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외부 세력, 특히 율렌 섬 외부의 대륙 세력의 개입.
가능성이 없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울은 가능성이 높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형님 말씀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율렌 섬의 전쟁에 직접 개입하기에는 대륙은 너무 멀지 않은가요?”
“그야 그렇지. 하지만 모를 일이다. 대륙에도 강한 나라는 여럿 있고, 그중 어떤 나라든 이 전쟁에 개입하거나, 나아가 율렌 섬을 정복하려 할 수도 있지 않느냐.”
“가능성은 있겠습니다만.”
말로는 맞장구 쳐 주었지만, 사울의 생각은 달랐다.
확실히 대륙에도 강한 국가와 세력이 많고, 개중에는 율렌 섬에 손을 뻗치고 싶어 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수백 년 동안 그 어떤 대륙의 국가나 세력도 율렌 섬을 정복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율렌 섬의 두 나라는 대륙의 강대국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국력을 자랑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다투던 두 국가가 힘을 합쳐 외부의 침입자에 맞서 싸우면 바다 건너의 세력이 아무리 막강해도 당해 내기 어려웠다.
그것이 지난 수백 년간 대륙에서 율렌 섬의 전쟁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고, 대신 전쟁을 틈타 이익을 취하는 방향으로 움직인 이유였다.
‘대륙의 누군가가 카멜 산과 손잡았을 가능성도 없진 않아. 하지만 그것만 믿고 카멜 산에서 이런 일을 벌이진 않았을 거야. 필요한 때에 제대로 도움을 주리라는 보장도 없는 대륙 쪽의 도움만 믿고 카멜 산에서 전쟁에 개입한다? 세네카가 그렇게 생각 없는 짓을 할 리는 없어.’
사울의 눈에 세네카는 지나칠만큼 조심스럽고, 동시에 지혜로운 자였다.
그 ‘지나칠만큼 조심스러운 모습’이 거짓이었다면, 그만큼 영악한 자라는 뜻이다.
그런 자가 율렌 섬 바깥의 도움만을 믿고 이런 일을 벌일까.
그럴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생각을 정리한 사울은 조나단에게 말했다.
“형님도 조심하십시오. 카멜 산이 이 요새나 형님을 목표로 삼았을지도 모릅니다.”
“오냐, 너도 조심하거라.”
* * *
전쟁.
그것이 킬리안이 악마 토끼풀 사업에서 성공한 가장 큰 이유였다.
전쟁의 여파로 헤어나기 어려운 고통 받는 자들은 수없이 많았고, 그들에게 잠깐의 천국을 맛보여 주는 악마 토끼풀은 모든 것을 팔아 손에 넣을 가치가 있는 물건으로 취급되었으니까.
한때는 사울의 활약으로 사업이 몰락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의 전쟁이 재개되며 킬리안의 사업도 활기를 되찾았다.
곳곳이 전쟁터가 된 두 왕국은 물론, 중립 지대에도 악마 토끼풀을 찾는 자들이 크게 늘어난 덕분이었다.
킬리안의 후원자인 가멜다 왕국의 안소니 백작은 그러한 킬리안의 행동을 불편해했다.
킬리안이 뿌리는 마약은 적국 다르센 왕국은 물론, 가멜다 왕국에도 널리 퍼졌으니까.
이에 백작은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내 명령했다.
‘백작님의 명령이십니다. 굳이 악마 토끼풀 장사를 하려면, 적국이나 중립 지대에서만 하십시오.’
‘알았다.’
몇 번이나 명령을 받았음에도 킬리안은 이를 듣지 않았다.
결국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백작은 최후의 통첩을 했다.
“…….”
백작의 편지를 다 읽은 킬리안이 씩 웃었다.
마른 얼굴에 번득이는 눈동자에는 살기인지 광기인지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렀다.
백작의 사절은 순간 두려웠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백작의 ‘최후의 통첩’을 받고 온 몸이다.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해 적지 않은 병력을 데려왔고, 사절 역시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실력자였다.
“그래, 이 편지의 내용이 곧 백작님의 뜻인가?”
“그렇소.”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백작님은 지금 당장 내가 하는 모든 일을 그만두라고 하시는군. 그리고 직접 수도로 올라와 해명하거나, 아니면 또 다른 명령을 기다리라고?”
“그 말대로요.”
킬리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백작님이 이런 명령을 한 이유를 알고 싶군.”
“몰라서 묻는 거요?”
