는 사람이다.

꽤 능력 있고, 적국 인사치고는 말도 통하는 사람이었다.

그 아들인 아론 또한 범용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분명 메로빙거 자작도 ‘반 안소니 백작’파였지?”

“네. 본래는 중립을 지켰지만 최근에 안소니 백작과 날을 세우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아들이 날 만나러 온다는 건… 뭔가 쓸 만한 이야기를 가지고 올 가능성이 높겠군.”

“네, 전하. 만나시겠습니까?”

“그래야지. 서둘러 만날 수 있도록 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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