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
회의장도 피바다였다.
수많은 자들이 숨이 끊어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그중 한 시신을 본 사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찢겨 나가거나 박살이 난 시체보다는 상태가 온전했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틀림없는 영주 던칸이었다.
인근에는 소영주 칼랜드의 시신도 있었다.
‘고작 이런 최후를 맞으려고 반란 따윌 꾸민 겁니까. 당신의 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까지 남기고.’
묻고 싶은 건 정말 많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사울은 다시 생존자들을 불러내 물었다.
“너희들의 말인즉, 킬리안이 부하들과 함께 영주와 다른 사람들을 죽였다는 말인가?”
“그,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놈은 어디로 갔지?”
“전 모릅니다. 숨어 있는 동안 내내 싸우는 소리와 누가 죽는 소리가 이어졌고… 그다음에는 그저 조용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인가?”
두 생존자 중 상황을 좀 더 잘 파악하고 있던 경비병 생존자는 더 이상 아는 게 없었다.
반면에 하인 생존자가 다른 소리를 했다.
“그러고 보니… 몇몇 사람이 남아 있다가 그대로 쓰러지는 걸 보았습니다.”
“쓰러졌다고?”
“네, 미친 듯 날뛰던 자들이 이내 쓰러졌고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수색 도중 찾아낸 ‘멀쩡한 시체’를 떠올렸다.
즉각 생존자에게 그 시체를 보였고, 생존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들이 맞습니다.”
이 정도면 어젯밤 저택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대충은 파악되었다.
하지만 아직 수수께끼투성이었다.
이 ‘멀쩡한 시체’들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킬리안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련 경우라면 응당 죽은 자보다는 산 자, 곧 킬리안 쪽에 우선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울은 정체불명의 시체들도 대단히 신경 쓰였다.
‘이 시체들은 대체 뭐지? 그리고 킬리안은 어디로 사라진 거지?’
킬리안이 아직 도시를 빠져나가진 못했을 것이다.
왕국군의 절반이 도시를 포위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킬리안은 영악한 놈이다.
놈이라면 분명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냈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불길한 예감이 점점 커지는 가운데, 그를 증명하듯 급보가 도착했다.
“전하, 큰일입니다!”
“무슨 일인가?”
“도시 곳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아군을 습격하고 있습니다!”
전령이 보내온 소식도 놀라웠지만, 사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라는 표현이 더 마음에 걸렸다.
“반란군 잔당이 아니란 말인가?”
“반란군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미 저항하는 반란군은 모두 진압되었고, 나머지는 항복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난동을 부리는 자들은 항복한 반란군과 사제타의 주민들까지 공격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황급히 성안이 잘 보이는 곳으로 이동했다.
멀리서 불길이 피어오르고, 곳곳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습이 잘되고 있었을 것인데.
“난동을 부리는 자들을 제압하라!”
“네, 전하!”
“나도 병력을 이끌고 갈 것이니 준비하라.”
아직 누가 난동을 벌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가운데 사울이 직접 움직이는 건 위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명령을 내린 사울은 저택 조사를 마무리 지은 뒤 저택을 나섰다.
본래는 가까운 부대와 합류하여 상황을 살피고 필요하다면 싸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전투의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
정체불명의 무리가 사울의 앞을 가로막았다.
사울 휘하의 병력만 해도 백 명이 넘었는데, 고작 수십 명이 사울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심지어 제대로 된 무장도 갖추지 않았다.
몽둥이나 칼이라 불러 주기도 민망한 쇠막대기를 든 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맨손이었다.
그 무리의 모습을 본 사울은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어제 본 광전사 무리와 비슷해. 그리고 영주 저택을 쑥대밭으로 만든 자들도…….’
사울은 명령을 내렸다.
“모두 쓸어버려라.”
“네, 전하!”
적들도 일제히 공격해왔다.
사울도 마법 검을 치켜들었고, 병사들도 사울을 둘러싸며 적들에게 맞섰다.
사울은 주변을 살핀 뒤 카스텔에게 명령했다.
“선생님도 적들을 공격하세요.”
“알겠습니다.”
당장 주변에 자신들을 위협하는 다른 적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눈앞의 적들을 빨리 처리하는 게 우선이다.
