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사울이 공관에 머문 지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전쟁은 계속되었고,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상황이 급박해지면 언제든 사울이나 카스텔이 차출될 수도 있었지만, 아직 사태가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다.
다르센 왕국이 힘든 것만큼이나 가멜다 왕국도 힘들었다.
특히 가멜다 왕국은 자국 영토에서 예상 밖의 소요가 발생했고, 가르시아 남매가 나서 이를 진압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덕분에 사울은 당장은 공관 복구에 전념할 수 있었다.
사울의 생각대로 공관 ‘확장’ 인력과 자금을 ‘복구’로 돌린 건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카멜 산의 정보를 얻는 방법이었다.
사울은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루시아에게 편지로 도움을 요청했고, 곧 답장이 도착했다.
‘이번 부탁은 좀 위험하구나. 너도 알다시피 카멜 산의 정보는 정말 얻기 어렵다. 왕국 정보부에서도 몇 년간의 공작 끝에 딱 한 명의 정보원만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일로 네가 그 정보원을 활용한다면, 당분간 그를 통해 다른 정보를 얻기는 어렵겠지. 그 또한 자기 목숨이 소중할 테고, 널 위해 위험한 일을 한 뒤에는 몸을 사려야 할 테니까.’
“…….”
사울은 진지하게 루시아의 편지를 읽어 나갔다.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할 자신이 있다면, 내가 손을 써서 그 정보원을 활용할 수 있게 해 주겠다. 하지만 일이 잘못된다면 그 책임은 져야 할 게다. 시간이 많이 없을 테니 즉각 답변을 해 다오.’
루시아가 보낸 편지를 다 읽은 사울은 즉시 답장을 썼다.
생각이라면 많이 했으니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바로 누님께 보내도록.”
“알겠습니다.”
아르멜은 사울의 생각을 알아챈 듯, 더 말하지 않고 편지를 보냈다.
사울의 편지는 루시아에게 보내졌고 오래잖아 답장이 도착했다.
왕국에서 힘들게 만든 카멜 산의 첩자와 접선할 방법과 함께.
“…….”
왕국에서 어렵게 만든 첩자이니 만큼 접선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접선부터가 위험을 각오해야 했다.
사울은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잠시 다녀올 곳이 있으니 공관 복구는 계속 진행하도록 해요.”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사울은 카스텔, 아이나, 아르멜까지 세 명만 데리고 공관을 떠났다.
몇 번 ‘투구 전사’로 활동했을 때처럼 투구나 복면으로 일행은 물론, 스스로의 정체까지 숨긴 채로 이동했다.
스스로의 정체와 행선지를 철저히 숨기고 이동하면 왕자를 노린 자객을 만날 가능성은 줄어든다.
그 대신 소수의 인원을 노리는 몬스터나 도적 따윌 만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실제로 사울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몬스터의 공격을 몇 번 받았다.
하지만 작정하고 덤벼드는 적군이나 자객들보다는 상대하기 쉬웠다.
그렇게 몇 번의 사소한 다툼 끝에 사울 일행은 첩자와의 접선지에 도착했다.
“저기 동굴이 보입니다.”
카스텔의 보고에 사울이 명령했다.
“동굴 근처에 표식이 있는지 살펴보세요.”
“네, 전하.”
첩자가 이미 도착했다면, 동굴 근처에 자그마한 표식이 있을 것이다.
모르고 보면 아무것도 눈치채기 어렵겠지만 알고 자세히 봐야 눈치챌 만큼 자그마한 표식 말이다.
동굴 입구를 살핀 카스텔이 돌아와 보고했다.
“표식이 있었습니다.”
“동굴 안 상황은?”
“마나를 다루는 자 한 명이 우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쪽도 선생님도 존재를 눈치챘을까요?”
“그럴 겁니다.”
“좋아요. 들어가지요.”
사전에 이쪽에서 몇 명이 함께 찾아가겠다고 했다.
네 명이 함께 들어간다고 저쪽에서 새삼 경계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사울 일행은 천천히 동굴로 들어갔다.
분명 먼저 온 손님이 있을 것임에도 동굴은 칠흑처럼 깜깜했다.
횃불이나 모닥불을 피우거나, 마법으로 빛을 만들지도 않았다.
그만큼 은밀히 행동하고 싶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사울은 마법으로 동굴 안을 밝혔다.
저쪽도 이쪽의 움직임을 알고 있다면 당당히 행동해야 상대를 안심시킬 수 있었다.
“…….”
