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외교관들 모두 사울의 말을 수긍했다.
사울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문가이며, 나아가 아미스와 에스타 모두와 직접 교류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루시아가 따로 방침을 정해 주지는 않은 모양이다.
방침을 사울이 정해 준다면, 그 결과에 따른 공과 역시 사울이 책임져야 하리라.
책임을 피하는 방법도 있지만, 사울은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중립 지대 문제는 다른 누구보다 자신이 주도하여 처리하고 싶었다.
나아가 중립 지대 문제에서 만큼은 다르센 왕국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고 싶었다.
“지금 나는 가멜다 왕국, 피닉스, 어둠의 세력, 킬리안을 함께 엮어서 조사하고 있어요. 그러니 그대들은 대신전과 카멜 산 쪽을 집중해서 조사하도록 해요.”
“카멜 산까지 말입니까?”
“그래요. 분명 대신전과 카멜 산에도 허튼 짓을 하거나 허튼 짓을 하려는 자와 연결 고리를 가진 자가 있겠지요. 하지만 그 문제를 내가 직접 파고 들기는 어려워요.”
외교관들도 사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사울은 대신전과 카멜 산의 친구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 사울이 직접 대신전이나 카멜 산의 뒷조사를 하는 건 어렵다.
이럴 땐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어도 사울이 관계를 부인할 수 있는 다른 누군가가 나서야 한다.
“네, 최대한 전하께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부탁해요. 그리고…….”
이런 명령이라면 대신전에서도 지시할 수 있었다.
사울이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외교 공관까지 온 목적은 따로 있었다.
“며칠 정도 이곳에 머무르면서 직접 주변을 살펴볼까 해요.”
“전하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예상대로 외교관들은 반대했다.
“위험합니다.”
“정 조사를 하시려면 공관에서 머무르십시오. 공관 안이라면 안전합니다.”
“자객의 공격까지 받지 않으셨습니까?”
사울도 외교관들의 말이 틀린 게 아님을 알았다.
그리고 지금 같은 때에 스스로 미끼 노릇을 할 생각은 없었다.
“나도 알아요. 최대한 주의해서 움직일 생각이에요. 그리고 이건 그대들과도 관련된 일이에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외교 공관의 규모를 두 배로 키울 생각이에요.”
외교관들은 하나같이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사울은 이 계획을 누님에게도 밝히지 않았다.
측근들하고만 의논했고, 그 외의 사람에게는 처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공관 규모를 키워서 말 그대로 진짜 ‘공관’으로 만들 생각이에요. 전쟁 중에 건물을 크게 지을 순 없겠지만, 인력과 병력을 좀 더 보충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요.”
한 외교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야… 가능하다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전하 아시다시피 지금 이 공관의 규모를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지금 공관 규모를, 그것도 두 배로 키울 수 있겠습니까?”
“맞아요. 명분이 없다면 어려운 일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명분이 있으니까요.”
“……!”
외교관들 모두가 깨달았다.
명분은 이미 차고 넘친다는 것을.
그동안 중립 지대는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 사이에서 말 그대로 ‘중립’을 지켰다.
두 나라가 불안한 평화를 누리든, 전쟁을 벌이든 철두철미하게 중립을 지키는 게 중립 지대, 정확히 말하자면 대신전과 카멜 산의 굳건한 명분이었다.
율렌 섬의 상당 지역을 중립 지대라는 이름으로 뚝 떼어 대신전과 카멜 산이 자치권을 행사하는 명분 말이다.
하지만 이번 일로 그 명분은 크게 손상되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대신전과 카멜 산 모두 이번 전쟁에 개입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옳으신 말씀입니다. 확실히 저들이 난민이나 탈영병을 받아들이기로 한 이상, 우리들도 그것을 이유 삼아 공관 규모를 키울 수 있겠군요.”
“난민이나 탈영병 문제에 직접 개입하지는 못해도, 상황을 감시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댈 수도 있을 테고요.”