그렇게 전투가 시작되었다.
사울의 예상대로 적들의 힘은 실로 놀라웠다.
사울의 병사들은 최정예였음에도, 적들을 상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뭐 이런 괴물들이!”
“진형을 유지해라!”
병사들이 진형을 유지하며 안간힘을 쓰는 가운데, 카스텔이 적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적들은 그런 카스텔을 집중 공격 했고, 그 대가로 하나하나 쓰러졌다.
사울도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아군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위력을 조절하면서 세밀하게 날린 마법 하나하나가 적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얼마 후, 사울을 노리고 덮친 적들은 모두 정리되었다.
대부분의 적이 죽었고, 카스텔이 노력하여 포로 몇을 잡았다.
하지만 포로 심문은 불가능했다.
“크르르.”
“크아악!”
짐승, 그것도 흥분한 짐승처럼 날뛰는 ‘광전사’들에게는 어떤 말도 통하지 않았다.
굳게 닫힌 입을 여는 데 전문가인 카스텔도 실패했다.
“전하, 저들의 정신은 이미 붕괴된 상태인 것 같습니다.”
“그걸 되돌릴 방법은 없고요?”
“아마도 그렇습니다.”
“이런…….”
이곳의 상황은 정리되었지만, 다른 곳은 그렇지 못했다.
성 곳곳에서 불길이 피어오르고, 싸움이 계속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성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병력 절반을 추가로 투입하라!”
“알겠습니다.”
명령을 내리면서 사울은 깨달았다.
절반의 병력이 더 투입되면 도시 바깥의 포위망은 대단히 허술해진다.
아마 이 도시 어디엔가 있을 킬리안은 그 틈을 타고 도망칠 것이다.
뻔히 알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어쨌든 반란이 끝나고 반란군의 본거지에 입성한 이상, 뒷수습을 하는 건 왕국군의 몫이었으니까.
* * *
“그쪽 상황도 모두 정리되었나?”
“네. 조금 전 진압이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알았다.”
오전부터 시작된 사제타의 혼란은 날이 저문 뒤에야 간신히 마무리되었다.
왕국군도, 나아가 사제타가 입은 피해도 컸다.
“아군의 피해는?”
“사망자와 큰 부상을 입은 자를 합쳐 약 천 명입니다.”
데리고 온 병력의 5분의 1이 죽거나 크게 다쳤다.
그것도 장기간의 공성전이 아닌, 반란 진압 후 성안의 혼란에 휩쓸린 끝에 나온 피해라는 게 어이없을 뿐이었다.
사울은 사제타의 상황을 수습하면서 ‘광전사’에 대한 것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무엇보다 큰 수수께끼는 광전사의 존재 그 자체.
그리고 어디서 그렇게 많은 광전사들이 튀어나왔냐는 것이었다.
이번 사태를 일으킨 광전사는 어림잡아 수백은 되었다.
도시를 포위한 왕국군도, 도시 안팎을 지키던 반란군도 허수아비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난동꾼들을 미리 인지하지 못했을까.
조사 결과는 뜻밖이었다.
“그 광전사라는 자들 대부분이 사제타 주민들인 것 같습니다.”
아르멜의 보고에 사울이 되물었다.
“틀림없나?”
“네, 주민들의 증언이 적지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믿기 어려운 소리에 사울은 현장에 직접 달려가 보았다.
아르멜의 보고는 사실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한 사제타 주민이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광전사’가 되어 미친 듯 날뛰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광전사들을 심문하는 건 불가능했다.
몇몇 생포한 자들도 모조리 미쳐 날뛰는 통에 대화가 불가능했고, 그나마도 모두들 오래잖아 숨을 거두었다.
살아남은 광전사는 최소한 사울이 알기로는 한 명도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사울은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다른 자들에게도 물어보았다.
하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카스텔도, 정보에 밝은 아르멜도, 사제타 현지 주민들도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심지어 카멜 산에서 온 사오니엘마저도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말 그대로 모두에게 전대미문의 사태였다.
고민 끝에 사울은 결정을 내리고는 휘하 장교와 기사들을 소집했다.
“책임을 물어야 할 영주, 영주 일가, 그의 가신들은 모두 죽었지요?”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모두 죽었습니다.”