침묵 속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어 동굴 깊은 곳에서 자그마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산의 주인은 누구인가?”
사울은 곧바로 대답했다.
“뱀 여섯 마리와 드래곤 한 마리.”
말은 안 되는 질답이지만, 정답이기도 했다.
암구호를 확인한 첩자가 동굴 깊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복면과 긴 옷, 장갑으로 얼굴은 물론 몸까지 완전히 가린 자.
하지만 사울은 눈앞의 상대가 ‘엘프 남성’이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엘프 특유의 체형과 옷깃 사이로 목이 튀어나온 게 보였기 때문이다.
“만나서 반갑소.”
사울의 인사에 상대도 화답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겠군.”
“그쪽에 비하면 고생이라 할 것도 없었소.”
피차 정체를 모르는 게 좋기에 사울은 자신의 말투까지 바꾸었다.
마나의 기척까지 가능한 숨겼기에 저 첩자는 상대방이 사울이나 카스텔 같은 거물이라는 사실은 짐작도 못 할 것이었다.
“뒤를 밟은 자 같은 건 없었지?”
“물론이오.”
“왕국에서 연락은 받았다. 이번에는 정말 위험한 일을 시키더군.”
푸념하면서 첩자는 품에서 자그마한 원통형의 물체를 건네주었다.
통을 받은 순간, 사울은 두 가지 사실을 알았다.
하나는 이 원통형의 물체 속에 돌돌 말린 문서 같은 것이 있다는 것.
또 하나는 통에 마법이 걸려 있다는 것.
“무슨 마법이 걸려 있는 것이오?”
“봉인 마법이다.”
아마 봉인을 제대로 풀지 않고 통을 열려 하면 내용물은 그 자리에서 사라질 것이다.
카멜 산에 속했으면서 왕국 첩자 노릇을 하는 자다운 치밀함이 아닐 수 없었다.
“봉인은 이 자리에서 풀어도 되겠소?”
“그렇게 해라. 읽고 나면 내게 궁금해질 것도 있을 테니.”
첩자가 마법 주문을 외었고, 곧 봉인은 풀렸다.
사울이 원통을 열자 글자가 빽빽하게 쓰인 종이 몇 장이 나왔다.
사울은 일행과 함께 종이 내용을 읽어 나갔다.
종이에는 카멜 산이 다르센 왕국 공격을 주도하거나, 가담했는가에 관련된 객관적인 정보와 첩자 나름대로의 해석까지 달려 있었다.
종이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첩자의 결론은 분명했다.
‘카멜 산이 다르센 왕국을 공격했을 가능성이 높다.’
“…….”
침묵이 흘렀다.
사울도, 다른 일행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가능성은 적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왕자의 몸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정체를 숨기고 직접 첩자를 만나러 왔다.
어느 정도 예상된 결과이지만, 그래도 막상 그 결과를 마주하니 충격적인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울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조용히 물었다.
“당신은 카멜 산이 다르센 왕국을 공격했다고 보고 있군. 특히 최근 외교 공관과 사울 왕자를 공격한 게 카멜 산의 소행이라고.”
“그래. 목숨 걸고 알아낸 정보들이다. 최근 다르센 왕국이 공격을 받은 날짜, 공격한 자들의 머릿수… 그것들과 카멜 산의 최정예 병력이 움직인 날짜가 겹쳐. 또 몇 가지 정황도 더 있고.”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시오. 카멜 산 전체가 다르센 왕국을 적대하는 거요? 아니면 카멜 산에 속한 몇몇이 왕국을 적대하고 또 공격한 거요?”
첩자의 대답은 그나마 낙관적이었다.
“아마 후자일 거다.”
“카멜 산 모두가 다르센 왕국을 적대하는 건 아니란 말이오?”
“당연하지.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그깟 돈 때문이 아니야. 카멜 산 윗선에 위험한 불장난을 하려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난 그 불장난을 막고 싶고.”
불행 중 다행이었다.
카멜 산의 누군가가, 그것도 높은 지위의 누군가가 다르센 왕국을 공격했지만 그것이 카멜 산 전체의 뜻은 아닌 모양이다.
카멜 산이 합심하여 다르센 왕국을 적대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왜 카멜 산의 ‘일부’가 다르센 왕국을 공격한 것이오?”
“엄밀히 말하자면 다르센 왕국만을 공격한 건 아닌 것 같더군.”
“뭐요?”
“소식 못 들었나? 가멜다 왕국 영토에서 몬스터들이 난동을 피우고 있다고.”
확실히 그런 정보가 있었다.
