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아미스의 말은 계속되었다.
“논쟁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각자의 입장이 있고, 제게는 제 입장이 있으며 생각을 바꾸는 건 어려울 테니까요.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난 삼백 년간의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그리고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피가 흐를지. 그렇게 오래된 전란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건 결코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멜다 왕국 쪽에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흥.”
“웃기는군.”
비웃음을 당할 것이라 예상했는지 아미스는 조금도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럼 돌아가시지요.”
그리고 아미스는 돌아가기 위해 말을 타기 직전, 사울을 지나치며 슬쩍 말했다.
“대신전에 돌아가는 대로 다시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전하.”
“…….”
사울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말에 올랐다.
* * *
대신전에 돌아오기 무섭게 사울은 중요한 소식을 두 개나 받았다.
하나는 왕국에서, 또 하나는 카멜 산에서 온 것이었다.
“전하, 왕녀님이 보내셨습니다.”
아르멜이 넘겨준 편지를 훑어 본 사울이 중얼거렸다.
“누님도 머리가 꽤 아픈가보군.”
“뭐라고 보내셨습니까?”
“온건하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면 행동해도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경거망동 하지 말라는 명령이야.”
“역시 왕녀님도 당장 이 문제에 손쓸 방법은 없는 모양입니다.”
루시아는 사울과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 중 가장 냉철한 사람이다.
냉철함으로만 따지면 아바마마보다도 한 수 위다.
그런 루시아에게도 ‘아미스 사태’는 예상하지도, 당장 해결책을 내놓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카멜 산에서도 내게 연락을 해 왔다던데?”
“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우리 왕국에, 그리고 대신전과 가멜다 왕국 모두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사울 개인에게 보낸 게 아니라 나라에 보낸 공적인 편지라면 결코 무게가 가볍지 않다.
아마 이번 사태에 대한 공적인 입장을 밝힌 것이리라.
사울은 봉인된 편지를 뜯어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카멜 산이 편을 정했군.”
“어느 쪽으로 말입니까?”
“대신전과 아미스 쪽으로.”
말과 함께 사울은 편지를 일행에게 보여 주었다.
모두들 놀라거나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대족장이 이렇게 빨리 결정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내 생각도 같아. 대족장이라면 그래도 중립을 지키거나, 하다못해 시간은 끌어 줄 줄 알았는데.”
세네카가 직접 작성한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카멜 산은 군사적 충돌이 없다는 전제하에 대신전의 방침을 지지한다’
아르멜도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것일까요?”
“글쎄… 대족장은 워낙 예측불허의 존재니.”
“카멜 산에서 갑자기 불쌍한 난민들을 도와야 한다는 의견이 늘어나기라도 한 것일까요?”
“그런 보고는 들은 적 없다만.”
직접 카멜 산을 찾지 않는다면, 그곳의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얻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경우, 카멜 산에서 인간은 손님으로 머무를 수 있을 뿐이니까.
하지만 카멜 산에서 난민을 받아들이자는 의견이 대대적으로 나오는 사태가 벌어졌다면, 분명 관련 정보가 왕국에, 그리고 사울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정보는 들은 적 없다.
“분명한 건 카멜 산에서도 대신전의 편을 든 이상, 더더욱 이 일을 막기 힘들어졌다는 점이야.”
“네, 당분간 국경을 엄하게 틀어막아 난민이나 탈영병이 중립 지대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겁니다.”
“그 방법도 잘 통할지 의문이고.”
사울과 아르멜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이나가 말했다.
“지금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그 외에는 일단 신경 쓰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에요. 카멜 산까지 대신전 편을 든 이상 군사적인 압박은 사실상 불가능할 테니까. 우리든, 가멜다 왕국이든.”
전세가 불리해진다는 건 어떤 문제가 한쪽에만 생겼다는 뜻이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가멜다 왕국도 자신들과 똑같이 난민이나 탈영병 문제로 예전보다 더 골치를 썩이게 되었으니까.
