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카멜 산이 대단히 은밀하게 움직였으며, 나아가 카멜 산이 아닌 다른 곳에서 ‘광전사’에 관련된 일들을 진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런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그 장소는 분명 중립 지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전시 체제하에 철저한 관리와 감시가 이루어지는 왕국 영토 내부에서는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을 테니까.
다시 한번 중립 지대를 조사하려면, 이전까지와는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온건하게 착한 왕자 노릇을 하면서 시간을 들일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생각을 정한 사울이 말했다.
“다시 한번 중립 지대로 가서 대신전의 협조를 구해 보아야겠어요.”
사울의 말뜻을 알아들은 아르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 대신전으로 가신다는 건…….”
“맞아. 좀 과격하게 움직이겠다는 뜻이지. 과격하게 움직이면서 그동안 쌓아 올린 것을 잃지 않는 건 어렵겠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어.”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사울은 다시 한번 중립 지대로 눈길을 돌렸다.
* * *
마음을 정한 사울은 조나단에게 도움을 청했다.
“다시 한번 중립 지대로 가겠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이 광전사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전쟁도 계속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카멜 산이 지금의 사태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크고, 그렇다면 이 사태를 풀 열쇠 역시 중립 지대 어디엔가 있을 테니까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하지만 대신전에서 네 생각대로 움직여 주겠느냐?”
“움직이게 만들어야지요.”
조나단은 잠시 뜸을 들이다 천천히 물었다.
“힘으로 움직이게 하겠다는 말이냐?”
“당근과 채찍 모두를 쓸 생각입니다. 상황이 상황이니 우선 채찍부터 써야 하겠습니다만.”
“채찍부터 쓴다라.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넌 중립 지대, 특히 대신전과의 친교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나?”
“저도 원해서 하는 일은 아닙니다. 자칫하면 그동안 제가 쌓아 온 모든 게 무너질 테니까요. 하지만 그걸 감수할 만큼 심각한 상황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알았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제르넬 요새에서 많은 병력을 보내 도와주긴 어렵겠구나.”
“가능한 만큼 도와주십시오. 저도 루시아 누님, 그리고 실베스터 형님과 카리스 형님에게도 도움을 청해 보겠습니다.”
왕위 계승권자 1, 2위의 이름까지 나오자 조나단의 눈이 커졌다.
“형님들에게까지 말이냐?”
“네. 그만큼 다급한 상황이니까요. 일단 모을 수 있는 병력과 함께 중립 지대로 간 후, 작전을 시작할 생각입니다.”
“알았다.”
사울은 조나단이 빌려준 병력과 함께 움직였다.
당장 데려갈 수 있는 병력은 많지 않았다.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데다, 광전사 사태 때문에 각지에 비상이 걸린 탓이었다.
하지만 광전사가 이곳저곳에서 날뛰면서 전체적인 전황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두 나라 모두 큰 규모의 전쟁은 피했기 때문이다.
그 틈을 노려 사울은 수백의 병력과 함께 중립 지대로 향했다.
* * *
중립 지대.
다르센 왕국에도, 가멜다 왕국에도 속하지 않은 곳.
왕국이 아닌 대신전과 카멜 산의 질서가 미치는 곳.
사울이 지금의 위치에 오르는 데 크게 도움을 준 곳.
그곳에 사울은 군대와 함께 다시 발을 들였다.
지금까지와는 다르다.
외교보다는 힘을 우선시할 계획이다.
그래서인지 중립 지대에 들어선 순간부터 주민들의 눈빛도 달라진 느낌이었다.
“…….”
왕국군과 함께 중립 지대에 입성한 사울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표정에선 하나같이 두려움이 느껴졌다.
이 시국에 왕자가 병력과 함께 살벌한 분위기로 중립 지대에 발을 들였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안 것이리라.
“바깥에선 전쟁이 한창이라던데, 이젠 이곳까지 군대를 한가득 끌고 왔군.”
“우리와 싸우자는 건가?”
주민들의 불안한 시선을 받으며 중립 지대에 발을 들인 사울은 목적지를 대신전으로 잡았다.
곧바로 대신전에 가진 않았다.
대신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부대를 주둔시킨 후 정보를 모으며, 후속 부대를 기다렸다.