“확실히 좋은 기회입니다. 방해가 될 만한 가멜다 왕국 세력도 치워 버렸으니 이보다 좋은 기회가 없을 겁니다.”
외교관들이 말을 알아듣자 사울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물론 이 문제는 아바마마께 허락을 받아야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이미 아바마마께 부탁은 했고, 아마 받아들이실 거예요. 이 중립지대에서 세력을 넓힐 기회이니까.”
자신이 온 진짜 목적을 밝힌 사울은 이어 외교관들이 혹할 이야기도 꺼냈다.
“물론 그대들은 지금까지 고생한 데 대한 보답을 받을 거예요. 그동안 이곳에서 머물며 일을 잘했으니, 조직이 확장되면 그대들은 새로 온 사람들의 윗자리에 앉게 되겠지요.”
때론 조직이 커진다는 건, 기존 조직원들에게 악재가 될 수 있다.
전생에 하급 장교로서 이곳저곳에 치인 바 있던 사울이라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중립 지대의 외교 공관에서 일하던 자들은 결코 무능하거나 쓸모없지 않았다.
어려운 환경에서 고생하면서 꽤 일을 잘한 자들이다.
때론 굴러온 돌로 박힌 돌을 빼내야 할 때도 있지만,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사울의 이런 말에 외교관들은 반색했다.
조직 규모가 커지고, 자신들의 지위도 높아진다.
이 좋은 기회를 마다할 사람은 없는 듯했다.
“그대들과 함께 주변 지역을 돌아보고 싶어요. 공관을 확장하려면 얼마나 인력이 필요할지, 또 어디까지 영역을 둘지도 파악해야 하고. 또 이곳 상황과 정보들을 직접 검토도 해야 하고. 할 일이 참 많아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전하의 안위가 최우선입니다. 몸조심하십시오.”
“고마워요.”
신이 난 외교관들이 나가고, 아르멜에 이어 아이나와 카스텔도 사울을 보러 왔다.
사울은 먼저 카스텔에게 말했다.
“이야기는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선생님이나 아르멜 잘못은 아니에요. 나도 예상 못 한 일이니.”
“두 번 같은 일을 당하진 않을 겁니다. 다시 자객이 온다면 붙잡은 즉시 정신을 산산조각 내서 아는 것을 모두 불게 하겠습니다.”
“그래요.”
잔인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다.
무서울 만큼 철두철미하게 움직이는 적을 상대하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사울은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외교관들에게 내 계획을 밝혔어요.”
아이나가 물었다.
“반대하는 자는 없었습니까?”
“모두들 찬성해 주었어요. 말했듯 이곳에서 지금까지 고생한 외교관들도 대우해 줄 생각이니까요.”
“다행입니다.”
“이왕 중립 지대의 일을 맡았으니, 가능한 많은 일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싶어요. 모두들 계속 날 도와주세요.”
“네, 전하.”
사울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복잡한 마음은 다 정리되지 않았다.
하지만 왕자 사울로서, 할 일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사울의 선택이었다.
* * *
사울에게 자객을 보낸 자가 한 번의 공격만을 준비했는지, 두 번째 공격도 준비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공관을 나선 사울 일행을 다시 공격한 자는 없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하여 외교관들, 그리고 공관을 지키던 병력 일부와 함께 움직였다.
그것만으로도 웬만한 자객, 아니, 군대도 우습게 볼 수 없는 철통 경계 태세가 갖춰졌다.
자객들이 다시 사울을 노리고 쳐들어와도 개죽음을 당할 만큼.
그렇게 사울은 무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외교 공관 규모를 두 배로 넓혀야 한다는 게 사울의 생각이었다.
그만큼 땅도, 인력도 최소 두 배가 필요했다.
“땅은 충분하군요.”
“네, 전하. 본래 버려지다시피 한 땅을 개척하여 만든 곳이라 땅은 충분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다시피 한 것이니 그대들의 고생이 많았겠군요.”
“왕국을 위해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마땅히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것도 쉽지 않은 법이지요.”
