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사울은 문득 궁금해졌다.
아미스는 킬리안을 어떻게 생각할까.
물론 아미스라고 킬리안을 좋게 생각할 리는 없다.
적으로 보고, 어떻게든 처리해야 할 상대로 본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적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정하는 게 아닐까.
‘개인적인 동정이라면 상관할 바 아니지만.’
혹여나 여동생이 킬리안에 ‘개인적인 동정’ 이상의 마음을 품고 있다면 깨우쳐 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을 미리 신경 쓸 필요까지는 없다.
사울은 현실로 돌아왔다.
“킬리안이 지금 중립 지대에 있을까? 내 생각에는 가능성이 반반일 것 같은데.”
아르멜은 반반의 가능성 중 ‘있다’ 쪽에 걸었다.
“제가 킬리안이라면 중립 지대에 머물 것 같습니다. 지금은 어딜 가나 혼란스러운 상황이니, 그나마 평화로운 중립 지대에 머무르면서 세력을 확장하려 하지 않을까요.”
반면 카스텔은 ‘없다’ 쪽에 걸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놈이 지금까지 잡히지 않은 건 우리 왕국이나 가멜다 왕국의 누군가 뒤를 봐주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굳이 중립 지대에 있을 필요는 없고, 그의 뒤를 봐주는 나라에 있을 겁니다.”
양쪽 모두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반반이라고 본 것이다.
굳이 그중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높은 쪽을 점친다면…….
“내기를 해야 한다면 나는 킬리안이 중립 지대에는 있지 않다는 데 걸겠어.”
사울과 생각이 다른 아르멜이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나와 선생님이 틀리고 네가 맞을 수도 있겠지. 말했듯 가능성으로만 따지면 반반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내가 킬리안이라면, 그리고 이전까지 중립 지대에 머무르지 않았다면 굳이 지금 이곳으로 들어오진 않을 거야. 오히려 움직이는 게 더 위험할 수도 있으니.”
누구도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그저 가능성과 추측의 영역일 뿐.
하지만 가능성과 추측만이 가능한 상황에서도 때로는 번득이는 의견이 나올 때가 있다.
“그러고 보니… 킬리안은 어둠의 세력, 그리고 피닉스와도 관련이 있지 않았습니까?”
아이나의 말에 사울은 손바닥을 쳤다.
“맞아요, 중립 지대에는 그것들도 날뛰고 있지요. 아르멜, 최근에는 그들 소식이 들어온 게 없지?”
“네, 전하. 계속 찾고는 있지만 별다른 정보가 없습니다.”
“이상한 일이야. 세상을 뒤집으려는 놈들이 이토록 얌전히 지낸다는 게.”
이종족을 위한 세상을 만들려 하는 피닉스.
어둠 그 자체를 추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어둠의 세력.
그들은 분명 킬리안과 무언가 연관이 있다.
적대 관계가 아닌 건 확실하다.
어쩌면 셋 모두 동맹 관계이거나, 한 덩이로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만에 하나 이 혼란스러운 때에 킬리안에 피닉스, 어둠의 세력이 한꺼번에 움직인다면…….
사울은 새삼 깨달았다.
지금 움직이고 있는 적들은 물론,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적들도 신경 써야 한다는 사실을.
“킬리안 문제는 대신전과 협조하면 되겠지만, 피닉스나 어둠의 세력은 어쩌지?”
아르멜이 대답했다.
“피닉스는 카멜 산 쪽과 이야기를 해야 할 겁니다.”
“그렇겠지. 이종족 문제는 이종족이 잘 알 테니까. 어둠의 세력은?”
“어둠에 대해 걱정하는 건 카멜 산보다는 대신전, 나아가 교단이겠지요. 하지만 대신전이나 교단이나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도 불분명한 어둠의 세력을 쫓고 처리하는 데 얼마나 협조할지 모르겠습니다.”
태초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빛과 어둠의 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역사를 살펴봐도 빛의 교단이 형성되어 율렌 섬, 나아가 세계의 주류가 된 이래 어둠과의 분쟁을 포기한 적은 없다.
