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사울은 대신전과 카멜 산 쪽에 책임이 있음을 확실히 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사전에 의논이나 통보도 없이 갑작스럽게 난민과 탈영병 수용을 결정해 사태를 혼란케 한 건 대신전이었으니까.
고민하던 에스타가 천천히 말했다.
“전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같은 때에 공관 규모를 늘리는 건 자칫 새로운 분란을 일으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중립 지대에 있는 외교 공관은 다르센 왕국 것뿐입니다. 지금 우리 왕국에서 공관 규모를 늘린다고 가멜다 왕국이 어떻게 손을 쓸 수는 없을 테고요.”
“…….”
“설령 문제가 생겨도 어디까지나 우리 왕국의 외교 공관에서 벌어질 겁니다. 가멜다 왕국이 이 일로 수작을 부려도, 목표는 어디까지나 우리 왕국일 테니까요.”
“으음.”
여전히 에스타가 주저하자 사울은 다시 말했다.
“이것은 폐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귀국의 국왕 폐하께서?”
“네, 폐하께서도 이 일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계십니다.”
왕자 사울의 의견도 가벼이 볼 수 없다.
하물며 국왕 마렌의 의견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다르센 왕국 국왕이라도 중립 지대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번 일의 원인은 대신전에 있다.
대신전이 시작한 난민 및 탈영병 수용 정책으로 다르센 왕국 처지가 어려워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외교 공관 규모를 늘릴 필요가 있다.
명분도 강력했고, 또 왕자와 국왕이 함께 요구하고 있다.
결국 에스타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신관.”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십시오.”
“무엇입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저와 아미스는 난민이나 탈영병 문제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겁니다. 저희들의 뜻을 바꿀 생각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사울도 알고 있었다.
설득을 해도 협박을 해도 에스타나 아미스의 뜻을 바꿀 수 없음을.
아바마마가 나선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두 사람의 뜻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약속하지요.”
“또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귀국에서 외교 공관을 확장하는 건, 어디까지나 귀국의 뜻이 따라 귀국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저희는 그 일을 도울 수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피를 흘려도 왕국이 흘릴 테니까요.”
사울은 할 말을 다 했다.
하지만 에스타 쪽은 할 말이 남은 모양이었다.
“전하.”
“말씀하세요.”
“아미스 신관 말입니다.”
“네.”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최근 아미스 신관이 좀 달라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 달라진 것 같습니다. 전하를 만난 이후로 말입니다.”
사울도 알고 있었다.
아미스가 자신에게서 죽은 오라버니를 보고 있다는 것을.
물론 아미스가 사울의 전생을 꿰뚫어 보았을 가능성은 없다.
그저 생면부지의 왕자가 오라버니와 닮은 것처럼 느끼고 있을 뿐이지만.
‘그 아이도 다른 신관이 이상하게 생각할 만큼 동요하고 있는 건가.’
도와주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지금 사울 입장에서 어설프게 도와주려 하다간 일이 더 커질 수 있다.
이 일 만큼은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모를 일입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진 그녀를 만난 적도 없으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에스타와 대화를 마친 사울은 자신과 함께 돌아와 대신전에 머무르고 있던 외교관을 불렀다.
“대신관이 공관 확대를 받아들였어요.”
“알겠습니다. 저 역시 따로 소식을 받았습니다. 국왕 폐하께서 공관 확장을 허락하셨고, 준비가 끝나는 대로 인력과 자금 지원을 해 주신답니다.”
“그 외에 필요한 건 없나요?”
“지금은 괜찮습니다. 갑작스레 누군가 우리 공관을 습격하거나 하지 않는 한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철저히 대비하도록 해요.”
“네, 전하.”
* * *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외교관과 대화를 나눈 지 불과 하루도 지나기 전에 다급한 소식이 들어왔다.
“전하!”
“무슨 일이지?”
“공관이 적의 습격을 받았답니다!”
좋은 소식을 가지고 대신전을 떠날 예정이던 외교관의 다급한 보고에 사울은 적잖이 놀랐다.