아직 중립 지대에서 광전사가 나타났다는 정보는 없었다.
그렇다면 카멜 산에서는 중립 지대는 건드리지 않고, 두 왕국만 목표로 삼은 것일까.
가능성은 충분했다.
중립 지대는 카멜 산의 근거지다.
중립 지대의 모두가 카멜 산의 뜻을 따를 리는 없지만, 중립 지대까지 쑥대밭으로 만들면 카멜 산도 이래저래 곤란할 것이다.
그렇게 정보를 모으고 분석하는 사이 사울이 이끄는 병력은 점점 불어났다.
루시아는 물론, 실베스터와 카리스도 어느 정도 도움을 준 것이었다.
그렇게 사울 휘하의 병력만 3천 명에 달하게 되었다.
카멜 산을 공격하기는 어렵겠지만, 대신전을 공격해 점령하기에는 충분한 병력이었다.
병력이 어느 정도 모이자 사울은 다시 움직였다.
3천의 병력과 함께 대신전으로 접근했고, 당연히 대신전에서는 중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결국 대신전에서 파견된 사절이 사울을 찾아왔다.
“전하,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사절로 파견된 건 사울과도 안면이 있는 고위 신관이었다.
사울은 옛정 따윈 모른다는 듯, 냉정히 대답했다.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나는 그저 대신전에 일이 있어 찾아가는 것일 뿐이에요.”
“수천의 병력과 함께 말입니까?”
“그대도 알다시피 최근 왕국 안팎에 이런저런 문제들이 있어요. 어느 때보다 내 신변 안전에 신경을 써야 할 때인지라.”
지금 사울이 ‘친절한 왕자’ 노릇을 할 마음이 없음을 깨달은 사절은 말을 바꿨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에게 원하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이 대신관님의 의향인가요?”
“그렇습니다.”
“좋아요. 그럼 바로 말하지요. 내가, 나아가 다르센 왕국이 당장 요구하는 건 하나예요. 대신전이 카멜 산과 모든 관계를 단절하는 것.”
사절의 눈이 커졌다.
“모, 모든 관계를 말입니까?”
“그래요. 확실히 말해 두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 타협은 없어요. 대신전은 선택을 해야 할 거예요. 왕국이냐, 카멜 산이냐.”
“…….”
“가멜다 왕국과의 관계도 단절한다면 환영하겠지만, 거기까지는 요구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카멜 산과는 모든 관계를 끊으세요.”
“그, 그건 지금으로선 말씀드리기 어려운 일입니다.”
사울은 이럴 때를 위해 준비해 둔 문서를 꺼냈다.
“받아요.”
“이, 이게 뭡니까?”
“읽어 봐요. 그럼 왜 내가, 또 왕국이 카멜 산과의 관계를 단절하라 하는지 알 수 있을 테니.”
사울이 넘겨준 문서를 본 사절의 눈이 더욱 커졌다.
“이, 이게 사실입니까?”
“그래요. 광전사라는 존재가 나타나고 왕국 곳곳이 쑥대밭이 되고 있으며 그 모든 일의 배후에는 카멜 산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 내가 직접 보고 겪은 일이에요. 거기에다 카멜 산은 이미 우리 왕국과 가멜다 왕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했지요.”
“그, 그럴수가…….”
“카멜 산이 중립 지대에서, 그리고 대신전에서는 본색을 드러내진 않은 모양이지요. 하지만 중립 지대 밖에서는 이미 그들 때문에 지옥이 펼쳐지고 있어요. 선량했던 주민들이 미친 짐승처럼 날뛰고, 결국 손에 피를 묻힌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지요. 우리 왕국은 물론 가멜다 왕국도 똑같은 일을 겪고 있고요.”
“…….”
“그러니 이 일 만큼은 양보를 할 수 없어요. 그러니 대신관에게 가서 전하세요. 카멜 산과 관계를 단절할 것이냐, 아니면 다르센 왕국과 전쟁을 할 것인가 택하라고. 또한 카멜 산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으면 가멜다 왕국까지도 적으로 돌릴 것이라고.”
사울의 단호한 태도에 사절은 더 말하지 못하고 사울이 준 문서와 함께 돌아갔다.
사절이 돌아간 후 사울은 다시금 군대와 함께 대신전으로 향했다.
