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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187화 (187/232)

187화

“…….”

침묵이 흘렀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사울을 따라다니며, 혹은 사울을 따라다니기 전부터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번 일만은 어찌 된 일인지 정답을 찾기 어려웠다.

침묵을 깬 건 방 안의 누군가가 아닌, 밖에서 들어온 경비병이었다.

“실례합니다, 전하께서 여러분들을 뵙자고 하십니다.”

갑작스런 통보에 모두들 놀랐다.

“전하께서? 지금 말인가?”

“네.”

상황을 파악한 아르멜이 쓰게 웃었다.

“전하께서는 우리가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으신 모양입니다.”

카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지요.”

확실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사울의 냉철함과 영민함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뜻이니까.

사울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는 일이다.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나 사울을 만나러 갔다.

“어서들 와요.”

사울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는 나았다.

사울은 자리에 앉은 모두를 둘러본 뒤 물었다.

“그래, 아미스는 만나 보았나요?”

“저, 전하.”

아이나의 볼멘소리는 자백과도 같았다.

사울은 피식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여러분들을 탓할 마음은 없어요.”

아이나는 변명 대신 사실을 인정했다.

“전하의 명령을 어긴 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또 아미스 신관도 불미스러운 행동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행이군요. 하지만 내가 여러분들을 부른 이유는 그게 아니에요.”

사울이 고개를 숙였다.

“일단 사과할게요. 상황을 이상하게 만든 것. 그리고 모두를 걱정시킨 것에 대해.”

“저, 전하!”

놀란 그레이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카스텔이 제지했다.

카스텔의 눈빛을 받은 그레이는 상황을 깨닫고는 행동을 멈췄다.

곧 사울은 고개를 들고 말했다.

“내 사과를 받아 주겠어요?”

카스텔이 대답했다.

“그건 전하께 달려 있습니다.”

“…….”

카스텔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왕자에게 이런 무례한 말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누구보다 그녀를 잘 아는 사울이라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맞아요. 무작정 사과부터 받아 달라고 할 수는 없지요. 그래, 여러분들은 어디까지 알고 있나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이번에는 아이나가 대답했다.

“전하께서 아미스 신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까지 알고 있습니다.”

“아미스가 거기까지 이야기 한 모양이군요.”

“그분의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말실수를 했다고요? 놀랄 일은 아니군요. 모두에게 낯설고 혼란스러운 때이니까. 그래, 아미스가 어디까지 이야기하던가요?”

“전하께서 자신이 가멜다 왕국 출신이라는 걸 아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군요.”

사울은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지요. 모두에게 비밀은 있는 법이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그 비밀을 모두 이야기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거짓말을 하진 않겠어요. 그 아미스라는 신관은 나에게… 여러모로 흥미로운 존재예요. 그래서 그녀에 대한 많은 것을 알아보았지요. 하지만 그녀를 직접 본 순간 짐작도 못한 일이 벌어졌어요. 그 결과, 이런 상황까지 왔고요.”

사울도 이것이 속 시원한 설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대신, 중요한 이야기는 모두 숨겼으니까.

전생의 여동생에게도 말하지 못한 전생 이야기다.

눈앞의 사람들이 자신의 편이라도 거기까지 말할 수는 없었다.

“…….”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 침묵을 깬 건 그레이였다.

“전하, 한 가지만 가르쳐 주십시오.”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대답할게.”

“아미스라는 신관이 전하의 적이거나, 혹은 전하께 해코지를 할 사람입니까?”

사울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틀림없습니까?”

“그건 확실해. 아마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서로 적대할 일은 없을 거야. 아미스가 우리 왕국의 적이 되지 않는 한.”

“알겠습니다.”

그레이는 더 묻지 않았다.

이어 카스텔도 질문했다.

“전하, 아미스라는 신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적은 아니지만 여러모로 대하기 곤란한 사람이랄까요?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이 정도예요.”

“알겠습니다.”

아이나도 질문했다.

“앞으로 그 신관을 어떻게 대하실 겁니까?”