사울의 칭찬에 외교관들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더더욱 사울의 비위를 맞추려 안간힘을 썼다.
아부를 하고 비위를 맞추는 게 부담스러울 정도였지만, 사울은 참기로 했다.
이 또한 아랫사람의 생존 방식이며, 모두들 기본적인 능력은 있는 사람들이니까.
이후 사울은 공관에서 머무르며 공관 확장에 대한 계획을 세워 나갔다.
이왕 본인이 주도하여 계획을 세운 이상, 마지막까지 자신의 주도하에 일을 진행할 생각이었다.
물론 이 모든 일을 결정하는 건 국왕이다.
아바마마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헛수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사울은 아바마마가 자신의 뜻에 따라주리라 확신했다.
이왕 대신전과 카멜 산의 행보를 막기 어렵다면, 그 기회를 노려 중립 지대에서 왕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었으니까.
이후 사울은 공관에서 한동안 머무르며 여러 공무를 처리했다.
공관 도착 후 다시 사울을 공격한 자는 없었고, 덕분에 순조롭게 각종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안타까운 건 쓸 만한 정보를 많이 얻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외교 공관에서도 나름대로 모을 수 있는 온갖 정보들을 다 모았다.
개중에는 사울이 접하지 못한 것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정보의 양은 많아도, 지금 사울에게 필요한 건 거의 없었다.
이는 아는 사실의 재확인이나 신뢰하기 어려운 두루뭉술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훌쩍 지나갔다.
“이만 대신전으로 돌아가겠어요.”
“조심하십시오.”
돌아올 때는 별일이 없었다.
사울은 습격 소식을 듣고 대신전에서 호위 병력을 보내 준 덕분이었다.
기존의 호위 병력에 대신전의 호위 병력까지 합류한 덕분인지 아무런 방해 없이 평온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대신전에 돌아온 사울에게 반가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폐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아바마마가 보낸 편지를 읽어 본 사울은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폐하께서 공관 일을 허락하셨습니까?”
“그래, 이 일은 모두 나에게 맡긴다고 하시는군. 잘되었을 때의 공도, 잘못되었을 때의 책임도.”
이렇게 보면 아바마마나, 루시아 누님이나 닮은 점이 많다.
권한 만큼 책임을 강조하는 모습이 특히 그렇다.
다소 피곤한 면모이긴 하지만, 잘못된 일이라곤 할 수 없다.
책임 없는 권한이라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사울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공관 쪽에도 이 사실을 알리고, 본격적으로 확장을 준비하라고 해.”
“네, 전하.”
“대신관에게는 내가 직접 이 사실을 통보하고, 카멜 산에는 편지를 써야겠군.”
“모두 준비하겠습니다.”
중립 지대에 위치한 다르센 왕국의 외교 공관.
대신전이나 카멜 산으로서는 불편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하물며 그 불편한 존재가 두 배로 커진다는 건 당연히 반길 일이 아니다.
비록 이쪽에 명분이 있다고 해도 소홀히 처리할 수는 없었다.
일단 사울은 카멜 산에 친필로 정중하게 편지를 썼다.
카멜 산의 입장은 존중하지만, ‘카멜 산에서 결정한 방침 때문에’ 난민과 탈영병 문제가 커졌고, 이를 관리하기 위해 외교 공관을 확장하겠다고 밝혔다.
억지 논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의 원인을 카멜 산이 제공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카멜 산에 편지를 써 보낸 사울은 대신관 에스타를 만났다.
“외교 공관을 늘리신다고요?”
“네.”
에스타는 사울이 꺼낸 카드를 예상치 못한 듯, 당황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말했다.
“이 시국에 외교 공관 규모를 늘린다는 건….”
“나와 다르센 왕국은 대신전과 카멜 산을 여전히 존중합니다. 그렇기에 공관 규모라도 늘려야겠다는 것입니다. 대신전과 카멜 산의 방침 때문에 왕국에서 중립 지대를 좀 더 면밀히 살필 필요가 생겼고, 그를 위한 시설과 인력의 확충이 꼭 필요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