“조만간 왕실에도 카멜 산의 입장이 전달될 거예요. 그럼 새로운 명령이 내려오거나 하겠지요.”
“그럼 지금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누님이 말씀하셨 듯, 머무는 동안 할 수 있는 것을 해야지요.”
과연 언제까지 머무를 수 있을까.
또 지금 상황에서 사울이 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사울 스스로도 확언하기 어려웠지만, 지금은 기다리는 방법뿐이다.
그때, 경비병이 소식을 전해왔다.
“전하, 아미스 신관이 뵙기를 청합니다.”
“알았어, 지금 찾아오라고 해.”
대답을 한 사울은 모두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사울과 아미스가 독대하느냐.
혹은 모두들 아미스와의 대화에 참여하느냐.
사울은 기회를 주었고, 대답은 곧바로 나왔다.
“저희도 같이 만나고 싶습니다.”
카스텔이 모두를 대표해 말했고, 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아미스는 사울과 독대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리라.
그런데 날고 기는 사울 일행과 함께 이야기를 하게 되면 어떻게 나올까.
왠지 모르게 사울은 시험해 보고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미스가 찾아왔다.
“전하, 아미스입니다.”
“들어와요.”
다소곳이 사울의 방에 들어온 아미스는 사울과 함께 있는 일행을 보고 순간 멈칫거렸다.
사울뿐만 아니라 일행들 모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하지만 주저한 것도 잠시, 아미스는 고개 숙여 인사했다.
“면담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도 마침 그대와 할 말이 있었어요. 그리고… 내 일행들도.”
카스텔, 아이나, 아르멜.
하나같이 능력과 존재감이 가볍지 않은 자들이다.
하지만 아미스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은 채로 모두와 인사를 나누곤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했나요?”
사울이 운을 떼자 아미스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조금 전 저와 함께 시찰을 다녀온 분이… 전하가 맞으셨지요?”
“그래요. 용케 날 알아보았군요.”
“네, 다른 분은 몰라도 전하는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요? 여기 선생님, 그리고 아이나도 함께였는데.”
사울의 말에 아미스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마 두 명의 존재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리라.
“어떻게 나만 알아본 건가요?”
사울의 질문에 아미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고 보니 신기한 일입니다. 전하도, 다른 분들도 뵌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전하만은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그제야 사울은 자신이 조금 위험할 수도 있는 질문을 했음을 깨달았다.
단 둘이라면 모를까, 모두들 모인 자리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여동생 앞에서는 이상하게 흐트러지는군.’
사울은 농담으로 말을 돌렸다.
“다음부터는 누구도 알아볼 수 없도록 좀 더 철저히 변장해야겠군요.”
“후훗.”
“아미스, 그대가 날 먼저 보자고 했지요. 내게 할 말이 있나요?”
“네, 전하께서는 그 마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울은 아미스가 조금 전 한 말을 다시 읊었다.
“논쟁을 하고 싶지 않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입장이 있고, 생각을 바꾸기는 어렵다. 바로 그대가 한 말이지요?”
“네, 그리고 지난 삼백 년간의 전쟁으로 흘린 피에 대해서도 말씀드렸지요.”
“그것도 똑똑히 기억나요. 그대의 그 말에 대한 내 입장은 분명해요. 삼백 년 전쟁. 정말 지긋지긋하지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렸고,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있으니까요.”
“…….”
“나도 전쟁은 끝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대는 화해로 전쟁이 끝나길 바라겠지요? 내 생각은 달라요. 삼백 년 동안 전쟁이 이어졌는데 이제 와서 화해하는 건 불가능해요. 남은 길은 어느 한쪽이 굴복하거나 멸망하는 것. 그것뿐이에요. 바로 그게 현실이니까요.”
아미스가 조심스럽게 반론했다.