“가능한 왕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해야지요.”

마지막으로 아르멜이 말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까지 전하의 행동 중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모두 왕녀님께 보고했습니다.”

“그럼 이번 일도 보고할 거야?”

“그것이 제 임무입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전하께서 선택하셨으면 합니다.”

“웬일로 네가 누님이 아닌 내 편을 들지?”

“제가 보고, 듣고, 아는 것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일 같아서 말입니다. 제가 이 사실을 곧이곧대로 왕녀님께 보고했다가 상황이 심각해진다면 그게 더 문제이니까요.”

사울은 짓궂게 웃었다.

“결국 책임을 나에게 떠넘기겠다는 말이군?”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큰 책임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

사울은 잠시 생각한 끝에 말했다.

“누님께는 보고하지 않아 줬으면 해.”

“알겠습니다. 그럼 이번 일이 우리 왕국에 해를 끼친다면, 그 책임은 모두 전하께서 지시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명심할게.”

날카로운 질문들이 쏟아졌지만, 이 정도면 생각보다 원만하게 끝난 셈이다.

사울은 모두를 돌아보며 다시 물었다.

“이제 다 끝났나요?”

“전하께서 비밀을 밝히시지 않는다면, 더 할 말은 없습니다.”

카스텔의 날카로운 지적에 사울은 고개를 저었다.

“다시 말하지만 모두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아요. 그래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예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비밀을 이야기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만요.”

아이나가 다시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나는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전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고마워요.”

아이나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들 더 이상 사울의 비밀을 캘 마음은 없는 듯했다.

사울은 안도했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는 사실도 잊지 않았다.

자신이 보여 준 행동도 이상했고, 아미스와는 앞으로도 계속 부딪칠 가능성이 높으니까.

생각만 해도 두통이 몰려오는 복잡한 상황.

앞으로도 분명 어렵겠지만, 사울은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다르센 왕국의 왕자로서 당면한 문제를 잘 풀어내는 게 먼저다.

그러면서도 이왕이면 여동생 일도 잘 풀고 싶었다.

비록 전생의 여동생이지만, 어쨌든 죽은 줄 알았던 여동생과 다시 만났으니까.

* * *

사울은 왕자로서 각종 업무를 다시 시작했다.

일단 사울은 대신전에 머무르고 있는 가멜다 왕국의 행보를 살폈다.

가멜다 왕국 쪽도 이번 일로 이래저래 바쁜 모양이었다.

“애슬론 백작이 신관과 성기사 가리지 않고 만나고 있다고?”

“네, 전하.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만날 수 있는 자는 다 만나는 모양입니다.”

“그쪽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모양이군.”

사울도 남 말 할 때가 아니다.

아르멜이 약속을 지켰다면 아미스의 일은 누님이나 아바마마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외의 사항들, 특히 대신전의 ‘난민 및 탈영병 전면 수용 방침’은 전달되었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하든 대신전이 당장 방침을 바꾸지는 않겠지?”

“대신관과 아미스, 두 사람 모두 죽지 않는 이상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지금은 그들에게 손을 댈 수는 없지. 가멜다 왕국에서도 그런 무모한 일을 하지는 않을 테고.”

“그렇습니다. 우리나 그쪽이나 당장은 대신전에 어떤 형태로든 손쓰기는 어렵습니다.”

“역시 대신관이나 아미스 둘 중 하나라도 어떻게든 설득해야 하나…….”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입니다. 역시 전하께서 아미스 쪽을 설득하실 수 없겠습니까?”

사울은 아르멜의 질문에서 묘한 압박감을 느꼈다.

모두에게 비밀로 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어서 손을 써 보라는 뜻일 게다.

사울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설득하는 건 어려울 거야. 하지만 만나 볼 가치는 있겠지.”

사울은 아미스를 만나기 위해 연락을 넣었다.

왕자가 만나자고 요청해 오면 보통은 없는 시간이라도 만들 것이다.

하지만 아미스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아미스가 날 만나지 않겠다고 하던가?”

“앞으로 사흘 동안은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합니다.”

