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광전사의 존재 자체는 분명하지만 분명한 정체나 목적은 아직 가설 단계다.
가설을 증명하려면 증거가 필요하고 그만큼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생각 끝에 루시아가 말했다.
“네 가설대로라면, 이미 증거를 찾는 일 따윈 필요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 정도의 일을 꾸미고, 실행에 옮/겨놓고(기고도)/ 자기들의 흔적이 남지 않으리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한 가지 뿐이다.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나도 상관없을 만큼 계획이 완성되었고, 실행 단계에 다다랐다는 것.”
일리 있는 말이다.
아니, 상당히 가능성이 높았다.
이 정도의 흉계를 꾸민 자들이라면 분명 대단히 능력 있고 치밀할 터.
그런 자들이 눈에 띄는 형태로 움직였다는 건, 눈에 띄어도 상관없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럼 제 가설을 증명할 증거를 찾기보다는 제 가설이 사실이라 가정하고, 실체를 밝히는 데 전념해야겠군요.”
“그게 좋겠다. 이미 시간은 많지 않다. 어쩌면 이미 무언가 큰 일이 시작되고 있을지 몰라. 두 나라의 전쟁 이상의 큰일이.”
사울도 루시아의 의견에 찬성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시간을 들여 천천히 계획적으로 진행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 그 일은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말끝을 흐리는 사울의 속내를 읽은 루시아가 물었다.
“아이나 말이냐?”
“네. 요즘 아이나는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정중히 대접하고 있다. 물론 감시는 붙여 두었지만.”
“그렇습니까.”
사실상 감금 생활이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루시아를 탓할 수는 없었다.
아이나 정도의 지위와 능력이라면, 반란군과 혐의가 없다 해도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다.
사울이나 루시아가 결백을 믿어 준다 해도 통제하고 감시하는 건 필요했다.
남들의 눈이라는 게 있으니까.
“부탁이 있습니다.”
“뭐냐?”
“아이나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영주와 그 가족들의 소식을 네가 직접 전하겠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나쁜 소식을 전해 주는 역할을 원//해서 맡아// 할 사람은 없다.
사울도 마찬가지였다.
나쁜 소식을 본인의 입으로 읊고 그 소식을 들은 아이나가 어떻게 나올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만큼 부담스러운 역할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스스로 할 필요를 느꼈다.
아이나의 상관, 아니, 동료나 친구로서의 의무라고 할까.
“네 뜻대로 하거라.”
“고마워요, 누님.”
“그리고 그녀를 만나면…….”
* * *
아이나를 만나러 간 도중 사울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의미로는 전장에서 싸우는 것보다도 더 힘든 일이다.
하지만 책임을 지기로 했으면 끝까지 져야 한다.
사울은 마음을 다잡고 아이나의 방 앞으로 갔다.
“아이나를 만나고 싶다.”
“네, 전하.”
아이나의 방문이 열렸다.
아이나는 책을 읽다가 사울을 맞이하고는 활짝 웃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들은 대로 아이나는 나쁜 대접을 받고 있지 않았다.
요새에 몇 되지 않는 손님방에서 시중까지 두었다.
반역자의 딸이라기보다는 귀족 아가씨에 가까운 대접이었다.
그래서인지 표정도 썩 나빠 보이진 않았지만, 근심만은 숨길 수 없다는 듯 웃는 표정에서도 수심이 묻어났다.
“잘 지내나요?”
“네, 왕녀 전하께서 잘 보살펴 주셨습니다.”
“다행이군요.”
아이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께서는 사제타에 출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요. 사제타에 다녀온 길이에요.”
“생각보다 훨씬 빨리 다녀오셨군요.”
“그렇게 되었어요.”
사울은 계속 말을 돌리고 싶다는 유혹을 떨쳐 내곤 말했다.
“아이나, 미안해요.”
이 한마디로 아이나는 사울이 무슨 말을 하려는 지 깨달은 듯 고개를 떨구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셨나요?”
“그렇게 되었어요.”
