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하지만 사울은 자신의 말을 주워 담으려 하지 않았다.
“가능성은 충분해요. 중립 지대에서 이 정도의 일을, 이렇게 치밀하게 할 수 있는 자는 결코 많지 않을 거예요, 그중 가장 강하고 유능하며, 나아가 중립 지대에 대해 잘 아는 건 카멜 산이니까요.”
아르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멜 산이 전하나 공관을 공격했다면, 대체 범인은 누구일까요?”
“후보는 여럿이지. 오스펠이라는 드워프를 기억해?”
“네, 스스로 피닉스를 만들었거나, 만든 데 깊이 관여한 것으로 의심되는 드워프이지요.”
“그는 피닉스를 만들기 전 카멜 산에서 꽤 중책을 맡은 자였다고 했어.”
“그렇습니다.”
“그런 자가 카멜 산에 또 없으리란 법은 없지.”
카멜 산의 고위직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자가 있었다.
국왕마저도 우습게 볼 수 없는 자.
카멜 산의 지도자이자 개인의 실력으로도 율렌 섬의 최강자 중 한 명이 분명한 거물.
“대족장 세네카…….”
아이나가 중얼거린 이름은 모두의 심정을 대변한 것이었다.
세네카가 이번 일에 관여하였을까?
물론 그렇다는 증거도, 정황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사울의 가정이 맞다면, 그 또한 용의자다.
카멜 산의 다른 모두가 용의자이듯 말이다.
다른 자들이 이 일에 관여했다면, 그래도 수습이 가능한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카멜 산 스스로 수습할 수도 있을 것이고, 사울이나 왕국에서 돕거나 압력을 가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세네카가 이 일에 관여했다면?
상상도 하기 싫은 시나리오다.
카멜 산이 다르센 왕국을 적대한다는 뜻 아닌가.
어쩌면 카멜 산이 가멜다 왕국과 몰래 손을 잡았을 수도 있고 말이다.
모두들 충격에 빠진 가운데, 아르멜이 말했다.
“왕녀 전하께 지금까지 알아낸 것, 그리고 전하의 생각을 모두 말씀드리는 게 어떻습니까?”
“누님께?”
“네, 전하.”
“증거 하나 없이 이렇게 큰일을 누님께 보고하자고?”
아르멜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 증거를 왕녀 전하와 함께 찾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확실히 그랬다.
사울 역시 중립 지대에 대해서 잘 알고, 정보력도 뒤떨어지진 않는다.
하지만 왕국 정보부를 주무르는 루시아의 정보력 역시 대단하다.
사울과 다른 시각에서, 다른 방향으로 접근하여 새로운 증거 등을 확보할 가능성도 있다.
결국 사울도 수긍했다.
“그럼 누님께 빚을 져야겠군.”
“왕녀 전하께서는 빚이라 생각하지 않으실 겁니다.”
“내가 편지를 써 줄 테니 네가 보내도록 해.”
“알겠습니다. 전하.”
“그 일은 누님께 도움을 청한다 해도, 뒷수습은 내가 해야 할 텐데…….”
공관은 거의 파괴되어 당장은 쓰기 어렵다고 들었다.
사망한 자들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해 현장에 내버려 두었고, 부상자들은 무리를 감수하고 대신전이나 그 인근으로 후송되는 판국이다.
“지금은 공관을 버릴 수밖에 없겠군.”
“안타깝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조만간 왕국에서 공관 확장을 위해 보낸 인력과 자금이 도착할 거야. 그 인력과 자금을 공관 확장이 아닌 수습과 재건용으로 써야겠어.”
이 정도의 일은 사울 혼자 진행해도 문제없다.
지금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한 사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상자 절반이 인근 마을에 후송되었다고 했지?”
“네, 전하.”
“한번 가 봐야겠어.”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단순히 나라를 위해 싸우다 다친 사람들 병문안을 가겠다는 게 아니다.
참사를 겪은 사람들을 만나 보고 직접 이야기를 들으며 정보를 더 모을 필요가 있었다.
또 대신전 코앞에 위치한 마을이라 불온한 무리가 공격해 올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그렇게 사울은 대신전을 나서려 했다.