“그래, 모르겠다.”
사절은 빈정거리는 듯한 킬리안의 말투에 불안감을 느꼈지만, 최악의 사태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신이 적국뿐만이 아니라 우리 왕국에도 악마 토끼풀을 팔고 있지 않소?”
“그랬지. 무슨 문제 있나? 사지 않으려는 사람에게 억지로 떠넘긴 게 아니라, 그저 원하는 사람에게 팔았을 뿐인데.”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당신의 악마 토끼풀 때문에 아래는 백성부터, 위로는 귀족까지 얼마나 많은 중독자가 생기고 있는데!”
사절의 반론에 킬리안의 미소가 더더욱 짙어졌다.
“내 뒤를 봐주고, 내게 이런 저런 일을 시킨 백작님이 이제 와서 그런 것을 따질 줄은 몰랐는데.”
“이 모든 게 당신이 선을 넘어서 생긴 일 아니오. 당신이 선을 넘지만 않았으면 백작님께서도 이렇게 하시진 않았을 거요.”
“그래서 백작님이 날 죽인다던가?”
사절은 안소니 백작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보냈는지 잘 알았다.
물론 이래저래 골칫덩이인 킬리안을 죽이고 싶어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무작정 킬리안을 죽이려다 실패하면 말할 것도 없고, 성공해도 문제다.
킬리안에게 충성하는 부하들이 적지 않고, 그들이 난동을 피우거나 쓸데없는 소리를 떠들고 다니면 백작까지 곤란해질 수 있으니까.
지금 백작이 원하는 건 ‘통제’였다.
킬리안을 통제하고, 어떻게든 이 전쟁에서 요긴한 무기로 쓸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이 사실을 떠올린 사절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요.”
“사실인가?”
“그렇소. 이제라도 선을 넘는 행위를 그만두고, 백작님의 명령에 따르시오. 그럼 백작님께서는 여전히 당신들을 살펴 줄 것이오. 내게도 그리 말씀하셨소.”
킬리안은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안타깝게 되었군.”
“그게 무슨 말이오?”
“지금부터 널 죽일 생각인데 정작 백작님 쪽에선 날 죽일 마음이 없었다니.”
“뭐요?”
본능적으로 사절은 차고 있던 검을 빼들려 했다.
킬리안이 더 빨랐다.
그가 휘두른 손에서 흘러나간 실이 거미줄처럼 사절을 덮쳤다.
별다른 준비도 없이 갑작스레 퍼부은 공격이었지만 그 위력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기습을 당한 사절은 검도 제대로 뽑지 못한 채로 거미줄 같은 날카로운 실에 휘감기고 말았다.
“으아악!”
온몸을 파고드는 실의 고통에 사절이 비명을 내질렀다.
사절과 함께 온 병력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창칼을 뽑고, 마법을 준비하며 자신들을 지키려 하였다.
하지만 킬리안 쪽에서는 이미 사절들을 쓸어버릴 준비를 끝낸 뒤였다.
지금껏 킬리안 주변에서 별다른 살기도 없이 가만히 있던 자들이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절이 데려온 병력보다 먼저 창칼을 뽑고, 마법을 시전하며 병력들을 제압해 나갔다.
아니, 제압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으아악!”
사절이 데려온 병력들이 무참히 죽어 나갔다.
제대로 저항하기는커녕 대부분이 창칼 한 번 휘둘러 보지 못하고 선제공격에 목숨을 잃었다.
어찌어찌 저항하는 자들의 운명도 다르지 않았다.
기습을 당한 데다가, 실력도 킬리안과 함께 있던 자들 쪽이 훨씬 위였다.
오래잖아 수십 명에 달하던 정예 병력은 수십 구의 시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실에 휘감긴 채 그 광경을 지켜본 사절은 경악하여 외쳤다.
“킬리안! 제정신이오?”
“물론. 나야 항상 제정신이지.”
“이러고도 당신이 무사할 것 같소?”
“내가 왜 무사하지 못하리라 생각하지?”
“다, 당연한 것 아니오? 백작님이 이 사실을 알면 당신은 물론 당신의 부하들까지 한 놈도 남김없이 박살을 내 버리실 거요!”
“그럼 내가 먼저 백작을 박살 내면 되겠군.”
“뭐라…….”
사절은 킬리안이 그저 미친 소리를 하는 게 아님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들을 공격한 자들의 면모가 심상치 않았다.