“처벌해야 할 자들은 거의 다 죽었지만, 이 반란의 전모는 확실히 밝혀야 해요, 아르멜.”
“네, 전하.”
“네가 나 대신 이곳에 머무르면서 진상 파악과 뒷수습을 맡도록.”
이미 사울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아르멜은 반대 없이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모두들 잘 들어요. 그대들과 병력 대부분은 이곳에 남아 아르멜과 함께 반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또 수습하는 일을 맡아 주어야겠어요.”
“그럼 전하께선 어찌하실 겁니까?”
“나는 루시아 누님에게 이 사실을 직접 보고하고 대책을 논의해야겠어요.”
반란을 진압하고 뒷수습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사울은 이 사태를 만든 ‘광전사’에 대해 알아보는 게 더 급선무라 여겼다.
이 사태에 킬리안, 나아가 카멜 산이 개입된 게 분명했으니까.
사태의 엄중함을 알고 있던 장교들도 반대하지 않았다.
* * *
사제타를 떠나 별문제 없이 페로 요새에 도착한 사울은 곧바로 루시아를 만나러 갔다.
루시아는 여전히 바쁜 듯했지만, 사울이 찾아왔다는 소식에 곧바로 시간을 냈다.
“어서 와라, 사울.”
“네, 누님.”
루시아는 아직 사제타의 상황에 대해 듣지 못했다.
전령을 보내는 대신, 사울이 전령만큼 빨리 달려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루시아는 급박하게 달려온 사울의 모습과 곁에 있는 카스텔, 사오니엘의 모습만 보고도 많은 것을 짐작했다.
“네가 이렇게 급히 달려왔다는 건 아주 좋은 소식이 있거나, 반대로 좋지 못한 소식이 있다는 뜻이겠지. 지금은 후자인 것 같구나.”
“그렇습니다, 누님.”
사울은 사제타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했다.
“…이렇게 된 겁니다.”
“그런가. 네 임무를 다하지 못했구나.”
루시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반란을 진압하고, 최대한 피해를 줄이고 또 많은 정보를 얻는 게 사울의 임무였다.
그런데 그중 피해를 줄이는 데 실패했다.
“죄송합니다.”
“그래. 죄송하게 생각해야지. 그리고 이번 일을 확실히 알아보고, 해결하는 것으로 책임을 져야 할 테고.”
“물론 책임을 질 생각입니다.”
사울은 이 자리에 없는 아르멜이 작성한 보고서를 넘겨주었다.
봉인을 뜯고 아르멜의 보고서를 다 읽은 루시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었다.
“나로서도 예상치 못한 일인데.”
“네. 누구도 예상치 못했습니다. 저도, 선생님도, 아르멜도, 그리고 사오니엘마저도.”
루시아는 찡그린 표정 그대로 사오니엘에게 물었다.
“정말 이번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건가?”
“그렇소. 태어나서 지금까지 보고 들은 것을 모두 떠올려 봤지만, 그런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소.”
“그렇다는 말이지.”
사울이 말했다.
“저는 사오니엘의 말을 믿습니다. 하지만 이 ‘광전사’는 분명 카멜 산과 연관이 있을 겁니다.”
“그렇겠지. 이미 킬리안과 카멜 산의 연관성은 부인할 수 없는 수준이니까. 또 킬리안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반란 사건의 흑막 노릇을 직접 하기는 어려울 테고.”
“이곳에 오면서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 어쩌면 이번 반란은 일종의 시험 무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울의 말뜻을 알아들은 루시아가 안경을 고쳐 썼다.
“이번 반란 자체가 그 ‘광전사’라는 자들을 시험하기 위한 무대였다는 뜻이냐?”
“아직 증거는 없지만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봅니다. 영주는 카멜 산에게 속았거나, 혹은 강압적인 수단으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겠지요. 제 생각이 맞다면 아마 카멜 산의 전적인 도움을 바랐을 것입니다. 그 카멜 산에서는 철저히 자신들을 이용하기 위해 이번 반란을 꾸몄다는 사실도 모른 채로 말입니다.”
“네 말대로 가능성은 충분해 보이는구나. 하지만 증거가 없다면 그저 가설일 뿐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가설을 증명할 증거를 찾고 싶습니다. 그를 위해서는 누님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