그런데 그 도중, 반갑지 않은 손님과 마주쳤다.
“안녕하십니까, 사울 전하?”
가멜다 왕국의 애슬론 백작.
백작은 미소를 지으며 사울의 속을 긁었다.
“듣자 하니 참으로 큰일을 겪으셨더군요.”
“…그렇소.”
“그러게 조심하셨어야지요. 이 중립 지대는 귀국의 영토가 아니니 말입니다.”
“충고 고맙군. 난 바빠서 이만 실례하겠소.”
백작의 미소를 받으며 지나친 사울은 다시금 확신했다.
‘분명 저자는 뜻밖의 행운을 즐기고 있어.’
다르센 왕국의 불행은 가멜다 왕국의 행복이다.
그리고 그 행복은 ‘뜻밖의 행운’이 분명해 보였다.
‘설마 정말 카멜 산에서…….’
아직 증거는 하나도 없었지만, 사울의 의심은 점점 확신이 되어 갔다.
* * *
대신전 인근 마을에 도착한 사울은 부상자들이 있는 곳을 찾았다.
부상자들은 마을 안에 마련된 임시 처소에 머무르고 있었다.
임시 처소치고는 환경이 나쁘지 않았다.
환자들은 집이 아닌 천막 아래 간이침대에 누웠지만, 깨끗한 옷과 나쁘지 않은 담요가 지급되었다.
크지도 않은 마을에서 몇십 명은 되는 부상자를 위한 물자가 미리 준비했을 리 없다.
“대신전이 지원을 해 주었나.”
“네, 전하. 소식을 듣기 무섭게 대신전에서 물자를 보내왔습니다.”
“고마운 일이군.”
사울은 대신전에서 순수한 선의로 지원을 한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진 일이니, 도의적인 책임을 지는 것이리라.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든 필요할 때 지원을 한 건 분명 감사할 일이다.
나아가 이번 대신전의 지원은 ‘도의적인 책임’ 수준을 넘어섰다.
“약과 붕대, 담요 모두 부족해지지 않도록 신경을 써 주세요.”
“네, 신관님.”
“부상자들을 노린 공격이 또 있을지 모르니 왕국 병사들과 함께 주변의 순찰도 철저히 하세요.”
마치 왕국 사람처럼 부상자와 주변 관리에 열심히 일하는 신관은 다름 아닌 아미스였다.
심지어 아미스는 사울보다도 먼저 현장에 도착하여 환자들을 돕고 있었다.
이런저런 지시를 마친 아미스는 직접 환자들을 돌보기도 했다.
중환자에게는 치료 마법을, 가벼운 환자들은 직접 붕대를 갈아 주는 솜씨는 한두 번 해 본 게 아니었다.
“모, 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상처 치료도 제때 되었고, 필요한 약도 있어요. 꼭 쾌차하실 수 있을 겁니다.”
부상을 입은 병사의 붕대를 감아 주고 격려하는 아미스의 표정에는 한 점의 가식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다르센 왕국을 도와 빚을 만들겠다는 생각 따윈 조금도 하고 있지 않은 것이리라.
“신관.”
“전하, 오셨습니까.”
예를 표한 아미스에게 사울은 치하의 말을 건넸다.
“그대가 나보다도 먼저 아군을 돌보고 있군요.”
“도움이 필요한 자라면 누구든 돕는 게 제가 할 일이니까요.”
“감사를 표해요.”
“별말씀을. 제 도움이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사울은 부상자들의 상황을 보고 받았다.
지금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수준의 지원은 모두 받았다.
분명 아미스가 적절히 손을 써 준 것이리라.
“이번에는 저 신관에게 감사해야겠습니다.”
아르멜의 말에 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사울은 한 천막을 찾았다.
외교 공관에서도 가장 중요한 지위에 있던 외교관이 누워 있는 곳.
이번 참사에 휘말려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지만, 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했다.
“전하.”
침대에 누워 있던 외교관이 사울을 보고는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힘들면 누워 있도록 해요.”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외교관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것만으로도 고통이 찾아온 듯 눈살을 찌푸렸지만, 견딜 만은 한 모양이었다.
사울은 주변에 눈짓을 했다.
곧 천막 안팎에는 사울과 일행, 그리고 외교관만 남았다.