사울은 사제타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들려주었다.
고개를 떨군 아이나의 어깨가 떨렸다.
하지만 사울이 말을 멈출 때마다, 이야기를 재촉했다.
“계속 들려주십시오.”
잔혹한 이야기지만 진실이라면 피하지 않겠다는 의지에 사울은 자신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을 들려주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아이나는 한참이나 흐느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이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에 눈도 빨갛게 물들었다.
슬픔 때문만이 아니다.
슬픔은 물론, 분노로 핏발이 선 눈이었다.
가족을 잃은 심정은 사울도 이해했다.
자신도 이해한다고 말하며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미안해요, 아이나.”
사울의 사과에 아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것이 아버님의, 오라버니의, 다른 가족들과 가신들의 선택이었다면…….”
“일을 이렇게 만든 자들은 결코 용서할 수 없어요. 어찌 된 일인지 조사하고, 반드시 책임을 묻도록 하겠어요.”
사울의 말에 아이나가 무언가를 결심하곤 입을 열었다.
“전하.”
“이야기해요.”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그대의 가족들을 그렇게 만든 자들을 쫓을 기회를요?”
“네. 물론 아버님 스스로의 선택이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에게 그런 선택을 하게 유혹하거나, 협박을 한 자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그자가 킬리안 비셔스 같은 자들을 조종하여 아버님을 그렇게 만들었을 테지요.”
“그자가 누구이든, 복수를 하고 싶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전하.”
사울은 아이나를 만나러 오기 전 루시아와 나눈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이나는 강한 사람이야. 슬픈 소식이 들어도 무너지기보다는 가족을 그렇게 만든 자들을 단죄하고 싶어 하겠지.’
‘일이 그렇게 된다면 아이나를 다시 제 곁에 두고 싶습니다.’
‘반역자의 딸을 왕자인 네 곁에 두겠다는 말이냐?’
‘그런 건 상관없습니다. 남들의 눈도 신경 안 쓸 겁니다. 아이나에게는 능력이 있고 의지가 있으니 이 일을 처리할 때도 도움이 될 테니까요.’
‘…그렇군, 알았다. 아이나도 자기 가족들이 그렇게 죽은 이상 이 사태를 만든 자에게 원한을 품겠지. 아이나가 네 생각대로 움직인다면, 나도 막지는 않으마.’
확실히 아이나는 예상대로의 반응을 보였다.
피눈물을 흘릴 만큼 슬/프지만(퍼했지만)/, 슬픔에 무너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슬픔을 준 자들에게 그 대가를 치르게 하려 하고 있다.
이를 예상한 사울은 한편으로는 다행이라 여겼고, 또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가족을 잃은 슬픔과 그로 인한 복수심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동시에 복수라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말릴 수는 없다.
누구에게도 그럴 권리는 없고, 특히 사울에게는 더더욱 그럴 권리가 없다.
사울은 조용히 물었다.
“나는 지금부터 이번 일에 대한 조사를 시작할 거예요. 이번 일에 관련 있는 자들을 쫓고, 싸우게 되겠지요. 나와 함께하겠나요?”
아이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허락해 주신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요. 지금부터 그대는 다시 내 곁에 있게 될 거예요.”
“감사합니다. 전하.”
사울은 아이나의 핏발 선 눈이 번득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안타까웠지만, 지금으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서로의 목적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에는.
* * *
사울은 아이나와 함께 다시 루시아를 찾았다.
루시아는 두 사람의 모습만 보고도 상황을 파악했다.
“함께 움직이기로 했느냐?”
“네, 누님.”
루시아는 아이나에게 말했다.
“아이나.”
“네, 전하.”
“개인적으로는 이번 일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하지만 공적으로 보면 이번 일은 반역자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난 것이고, 그대의 가족들도 그에 휩쓸려 목숨을 잃은 것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대는 이번 일과 무관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렇기에 다시 사울과 움직이는 것도 허락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와 사울이 함께 있는 것 자체를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겠지. 앞으로 많은 걸 참고 견뎌야 할 거다.”
