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사울 개인이 아닌 다르센 왕국에 킬리안 문제를 부탁한다.
그리고 가멜다 왕국에도 똑같은 부탁을 한다.
사울은 아미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챘다.
이 문제를 철저히 공적인 문제로 끌고 가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온다면 묻지 않을 수 없군요. 내가, 아니, 다르센 왕국이 그대를 도우면 왕국이 얻는 것은 무엇이지요?”
“킬리안을 잡는 것만으로도 왕자님의 나라에 이익이 되지 않겠습니까?”
킬리안을 잡는다.
확실히 사울로서, 나아가 다르센 왕국으로서도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전쟁을 계속하려면 무엇보다도 나라가 안정되어야 한다.
킬리안 같은 자가 날뛰는 건 그것만으로도 나라의 안정을 해치는 일이다.
놈이 예전처럼 왕국에 악마 토끼풀을 뿌리기라도 한다면…….
‘영악하군.’
사울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눈앞의 여동생은 세상 물정 모르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때로는 영악하게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이다.
사울은 혀를 내두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지금의 율렌 섬은 순수한 이상주의자가 살아가기엔 너무나도 힘든 곳이니까.
살아남으려면, 그리고 뜻을 펼치려면 영악하게 행동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 제안을 받아야 할까, 아니면 거절해야 할까.’
당장 결론 내리기는 어려웠다.
“그 문제는 조금 더 생각해 보고 대답하지요.”
“네, 전하.”
아미스는 다른 사울 일행을 돌아보며 물었다.
“다른 분들은 제게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
질문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질문거리가 없는 것인지, 자신 앞에서 질문하기는 부담스러운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물러가겠습니다.”
“그렇게 해요.”
아미스가 물러가고, 사울은 모두에게 물었다.
“아미스에게 궁금한 게 있는 것 아니었어요?”
아르멜이 모두를 대표하여 대답했다.
“전하께서 불편해하실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현명하게 행동한 거야. 그나저나 아미스 신관의 입에서 킬리안 비셔스의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저도 그렇습니다. 최근에는 킬리안에 대한 정보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은 대신관만, 그것도 일부만 알고 있는 정보라는 뜻이군.”
사울은 좀 더 정보를 모으기로 했다.
“아르멜, 대신전에 킬리안에 대한 정보를 요청하고, 또 직접 알아봐.”
“네, 전하.”
사울은 지긋지긋한 킬리안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 만날 때만 해도 그냥 거물 범죄자인 줄로만 알았던 놈.
놈이 이렇게 자신을 방해할 줄은 몰랐다.
* * *
다르센 왕국이 그렇듯, 가멜다 왕국도 본격적인 전시 체제에 돌입했다.
가멜다 왕국 정계의 거물, 안소니 백작도 지금은 얌전하게 지내야 했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도 아니고, 한창 치열한 가운데 쓸데없는 짓을 하는 건 정치적 자살행위이기 때문이었다.
안소니 백작은 킬리안 같은 ‘위험 분자’와의 만남도 최대한 자제했다.
덕분에 킬리안은 한가해졌고, 이를 기회로 삼았다.
“악마 토끼풀은 얼마나 확보되었나?”
“200상자입니다.”
제온의 보고를 받은 킬리안이 명령했다.
“절반은 팔고, 절반은 투자한다.”
투자라는 말에 칼립소가 물었다.
“그렇게나 많이 중립 지대에 뿌린다고요?”
“지나친 투자라고 생각하는 건가?”
“네, 두목. 요즘은 악마 토끼풀 수확도 신통찮아서 언제 물량이 또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백 상자나 중립 지대 녀석들에게 공짜나 다름없는 가격으로 뿌린다는 건…….”
칼립소의 말에 킬리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려울수록 투자를 해야지.”
“정말 난민이나 탈영병들에게 악마 토끼풀 맛을 보여 준다고 효과가 있을까요? 거지나 다름없는 것들인데.”
킬리안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서 네게 사업 일은 맡기지 않는 거다.”
“그런가요?”