빛이 실존하듯, 어둠의 세력 역시 실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존하는 모든 적이 큰 위협이 되는 건 아니다.
어둠의 세력이 실존한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들이 지금 세상에 얼마나 해악을 끼치는 존재인지는 불분명하다.
중립 지대의 대신전도, 율렌 섬의 다른 교단 세력도 지금은 전쟁에 관련된 사안들을 처리하기도 바쁘다.
세력 규모와 목적조차 불분명한 어둠의 세력을 처리하는 데 얼마나 도움을 줄지 미지수다.
결국 얽힌 실타래는 인내하며 차근차근 푸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대한 넓게 정보를 모으면서, 행동은 눈앞의 악마 토끼풀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집중하는 게 좋겠군.”
사울의 말에 모두들 동의했다.
* * *
중립 지대의 악마 토끼풀 문제는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그 누구도, 어떤 세력도 악마 토끼풀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신관과 성기사까지 악마 토끼풀에 중독되었다고?”
“네.”
“한심하군.”
누구보다 악마 토끼풀 같은 것을 멀리해야 할 대신전 소속의 신관과 성기사 중에서도 중독자가 나왔다.
그것도 남몰래 악마 토끼풀을 쓰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악마 토끼풀을 퍼뜨리다가 발각되었다.
정보를 파악한 사울은 대신전에 이를 알렸고, 곧 당사자들은 체포되어 신전 감옥으로 보내졌다.
“신관 한 명에 성기사 두 명. 이 세 명이 전부일 것 같지는 않군.”
“그렇습니다.”
“중독자나 공급을 받아 퍼뜨리는 자들만 잡는 걸로는 끝이 없어. 공급자를 찾아 처리해야 해.”
“네, 공급자를 계속 찾고 있습니다.”
“킬리안의 흔적은 여전히 찾지 못했나?”
“네, 전하와 카스텔 님의 말씀처럼 중립 지대에 없는 것 같습니다.”
예측이 맞았다고 기뻐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킬리안이 중립 지대에 있다면 그를 잡아 악마 토끼풀 문제를 빨리 해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카멜 산 쪽의 움직임은 어떻지?”
“겉으로는 조용합니다. 며칠 전 회담을 제외하면요.”
며칠 전 카멜 산과 대신전 단둘이 회담을 벌였다.
카멜 산에서 난민과 탈영병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하느냐가 회담의 주제라고 들었다.
사울도, 가멜다 왕국 쪽에서도 회담에 참석하고 싶었지만, 대신전도 카멜 산도 양자 회담을 고집했기에 참여하지 못했다.
카멜 산과 대신전의 이번 회담에서 한 가지 결정된 사항이 있었다.
“카멜 산에서 필요하면 마을을 개방할 수 있다고 했지?”
“네, 카멜 산은 개방할 수 없지만, 카멜 산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마을을 개방할 수는 있다고 합니다.”
회담 결과는 양국 모두에 빠르게 전달되었다.
아마 다르센 왕국도, 가멜다 왕국도 머리를 싸매고 있으리라.
“결국 아미스로 인하여 상황이 급변했군.”
“네,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그리고 급하게 일이 벌어지진 않았을 겁니다.”
“맞아.”
“아미스라는 신관이 율렌 섬 전체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대단한 인물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건 그래.”
며칠 전에도 사울은 아미스와 만나 보았다.
하지만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
서로 의견 차이가 명백했기에, 악마 토끼풀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전생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건 물론이었다.
“전쟁 소식은 어때?”
“여기나 저기나 고착 상태인 모양입니다.”
“중립 지대나 전장이나 다른 게 없군.”
중립 지대든, 전쟁이든 상황을 한 번에 뒤집을 만한 방법이 없을까.
수없이 고민해 보았지만 역시 그런 방법은 없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인내심이 필요했다.
“더 보고할 건 없지?”
“네, 전하.”
“수고했어.”
아르멜의 보고를 다 들은 사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움직여서 답답한 마음을 풀고 싶었다.
사울은 대신전에 마련된 훈련장으로 향했다.
예전에는 오가는 과정에서, 그리고 훈련장에서도 보는 눈 없이 홀로 편하게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했다.