“대체 누가 감히?”
“아직 적의 정체는 파악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공관의 피해는?”
질문을 받은 외교관은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건물은 대부분 파괴되었고, 아군 병력과 외교관의 절반이 사망했답니다.”
경악스러운 소식이었다.
한 번의 공격에 아군의 절반이 사망하고, 건물이 대부분 파괴되었다니.
이 정도면 왕국 외교 공관이 말 그대로 박살 난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사울은 당장 외교 공관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아이나가 사울의 심기를 읽고 말렸다.
“전하, 직접 가시는 건 위험합니다.”
“…그렇겠지요.”
외교 공관은 결코 허술하게 관리되지 않았다.
전쟁이 재개된 후 경비 병력도 보강되었고, 또 확장을 앞두고 쓸데없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경계를 더욱 철저히 했다.
그런 외교 공관을 박살 낼 수 있는 적이라면, 사울에게도 위해를 끼칠 수 있다.
보고하던 외교관도 사울을 말렸다.
“조만간 좀 더 자세한 소식이 전달될 겁니다. 일단 안전한 곳에서 상황을 알아본 뒤 움직이시는 게…….”
“하는 수 없군요.”
* * *
다르센 왕국 외교 공관 파괴.
이 소식은 사울은 물론 대신전, 나아가 중립 지대 모두를 뒤흔들었다.
사울의 활약으로 중립 지대에서 가멜다 왕국의 군사 세력은 거의 일소되었다.
지금 대신전에서 머무르는 애슬론 백작도 군인이라기보다는 외교관에 가까운 인물이었고, 데리고 있는 전력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누가 다르센 왕국의 외교 공관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는 말인가.
일단 대신전에서 대기하던 사울은 새로운 손님들을 맞아들였다.
공관에서 급히 달려온 병사들과 외교관이었다.
크게 다친 자는 없었다.
그러나 모두들 몸 곳곳에 상처를 입었고, 갑옷과 무기도 흙먼지에 더럽혀져 엉망이었다.
전장 경험이 많은 사울은 그들이 전장의 생존자임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너희들은 그 전투를 직접 겪었다고 들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지?”
사울의 질문에 병사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저, 적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적이 누구인지 알고 있거나, 짐작 가는 부분이 있나?”
외교 공관에 있는 자들은 일반 병사라도 정보에 밝은 편이었다.
하지만 정보에 밝아도, 또 전투에 참여했어도 아는 게 거의 없다.
“죄송합니다. 짐작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사울은 외교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외교관들도 대답은 비슷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아군이 입은 피해는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가요?”
“아군 병력과 외교관들을 합쳐 죽은 자들이 절반, 살아남은 자들의 절반이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럼 적들은?”
“저희들도 맞서 싸웠고, 적 여럿을 베었습니다. 하지만 아군 전력으로 그들을 당해 내긴 어려웠습니다. 때마침 대신전의 병력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대신전에서는 외교 공관의 감시를 위해 일단의 병력을 파견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감시를 위한 병력이 공관의 전멸을 막아 준 셈이었다.
“대신전의 병력은 피해를 당하지 않았나요?”
“네. 적들은 대신전 병력을 알아보고 후퇴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철저히 다르센 왕국 쪽만을 노렸다는 뜻이군. 적의 정체는 불명이고.”
외교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 생각에는 전하를 습격한 자들과 한패가 아닐까 합니다.”
“근거가 있나요?”
“물증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오기 전 적들의 시체와 소지품들을 점검해 보았습니다. 한데 적의 정체를 알 만한 어떠한 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깔끔한 일 처리 솜씨는 아무래도…….”
“얼마 전 날 공격한 자들과 같다?”
“네, 전하.”
증거가 전혀 없는 게 정황 증거라는 것이 있다.
빈약한 논리일 수도 있지만, 사울은 가능성이 낮지 않다 여겼다.
“좀 더 조사를 해 봐야겠군요. 이만 물러가 쉬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전하.”
사과는 받아 주었지만, 사울은 외교관이나 병사들의 잘못이 아님을 알았다.