공격받기 전에는 깨닫지 못했는데, 공격을 받고 나니 유독 이종족이 많았다.
칼립소라는 다크엘프를 비롯하여 킬리안 아래에 이종족이 여럿 있다는 건 사절도 잘 알았다.
하지만 지금 자신들을 덮친 자들은 대부분이 이종족이었고, 실력 역시 탁월했다.
모두들 킬리안의 부하라고 보기에는 무언가 부자연스러웠다.
“대체 이게 무슨…….”
“저승길 선물로 알려 주지. 나의 새로운 친구들이다. 카멜 산에서 왔지.”
“뭐라고?”
킬리안의 친절함은 여기까지였다.
더 말할 건 없다는 듯, 킬리안은 실을 조종하는 손에 힘을 주었다.
사절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산 채로 몇 토막이 나 흩어졌다.
“…….”
비참하게 죽은 사절과 그의 병력들을 바라보던 킬리안은 여전히 웃으며 자신의 새 친구들을 돌아보았다.
카멜 산에서 온 이종족 병력들.
이미 실력은 시험해 보았고, 방금 전 활약으로 다시 확인했다.
“역시 대족장이 직접 골라 보낸 친구들은 다르군.”
카멜 산에서 온 병력 중 우두머리인 엘프가 말했다.
“대족장께서는 당신의 협조에 감사를 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이런 일을 함께 하려면 무엇보다도 신뢰와 우정이 중요하니까.”
희번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킬리안의 모습에 엘프도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신뢰와 우정이라는 표현이 이보다 설득력 없을 수도 있을까.
하지만 엘프는 속내를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럼 저희는 계속 당신을 돕겠습니다.”
“그래야지. 당분간 할 일도, 죽일 놈도 많을 테니까. 너희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은신처를 마련해 두었다.”
“감사합니다.”
카멜 산에서 온 병력을 내보낸 킬리안은 자신의 진짜 부하들에게 물었다.
“저놈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항상 책사 노릇을 하는 제온이 먼저 대답했다.
“어쩔 수 없이 편을 갈아타기는 했습니다만, 저자들 역시 믿기 어렵습니다.”
“그렇지.”
제온이 말한 대로 킬리안은 어쩔 수 없이 편을 갈아탔다.
안소니 백작이나 가르시아 남매 같은 거물들이 킬리안을 곱지 않게 보는 상황에서, 때마침 카멜 산이 손을 내밀었다.
카멜 산의 계획을 들은 킬리안은 그들과 손잡기로 했고, 조직 내에서도 반발하는 자는 없었다.
킬리안이 결정한 사항일 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이치에 맞았으니까.
문제는 카멜 산을 믿을 수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저놈들도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지 않겠어요? 아마 저놈들도 우릴 이용할 생각이겠지요. 그리고 이용 가치가 사라지면 두목은 물론 우리까지 모조리 없애려 들 테고.”
칼립소의 말투는 과격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또한 킬리안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하는 의견이기도 했다.
“맞다. 대족장 놈도 날 꼭두각시로 삼아 부리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제거하려 들겠지.”
제온이 다른 의견을 냈다.
“하지만 카멜 산에서 당장 우릴 건드리진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두 왕국을 적대하려는 놈들이 우리까지 건드리려 할 리는 없지.”
문득 칼립소가 말을 돌렸다.
“과연 그들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요?”
“그들이 무엇을 노리는 지 궁금한 것이냐?”
“네, 두목.”
“그들이 말하지 않았나. 이 율렌 섬을 카멜 산과 그를 따르는 자들만의 세상으로 만들겠다고.”
“그랬지요. 우리 조직 역시 지금이라도 카멜 산을 따르면 그 세상의 일부를 나누어 주겠다고 했고요.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요?”
칼립소와는 달리 킬리안은 여유로웠다.
“어차피 세상은 무수한 도박의 연속인 법. 난 계속 이겨 왔고, 이번에도 이길 거다. 상대가 누구이든 말이다.”
킬리안은 이미 마음을 정했다.
그의 조직에 속한 자라면 누구든 그 뜻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마음을 정한 킬리안은 곧바로 행동을 시작했다.
안소니 백작 등 가멜다 왕국 세력과의 모든 관계를 끊었고, 오히려 그들의 공격에 나섰다.
나아가 다르센 왕국에도 공세를 퍼붓기로 했다.
창칼이나 마법이 아닌, 악마 토끼풀을 무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