가멜다 왕국의 사절도, 그들이 이끌고 온 일단의 병력도 대신전에서 머무르고 있으니까.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하여 훈련장 안팎에 병력이 배치되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사울도 불만을 제기하진 못했다.
“하앗!”
몇몇 경비병의 시선을 받으며 사울은 홀로 마법 검을 휘둘렀다.
만에 하나 비장의 기술이 알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마법보다는 순수하게 몸을 움직이는 데 집중했다.
다행히 지난번 전투에서 입은 부상은 완치되었다.
이제 몸을 움직이는 것도, 마법을 쓰는 것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얼마나 몸을 움직였을까.
사울은 인기척을 느끼곤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췄다.
낯설지 않은 인기척.
대단하지는 않지만, 가까이에서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마나의 기운.
사울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미스 신관.”
“네, 전하.”
아미스가 사울에게 예를 표했다.
“무슨 일인가요?”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혹 불편하시다면 다른 시간에 찾아뵙겠습니다.”
“괜찮아요, 그럼 자리를 옮길까요?”
사울은 자신의 방으로 아미스를 데려갔다.
“…….”
사울과 마주 앉은 아미스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전하. 그러니까… 우선 악마 토끼풀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미스는 자신이 아는 악마 토끼풀 정보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이에 사울 또한 자신이 아는 정보를 알려 주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정보 교환은 이전에도 했었다.
바쁜 사울과 아미스가 대면하여 직접 이야기를 주고받을 필요까지는 없다.
그것을 잘 알고 있을 아미스가 굳이 훈련장까지 찾아오고, 사울 방까지 따라왔다는 건 다른 할 말이 있다는 뜻이었다.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나요?”
사울의 질문에 아미스는 손을 내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일견 침착해 보이는 태도지만, 사울은 아미스가 당황했음을 알아보았다.
전생 때 여동생은 자주 저랬다.
오빠에게 숨기고픈 게 있을 때 겉으로는 태연한 척 손을 내저었다.
그런 여동생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오빠로서, 일부러 그런 여동생을 놀린 적도 있다.
‘그렇게 손사래를 친다고 내게 숨기는 게 있는 줄 모를 것 같아?’
하마터면 사울은 농담을 할 뻔했다.
하지만 말이 입 밖에 나오기 전 정신을 차렸다.
지금 자신은 롤랜드가 아닌 사울이다.
눈앞의 여동생도 착하지만 나약하던 아리엘이 아니다.
선하지만 결코 나약하지 않고, 나아가 홀로 율렌 섬을 뒤흔들고 있는 거물이다.
‘정말 이 아이, 아니, 이 사람 앞에서는 평정을 유지하기 어렵군.’
본심을 숨기고 평정을 유지하는 건 누구보다 자신 있는 사울이다.
적국 왕자로 태어난 후, 스스로의 전생을 기억한 그날부터 계속해 온 일이니까.
하지만 여동생 앞에서만큼은 조금만 방심해도 평정이 순식간에 깨어질 것 같다.
잘못하면 그동안 이뤄 온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날 수 있음에도.
사울은 아미스가 할 만한 다른 이야기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먼저 떠오르는 건, 킬리안이었다.
“지금까지 상황을 보면 킬리안은 중립 지대에 없는 모양이에요.”
“네,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미스는 천천히 말했다.
“아마 그는 가멜다 왕국에 있는 것 같습니다.”
킬리안이 가멜다 왕국에 있다.
사울도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놈이 율렌 섬을 떠나지 않았고, 중립 지대에도 없다면 결국 가멜다 왕국이나 다르센 왕국에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아미스는 가능성을 언급하는 게 아니었다.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했다.
“증거가 있나요?”
“네, 믿을 만한 정보가 있습니다.”
“그 정보의 출처를 물어봐도 될까요?”
“제가 믿는 교단 관계자라는 것 이상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믿을 만한 사람이며, 눈썰미가 좋은 분입니다.”
“그 사람이 킬리안이 가멜다 왕국에 있는 것 보았단 말인가요?”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어떤 귀족의 부하에게서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