“네 말이 틀린 건 아니다. 난민이나 탈영병은 거지나 다름없는 것들이지. 빌어먹지 못하면 굶어 죽을 녀석들. 그런 녀석들일수록 유혹에 약한 법이지. 그런 놈들이 나중에라도 성공하여 좋은 고객이 되길 기대하긴 힘들지만, 우리 상품을 퍼뜨리는 심부름꾼 역할로는 더없이 적절한 녀석들이다. 내 말뜻 알아듣겠나?”
그제야 킬리안의 진의를 깨달은 칼립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번에 대신전에서 난민이나 탈영병을 받아들인다니, 그에 맞춰 우리도 투자를 늘린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래, 대신전 녀석들이 우리 사업을 도와준다는데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있나. 이참에 중립 지대의 손님들을 늘릴 생각이다. 어쩌면 새로운 재배지도 확보할 수 있겠지.”
그런 킬리안에게 제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두목의 뜻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여러가지로 신경 쓰고 또 대비해야 합니다.”
“누구에게 어떻게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나?”
“최근 안소니 백작은 우리한테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모양입니다. 당분간 그쪽에는 최소한의 주의만 기울여도 문제없을 겁니다. 문제는… 가르시아 남매입니다.”
“그것들한테 연락이 안 온 지도 꽤 되지 않았나?”
“전쟁을 하느라 바쁜 탓이겠지요. 하지만 전쟁이 잘 풀리지 않고 있으니, 우리 힘이라도 빌리려 할 겁니다.”
“그때 우리가 놈들을 돕지 않으면, 우릴 적으로 보거나 화풀이 대상으로 볼 수 있단 말인가?”
“네, 두목.”
순간 킬리안의 눈 밑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놈들이 귀찮게 하기 전까진 내 사업에 집중해도 별문제 없겠지?”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무슨 문제인데?”
“요즘 사울 왕자가 대신전에 머무르는 모양입니다.”
사울의 이름을 들은 킬리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방금 전 가르시아 남매에 대해 들었을 때보다 더 큰 인내심을 발휘하는 모습이었다.
“놈이 대신전에?”
“네.”
“대체 무엇 때문에?”
“전쟁에 관련된 일이거나, 아니면 난민이나 탈영병 문제 때문이겠지요. 두목도 알다시피 사울 왕자만큼 우릴 잘 아는 자는 없습니다. 그가 무언가 냄새를 맡으면, 가만있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칼립소가 다른 의견을 냈다.
“하지만 지금 두 나라는 전쟁 중이잖아? 사울 왕자도 전쟁에 참여했다고 들었어. 전장에서 뛰기도 바쁜 놈이 중립 지대에서 우릴 쫓을 여유가 있을까?”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사울이 굳이 대신전에 왔다는 건 당장 전장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는 뜻이야. 그가 대신전에 머무를 시간이 있다면 우릴 쫓을 시간도 있겠지. 대비할 필요가 있어.”
제온과 칼립소는 결정권을 가진 킬리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을 정리한 킬리안이 입을 열었다.
“일단 사울 쪽은 내버려 둬라.”
“괜찮겠습니까?”
“어차피 이번 일에 나나 너희가 직접 움직이는 것도 아니니까. 놈이 움직여 봐야 우릴 잡을 순 없을 게다. 그보다…….”
킬리안의 눈이 번득였다.
“어둠의 친구들 쪽에도 신경을 써라.”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그 친구들도 전쟁에 발맞춰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라고 하지 않았나?”
“네, 자세한 건 미지수지면, 어쨌든 그쪽에서도 전쟁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넓힐 생각인 것 같았습니다.”
“그에 어느 정도 맞춰 주면서 최대한 놈들을 이용하는 거다. 필요하면 대신전이든 사울 왕자든 잡아 죽일 수 있도록.”
제온도, 칼립소도 킬리안이 마음을 정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따를 수밖에 없다.
조직의 두목이자 절대자, 킬리안의 명령이니까.
“알겠습니다, 두목.”
* * *
“확실히 최근 중립 지대에 악마 토끼풀 문제가 점점 부각되는 것 같습니다.”
“악마 토끼풀을 공급한 게 킬리안이 확실한가?”
“확실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유력합니다. 어디에선가 자생하는 걸 따서 팔거나 소규모로 몰래 심어 파는 수준이 아니니까요.”