“어째서?”

병사는 사울의 눈치를 보다 조용히 말했다.

“두 나라에서 온 난민과 탈영병을 위한 마을 건설을 감독해야 한다고…….”

“그런가.”

다르센 왕국의 난민과 탈영병을 위한 마을 건설을 감독한다는 이유로 다르센 왕국 왕자의 면담 요구를 거절한다.

세상에 이런 결례도 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의도적인 결례는 아니다.

아미스는 예정된 일정을 수행할 뿐이다.

잠시 생각한 사울이 말했다.

“오랜만에 투구 전사 노릇을 해 볼까?”

사울의 말에 아르멜이 손을 내저었다.

“그만두십시오.”

“내가 뭘 하려는 것인지 알겠어?”

“혼자서 변장하고 아미스 신관을 따라다니겠다는 말씀 아니십니까?”

“맞아.”

정답을 맞힌 아르멜은 전혀 기쁘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위험합니다. 적들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아. 이 계획은 방금 전 내가 즉석으로 생각한 거야. 아마 적들도 지금 같은 때 나 혼자 대신전을 벗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거야. 그리고 아미스 정도의 거물이 직접 움직인다면 대신전에서도 안전에 신경을 쓸 테고.”

“전하께서 직접 움직여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물론. 아미스는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상대해 온 그 누구보다 난적이야. 마법이나 칼이 아닌, 설득만이 통하는 난적이지. 그렇게 어려운 적을 상대하려면, 적에 대해 알아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지금은 대신전에서 신관이나 성기사 몇 명 만나는 것보다 대신관이나 아미스에 대해 좀 더 많이 알아보는 게 우선이야. 그러려면 아미스가 하는 일을 직접 보고 듣는 게 최선이겠지.”

아르멜은 사울의 말을 반박하지 못했다.

하지만 역시 위험한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아르멜은 중재안을 내놓았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혼자 가시지는 마십시오.”

“혼자 가야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럼 전 카스텔 님과 아이나 아가씨에게 이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카스텔과 아이나가 이 사실을 알면 사울을 홀로 보낼 리 없다.

떼 내려 해도 우격다짐으로 따라올 것이다.

아니, 카스텔이라면 사울을 포박하여 아예 나가지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

사울은 아르멜을 쏘아보며 말했다.

“많이 컸군. 왕자를 협박하다니.”

“전하 같은 분을 모시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요.”

“정 그렇다면 선생님과 아이나를 데리고 가지.”

사울이 양보하자 아르멜도 양보했다.

“그 정도면 안심할 수 있겠지요.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 * *

사울은 오랜만에 투구를 쓰고, 평소와 다른 갑옷을 입었다.

홉킨스 가문 영지에서 활약할 때처럼 얼굴을 완전히 가리는 투구로 정체를 숨긴 것이다.

변장을 마친 사울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미리 정체를 알고 보는 게 아니면 투구를 쓴 사람의 정체가 사울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건 불가능할 만큼 얼굴에 몸까지 꼭꼭 숨겼다.

마침 아이나와 카스텔도 사울을 찾아왔다.

둘 다 투구, 그리고 평소와 다른 복장으로 정체를 숨겼다.

가능한 마나의 기운을 숨기고, 굽 높은 신발을 신어 키까지 다르게 할 만큼 변장에 정성을 들였다.

“준비는 다 마쳤지요?”

“네, 전하.”

“우리 셋. 그리고 가멜다 왕국에도 몇 명이 동행할 거예요. 그쪽에서 먼저 우릴 건드리지 않는 한, 섣불리 건드리지는 말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사울은 아미스에게 왕국 병사 몇을 보내 새로 건설될 마을을 살펴보겠다고 통보했다.

아미스 쪽에서는 난색을 표했지만, 혹시나 불온 세력이 잠입하지는 않을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명분으로 밀어붙였다.

때마침 가멜다 왕국에서도 확인이 필요하고 주장했고, 결국 양국에서 뽑힌 병사 몇 명이 아미스와 함께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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