사울은 루시아가 나름대로 예의를 갖춤은 물론, 아이나의 상처 입은 마음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 배려가 일절 없었다면, 루시아의 말투는 훨씬 신랄했을 테니까.
아이나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조금도 불쾌한 기색 없이 말했다.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사울은 일 이야기를 꺼냈다.
“누님, 당장 제가 할 일이 없다면 당분간 제 /생각(계획)/대로 움직였으면 합니다.”
“생각해 둔 게 있느냐?”
“누님께서 말씀하셨듯, 이번 일을 계기로 적들은 본격적으로 마각을 드러낼 가능성이 큽니다. 시간을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상황을 수습하기가 어려워지겠지요. 그렇다고 무작정 움직인다고 될 일은 아니니,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가 무언가가 나오는 대로 곧바로 출동하여 해결에 나섰으면 합니다.”
루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같다. 근거 없이 움직일 필요는 없고, 무언가 낌새가 있다면 최대한 빨리 움직일 필요가 있으니까.”
“그럼 저희는 당분간 이곳에서 머무를까요?”
“아니, 제르넬 요새로 가는 게 좋겠다. 나는 이곳에서, 너희는 그곳에서 정보를 수집하거라. 그리고 무언가 찾아내면 즉각 교류를 하며 대책을 마련해 보자꾸나.”
“알겠습니다.”
“상황이 급박하다면 내게 알리기에 앞서 단독 행동도 허가하겠다. 조나단에게도 널 도우라고 일러두지.”
* * *
사울은 복귀한 아이나, 그리고 카스텔, 아르멜과 사오니엘까지 함께 제르넬 요새로 향했다.
“…….”
다시 합류한 아이나는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예전에도 수다스러운 성격은 아니었지만, 말이 없는 성격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사울에게도, 또 다른 사람에게도.
반면에 그런 아이나를 바라보며 수군거리는 자들은 있었다.
“저 아가씨는 어떻게 다시 왕자님 곁에 있는 거야?”
“반란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던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왕국법에 연좌제는 없고, 또 루시아가 아이나의 무죄를 보장해 주었다.
덕분에 대놓고 아이나를 의심하거나 쫓아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많은 자들이 차가운 시선을 보내며 쑥덕거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걱정이 된 사울이 몇 번이나 물어도 아이나의 대답은 비슷했다.
“전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은 것일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사울은 아이나가 무리하고 있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나에게만 신경을 쓸 수는 없었다.
그렇게 사울 일행은 제르넬 요새에 도착했다.
조나단은 이미 언질을 받은 게 있는지 웬만한 준비는 다 끝낸 뒤였다.
“어서 와라. 네 집무실은 마련해 두었으니 그곳을 쓰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라.”
“감사합니다, 형님.”
조나단은 사울 일행 중 아이나가 섞여 있는 것을 보고는 마뜩찮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마뜩찮은 표정만 지을 뿐, 별말을 하지는 않았다.
‘형님이라면 뭐라 한마디 할 법도 한데… 아무래도 누님이 아이나 문제에 대해서도 언질을 해 준 모양이군.’
덕분에 사울은 별문제 없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카멜 산의 불온한 행보.
킬리안 비셔스.
어둠의 세력.
거기에다 정체불명의 ‘광전사’까지.
지금까지 정황을 살펴보면, 이 모든 게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꾸민 자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움직였다면 그만큼 많은 것이 드러날 거야. 뭐든 드러났을 때 빨리 포착하고 움직이는 게 중요해.’
언제, 어떤 형태로 드러날 지는 미지수다.
때문에 사울은 최대한 빠르고 광범위하게 정보를 얻고 분석하는 데 중점을 두기로 하였다.
조나단도 그런 사울에게 적잖은 도움을 주었다.
비록 사울이 원하는 것을 완전히 충족시키진 못했지만, 조나단에게는 제르넬 요새를 관리하고 방비하는 임무도 있었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