그리고 카스텔이 마법을 써 천막 안의 대화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그 모습에 외교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정말 그대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나요?”
“무슨 변명을 하겠습니까. 어찌 되었든 제가 책임지던 공관이 파괴되었습니다. 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도의적으로는 그렇지요. 하지만 나는 그대의 잘못을 물을 생각은 없어요. 내가 있었어도 막기는 쉽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대에게는 이 일을 수습할 의무가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하겠습니다.”
사울은 그런 외교관에게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내가 왜 마법까지 쓰면서 그대와 이야기를 나누려는지 알겠나요?”
“이 천막에 있는 사람 외에는 누구도 믿지 않겠다는 뜻 아니십니까?”
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지금 옆 천막에서 누워 있는 부상자가 적의 첩자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대는 아바마마, 루시아 누님, 그리고 나도 인정한 사람이니 믿을 수 있고, 지금부터 할 은밀한 이야기를 함부로 떠들 만큼 입이 가벼운 사람도 아닐 거예요. 설마 내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겠지요?”
기대에 부응할 자신이 없으면 지금 거절해야 한다.
뒤늦게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경력, 어쩌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외교관은 굳게 다짐하며 말했다.
“네, 전하. 명심하겠습니다.”
“좋아요. 우선 그대가 보고 들은 것. 그대의 의견까지 모두 말해 봐요.”
외교관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외교 공관을 책임지는 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겪은 일 모두를 이야기했다.
확실히 외교 공관의 책임자답게 이야기는 자세했고, 또 전문적이었다.
직접 보고 들은 것들도, 또 외교관 개인의 생각들도 정보의 질이 높았다.
하지만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는 없었다.
이미 사울이 알고 있거나 짐작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무의미한 정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지금 사울에게 필요한 건 그 이상이다.
“그렇군요.”
“…….”
“지금부터 내가 할 이야기는 극비 중의 극비예요. 섣부른 넘겨짚기일 수도 있고, 나아가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우는 것일 수도 있지요. 그렇기에 이 이야기는 결코 새어 나가선 안 돼요.”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지난번 나에 대한 공격, 그리고 이번 공관의 공격에 카멜 산이 관련된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어요.”
외교관이 눈을 부릅떴다.
“카, 카멜 산이?”
“그래요.”
사울이 왕자가 아니라 부하였다면 당장이라도 무슨 헛소리냐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그만큼 사울의 말은 외교관으로서는 황당한 것이었다.
중립 지대, 아니, 율렌 섬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전하, 혹시 카멜 산이 이 일에 관련되었다는 증거를 찾아내셨습니까?”
“지금까지는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했어요.”
“그런데 카멜 산이 이 일에 관련되었다는 건…….”
“섣부른 추측이지요.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이 천막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털어놓은 거예요. 아직 이 이야기를 공론화할 수 있을 만큼 준비되지 않았으니까.”
외교관은 아무래도 사울의 말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전하, 외람되지만 제 생각에는 가능성이 극히 낮은 것 같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에요. 현재 카멜 산은 중립을 유지하고 있으며, 또 외부 간섭도 받기 싫어하고, 스스로 간섭하기도 싫어하는 고립주의적인 성형을 띄고 있지요. 카멜 산의 지도자인 대족장 세네카의 뜻이 그러하며, 카멜 산 주민들도 대부분 그에 동조하고 있고요.”
“말씀대로입니다. 물론 카멜 산에 불온한 뜻을 품은 무리가 없을 리 없지만, 소수의 불온 세력만으로 이 정도 일을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 소수의 불온 세력이 카멜 산의 수뇌부일 수도 있고, 심지어 대족장일 수도 있다. 그것이 내 생각이에요.”
사울은 외교관에게 그동안 자신과 일행이 생각하고 의논한 것들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외교관은 사울의 말에 곧바로 동조하지는 않았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대가 의심하는 건 당연해요. 나 또한 내가 잘못 짚은 것으로 결론 나더라도 전혀 놀라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내 가설이 맞을 가능성이 만에 하나라도 있다면 조사할 필요는 있을 거예요. 나 자신도 공격을 받았고, 외교 공관까지 큰 피해를 입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