공관에서는 사울이 떠난 뒤에도 방비에 힘을 기울였다.
단지 적의 공격이 공관의 방비를 압도했을 뿐이다.
병사와 외교관들을 돌려보낸 사울은 함께 보고를 들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정리해 보면 누군가 외교 공관을 공격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혔고, 얼마 전 나를 공격한 자와 동일한 세력일 가능성도 있어요. 나 개인적으론 그 가능성이 결코 낮지 않다고 생각하고요. 문제는 그자들의 정체가 대체 무엇이냐는 것이에요.”
운을 뗀 사울은 자신의 생각을 추가로 밝혔다.
“먼저 떠오르는 건 가멜다 왕국이에요. 날 공격한 것이든, 외교 공관을 습격한 것이든 동기는 충분하고도 남으니. 하지만 난 가멜다 왕국의 소행일 확률이 낮다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그들이 중립 지대에서 이 정도의 일을 벌일 힘이 있었다면, 내가 자신들의 공관을 무너뜨리고 활동하도록 내버려 두진 않았을 테니까.”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제1 용의자라 할 수 있는 가멜다 왕국의 소행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의 소행이라는 말인가.
“누구의 소행인지 짐작하십니까?”
아르멜의 질문에 사울은 천천히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중립 지대에 대해 잘 알고, 또 세력도 갖춰진 있는 자의 소행이라는 것이죠.”
중립 지대에 대해 잘 알고, 세력도 있는 자들.
아이나는 그 정의에 가장 잘 맞는 자들을 언급했다.
“피닉스…….”
피닉스.
중립 지대에서 주로 활동하며, ‘이종족의 세상’을 꿈꾸는 자들.
이미 현실에 존재하는 이종족을 위한 세상인 카멜 산에서 한발 더 나아간 자들.
사울 역시 그들과 부딪친 적이 있고, 나아가 그들을 용의자로 보았다.
“내 생각에도 피닉스가 가장 유력해 보이기는 해요. 카멜 산의 추격에도 정체를 드러내지 않을 만큼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중립 지대에서 적지 않은 세력을 갖추고 있지요. 이 중립 지대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피닉스가 아니라면 카멜 산밖에는…….”
문득 사울의 말이 멈췄다.
사울의 침묵에 모두들 무언가 깨달았다.
“카멜 산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카스텔의 질문에 사울은 한참이나 생각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요?”
“…….”
사울의 말 대로였다.
가능성은 있다.
이에 이종족에 대해 잘 아는 아이나가 반론했다.
“제가 아는 카멜 산은 이런 과격한 행동을 할 곳이 아닙니다만.”
“맞아요. 하지만 카멜 산 전체가 움직일 필요는 없어요. 아니, 카멜 산 전체가 힘을 합쳐 다르센 왕국을 공격하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그런 자살 행위를 꾸민다 해도, 반발하는 자들이 적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일부라면 어떨까요?”
“일부…….”
“그래요. 카멜 산의 일부가 날 공격하고 외교 공관도 공격했다. 나아가 카멜 산의 일부가 피닉스와 연결되어 있고, 어쩌면 피닉스 그 자체일지 모른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 아닌가요?”
확실히 가능성은 있었다.
하지만 함부로 입 밖에 내기엔 너무나도 위험한 말이었다.
카멜 산은 사실상 이종족을 위한 작은 세계다.
그 정도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한발 더 나아가려는 자들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심지어 그런 자들이 피닉스와 어둠의 세력, 킬리안 등과 관련되어 있거나 내통하고 있을 가능성도 일찍부터 생각했다.
그런데 사울은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카멜 산에 속한 누군가가 불온 세력에 도움을 주는 것을 넘어, 카멜 산의 일부가 스스로 불온 세력이 되었을지 모른다고.
나아가 그들이 자신을 공격했고, 또 왕국 외교 공관을 파괴한 것일 수 있다고.
“…….”
침묵이 흘렀다.
말을 꺼낸 사울 스스로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만큼 충격적인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