가멜다 왕국 영토 곳곳에서 몬스터들이 난동을 피우는 등 영토 곳곳에서 문제가 발생했고, 이를 빨리 진압하기 위해 가르시아 남매가 나섰다던가.
“그게 카멜 산의 소행이라는 말이오?”
“아마도.”
“대체 카멜 산의 누가 그런 무모한 일을 벌이고 있다는 말이오?”
카멜 산이 다르센 왕국만 공격한다면, 가멜다 왕국 편을 들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카멜 산의 누군가가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을 함께 공격한다?
이건 카멜 산을 멸망시키려 작정한 짓이 아닌가.
“그것까지는 몰라. 내가 아는 건 카멜 산에서도 높은 위치에 있는 누군가가 이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과 카멜 산의 정예 병력이 움직였다는 것 정도야.”
사울은 질문을 바꾸었다.
“그럼 이번 일이 피닉스나 어둠의 세력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소?”
“…….”
첩자는 고개를 저었다.
“거기까진 몰라. 지금 말한 정보를 알아내는 데도 난 목숨을 걸었다.”
“그렇군. 알겠소.”
“나는 이만 돌아가야 해. 오래 자리를 비우면 의심하는 자가 있을 테니.”
“알겠소.”
첩자는 동굴 안에 숨겨 둔 말을 타고 먼저 빠져나갔다.
사울 일행만 남은 가운데, 사울이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성과가 있군요. 그렇다고 기뻐할 소식은 아니지만.”
아이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체 누구의 소행일까요?”
“그건 지금으로선 알기 어렵지요. 어쩌면 정말 세네카가 이 모든 일을 꾸민 것일 수도 있어요.”
“대족장이…….”
“그렇게까지 나쁜 상황은 아니길 바랄 뿐이에요.”
위험을 무릅쓰고 첩자를 만난 보람은 충분했다.
남은 건 첩자가 카멜 산까지 무사히 돌아가서 계속 유용한 정보를 보내오는 것뿐.
사울 일행도 슬슬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런데 문득 카스텔이 입을 열었다.
“그가 돌아오고 있습니다.”
“우리 쪽 첩자 말인가요?”
“네.”
사울도 얼마 지나지 않아 첩자의 움직임을 읽었다.
무슨 일인지 자신의 몸에 흐르는 마나를 숨기기는커녕, 오히려 흩뿌리며 똑바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첩자가 이유 없이 이런 멍청한 짓을 할 리는 없다.
지금 상황에서 이런 짓을 할 이유라면…….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는 건가.’
사울은 먼저 카스텔에게 명령했다.
“선생님이 먼저 가서 살피고 오세요.”
카스텔이 물었다.
“문제가 있으면 그를 없앨까요?”
첩자를 무작정 돕는 건 어리석은 일일 수 있다.
첩자의 존재가 드러나고, 다르센 왕국이 첩자를 운용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면 뒷수습이 어려울 테니까.
차라리 없애 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무작정 없애는 것 역시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도울 수 있으면 돕고, 돕기 어려우면 처리하세요.”
“네.”
카스텔이 앞서 달려가고, 사울은 다른 일행에게도 명령했다.
“서둘러 떠날 준비를 해요.”
“네!”
무작정 싸우는 건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여긴 왕국 영토도 아니고, 근처에 사울을 도울 만한 아군도 없다.
적이 강하다면 일단 후퇴하는 게 현명하다.
사울 일행 모두가 말에 오른 가운데, 카스텔이 돌아왔다.
역시 말에 탄 첩자도 함께였다.
“어떻게 된 건가요?”
“추격자입니다.”
“알겠어요. 빨리 후퇴해요.”
첩자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내가 앞장서지!”
사울 일행 모두 이 지역은 처음 와 보았다.
그에 비해 첩자는 길을 잘 아는 것 같았다.
사울은 카스텔에게 눈짓을 했고, 카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픈 연극으로 일행을 속이는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에 사울은 첩자의 말을 받아들였다.
“앞장서시오.”
“서둘러! 이쪽이다!”
곧 사울 일행, 그리고 첩자는 한 덩이가 되어 달렸다.
“놓치지 마라!”
“없애라!”
추격자들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추격을 단념하지도 않았다.
언뜻 보아도 머릿수는 이쪽의 몇 배는 되었다.
느껴지는 마나로 보건대 전원 마나를 다루는 실력자였고, 개중에는 상당한 실력자도 있는 것 같았다.
‘차라리 한바탕 싸워서 적들의 기선을 제압하는 게 나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