악마 토끼풀 및 킬리안에 대해 조사를 해 온 아르멜의 보고에 사울은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아미스의 말은 거짓도, 근거 없는 소리도 아니었다.
중립 지대에서 다시금 악마 토끼풀 문제가 고개를 들고 있고, 문제를 만든 장본인이 킬리안이라는 근거도 있었다.
‘킬리안 비셔스…….’
정말 지긋지긋한 놈이다.
가멜다 왕국도 충분히 난적인데, 중요할 때마다 나타나 방해를 하다니.
이참에 뿌리를 뽑고 싶지만, 그것도 쉬운 건 아니다.
“킬리안이 중립 지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징후는 없나?”
“그런 정보는 없습니다. 제 생각엔 놈이 중립 지대에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설령 중립 지대에 있다 해도 섣불리 모습을 드러내진 않을 거야.”
킬리안은 대신전과 카멜 산 입장에서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다.
뚜렷한 이유 없이 스스로 정체를 드러낼 가능성은 없다.
“악마 토끼풀 문제를 조사해 보는 게 좋겠군.”
“그럴 여유가 있겠습니까?”
“대신전에 봉사만 하겠다는 건 아니야. 악마 토끼풀 문제를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중립 지대를 샅샅이 뒤질 수 있을 테니까.”
어차피 중립 지대에 머무르는 이상, 이곳의 정보를 가능한 많이 알아두는 건 나쁠 게 없다.
운 좋으면 중립 지대 어딘가에서 대신전이나 카멜 산을 움직이도록 할 만한 정보를 찾을 수도 있다.
결정한 사울은 아미스에게 통보했다.
‘중립 지대 주민들의 안위를 위해서 악마 토끼풀 문제의 해결에 나서겠다’고 말이다.
아미스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겠지만, 곧바로 답변을 보내 왔다.
‘왕자 전하의 정의로운 결단에 감사한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사울은 오랜만에 악마 토끼풀 조사에 나섰다.
악마 토끼풀에 대한 건 물론, 중립 지대 전반에 대한 조사였다.
대신전에서 의뢰한 악마 토끼풀 조사라는 명분이 있으니 대신전의 협력을 받으며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계획이었다.
반면에 가멜다 왕국 쪽에서는 사울처럼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그쪽도 아미스에게 제안을 받았을 것임에도 악마 토끼풀 조사 따윈 시간 낭비라는 듯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 보고를 들은 사울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멜다 왕국 녀석들은 생각을 잘못하고 있군. 정보라는 건 직접 발로 뛰어야 얻는 법인데.”
사울은 적들의 어리석음을 틈타 중립 지대 조사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그렇게 보름 동안 정보를 모은 사울은 그동안 모은 정보를 분석했다.
그 결과 악마 토끼풀 문제에 대해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아미스의, 그리고 대신전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누군가 악마 토끼풀을 저렴한 가격으로 뿌리고 있다는 말인가요?”
사울의 질문에 카스텔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몇 명의 관련자들에게 직접 확인했습니다.”
카스텔이 직접 심문했는데 관련자들이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다.
관련자들도 잘못된 정보를 알았을 가능성은 있지만, 이번 일에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이종족을 잘 다루는 아이나도 쓸 만한 정보를 가져왔다.
“제가 만나 본 이종족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결국 난민, 탈영병, 이종족을 가리지 않고 악마 토끼풀을 싸게 공급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말이군요.”
“네, 전하.”
아르멜도 비슷한 의견을 냈다.
“무엇보다 공급되는 악마 토끼풀 물량이 상당히 많은 편입니다. 지금 율렌 섬에서 이 정도의 물량을 뿌릴 수 있는 건 킬리안뿐입니다.”
“지독한 놈.”
사울은 킬리안의 악독함에 혀를 내둘렀다.
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짐작이 갔다.
전쟁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용해 자기 사업을 키우겠다는 것이다.
전쟁을 이용해 마약을 판다.
전쟁에 기생하는 기생충과 다를 바 없는 짓이다.
‘오랜 전쟁이 낳은 기생충인가.’
사울은 문득 얼마 전 아미스가 한 말을 떠올렸다.
‘이것만은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난 삼백 년간의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그리고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를지. 그렇게 오래된 전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건 결코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