“그런 생각이 지난 삼백 년간 전쟁을 이어 나갔다고 생각하시진 않으십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지요. 우리 왕국이나 가멜다 왕국이나 생각은 똑같을 테니. 그렇기에 더더욱 물러설 수 없어요. 적이 우릴 굴복시키거나 멸망시키려는 걸 포기하지 않는데 우리 쪽에서 먼저 적을 굴복시키거나 멸망시키려는 걸 포기한다? 그것은 아마 왕국의 멸망을 뜻하겠지요.”
“…….”
“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에요. 아바마마도, 나아가 왕국 모두가 같은 생각일 거예요.”
아미스는 작게 한숨을 쉬며 반론을 이어나갔다.
“모두는 아닐 겁니다.”
“그렇게 생각해요?”
“네, 지난 삼백 년 전쟁의 역사를 살펴보면, 평화를 원하고 또 추구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긴 하지요. 별 의미는 없었지만.”
약 300년 동안 이어진 전쟁.
그 기간 동안 왕국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전쟁에 찬성한 건 아니다.
때로는 전쟁에 반대하는 자들, 나아가 적극적으로 평화를 이야기하는 자들도 있었다.
혹은 비겁자들이라 무시당하기도 하고, 혹은 평화를 추구한다며 사고를 쳤다가 탄압당하면서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을 뿐.
“저는 그들의 행동이 의미 없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래요? 난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고 보는데. 결국 그들은 전쟁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니까요.”
“처음에는 미약했을지 모르나, 평화를 원하는 목소리가 모이고 모이면 큰 의미가 되리라 믿습니다.”
역시 사울과 아미스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고, 지금은 설득이 불가능했다.
이대로 가면 여동생과 격렬히 논쟁하거나, 권위를 앞세워 찍어 눌러야 할지 모른다.
사울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답이 나오지 않는 논쟁을 이어 나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지요.”
“…네. 전하.”
“그 이야기는 이만 끝내도록 하고, 다른 용무가 있나요?”
“네, 실은 전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아미스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뜻밖의 이름을 꺼냈다.
“킬리안 비셔스의 일입니다.”
듣기만 해도 지긋지긋한 이름에 사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이름을 왜 꺼내는 건가요?”
“최근 중립 지대에서 악마 토끼풀의 유통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특히 난민들이나 탈영병, 그리고 그들과 접촉한 일반 주민들까지 악마 토끼풀을 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멀쩡한 사람일수록 마약에 손을 댈 가능성이 낮다.
난민이나 탈영병들이라면 이래저래 혼란스러울 것이고, 마약의 유혹에 빠지기도 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울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악마 토끼풀은 비싼 물건이에요. 게다가 킬리안의 사업은 이래저래 타격을 받아 전보다 공급도 크게 줄었을 테고요. 난민이나 탈영병이 어떻게 그것을 손에 넣었단 말인가요?”
“저도 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난민과 탈영병 중심으로 악마 토끼풀이 점점 퍼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일에 하얀 까마귀가 관련되어 있다는 믿을 만한 정보가 있습니다.”
아미스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난데없이 킬리안 비셔스라니.
사울에게 할 일이 없다면 모를까, 그렇지도 아니다.
당장은 상황을 주시하고 있지만, 중립 지대의 상황 변화나 전황에 따라 언제든 달리 활동하거나 이곳을 떠나야 할 몸이다.
“내가 킬리안 비셔스를 여러 번 상대해 보았으니 그놈의 문제, 나아가 하얀 까마귀와 악마 토끼풀 문제를 나더러 처리해 달라는 말인가요?”
“네.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사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개인적으로는 돕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 나는 개인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에요.”
말을 꺼내면서도 사울은 이상에 사로잡힌 여동생의 마음에 상처를 준 건 아닌지 걱정했다.
하지만 아미스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알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저는 전하께, 아니, 다르센 왕국에 부탁하는 겁니다. 그리고 똑같은 부탁을 가멜다 왕국에도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