왕국령도 아닌 중립 지대에서 수천의 병력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건 이래저래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지만, 사울은 강행했다.
모든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라도 힘을 보여 주고, 상황을 빨리 끝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사울이 이끄는 군대가 대신전 코앞까지 당도했다.
살기등등한 분위기에 대신전 인근의 마을 주민들은 모조리 피난까지 갔다.
그 보고를 들은 사울은 명령했다.
“우린 마을을 점령하러 온 게 아니다. 군사들이 마을에는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도록.”
“네, 전하.”
상황이 상황이라 당근보다 채찍을 먼저 들었지만, 당근을 버린 건 아니다.
군대로 지역을 쓸어버리는 건 물론, 쓸데없이 주민들과 충돌하는 것도 피해야 했다.
피해는 입히지 않으면서 동시에 위압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사울의 목표였다.
결국 대신전도 사울의 위용에 숙이고 들어왔다.
“전하, 대신관님께서 직접 찾아오시겠다고 합니다.”
“시간은 얼마든지 낼 수 있으니 가급적 빨리 만나 뵙고 싶다고 전하세요.”
“네.”
사절이 몇 번 오가며 조율이 끝난 후, 결국 대신관 에스타가 사울을 찾아왔다.
특별한 손님과 함께 말이다.
“아미스 신관이 함께 찾아왔다고?”
“네, 전하.”
아미스의 이름이 언급되자 사울의 일행들의 표정에 불안감이 스쳤다.
그 모습을 본 사울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그만큼 아미스가 자신에게 큰 약점으로 보인다는 뜻이리라.
그래서 에스타는 아미스와 함께 왔을 테고, 주변 사람들도 걱정하는 것일 테다.
“대신관을 모셔라.”
“네, 전하.”
사울은 미리 준비해 둔 회담장에 손님을 받아들였다.
에스타, 아미스, 그리고 몇몇 대신관이 조용히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전하.”
“어서오세요, 대신관.”
첫 인사는 비교적 평화롭게 오갔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긴장된 분위기는 숨길 수 없었다.
사울은 에스타와 아미스를 번갈아 보며 뼈가 있는 말을 던졌다.
“그동안 나는 두 분이 함께 있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어요. 이렇게 두 분이 함께 찾아온 걸 보면,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겠지요?”
에스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전하.”
“말해 보세요.”
“전하의 제안을 고심해 보았습니다. 지금으로선…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런 말이 나올 가능성을 예상한 사울은 강경하게 말했다.
“카멜 산과의 관계를 끊지 않는다는 건 곧 우리 왕국을 상대로 선전 포고를 하는 것과 다름없다 해도요?”
“물론 전쟁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역시 카멜 산과의 관계를 당장 끊기는 어렵습니다.”
사울은 아미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미스 신관.”
아미스가 공손히, 하지만 위축되지 않은 채 말했다.
“네, 전하.”
“대신관이 굳이 그대와 함께 왔다는 건 대신전이 카멜 산과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걸 내게 설득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여요. 내 말이 틀린가요?”
“아니요. 전하의 말씀대로입니다.”
사울은 아미스의 표정에 담긴 굳은 의지를 읽었다.
“그대들도 알겠지만 나는 칼보다는 대화를 선호해요. 그런 내가 왜 군대와 함께 왔을지 생각해 보았나요?”
“물론입니다. 전하께서도, 나아가 왕국에서도 물러설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걸 알면서 그런 통보를 한다는 건… 왕국과 싸우겠다는 뜻인가요?”
아미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대신전은 카멜 산과 관계를 끊을 순 없습니다. 그래서 전하께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무엇을요?”
“저희들을 도와주십시오.”
사울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왕자의 요구는 들어줄 수 없지만 이쪽의 제안은 들어 달라.
당장 사울이 데려온 군대도 막을 힘이 없는 사람 입에서 나오기에는 터무니없는 요구가 아닌가.
“그대들이 내게 협조하지 않는 데 왜 내가 그대들을 도와야 하지요?”
아미스는 대답에 앞서 에스타와 눈길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에스타가 품에서 문서를 꺼냈다.
“이게 무엇인가요?”
“읽어 보십시오.”
사울은 문서를 받아들고 차분히 읽어 나갔다.
‘아니, 이건?’
사울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