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그리운 모습에 사울은 다시 한번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천천히 말했다.
“이번 대신전의 조치를 주도한 게 당신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미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하.”
“아니라고요?”
“네, 저는 어디까지나 많은 분들이 품고 있던 선한 뜻을 되새기는 역할을 했을 뿐입니다. 이 전쟁이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전쟁의 여파로 생겨난 수많은 영혼들을 보듬어야 한다. 지금 대신전에서는 신을 따르는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아무리 아미스가 대단한 신관이라도, 그녀의 생각만으로 모든 일이 진행되었을 리 없다.
대신관 에스타에게도, 그리고 대신전의 적잖은 구성원들에게 비슷한 뜻이 있었기에 일사불란하게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아미스나 대신관이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다.
그들이 선의로 한 행동이 사울에게, 나아가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에 곤경을 안겨다 준 게 문제일 뿐.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주도한 행동 때문에 대신전 전체가 곤경에 처해질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까?”
“물론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도 생각하고 있고요.”
“그런데도 이런 일을 강행하였다는 말입니까?”
“세상 누구보다 앞장서 선을 행하는 것. 그것이 신을 따르는 자의 의무입니다.”
아미스가 한마디도 지지 않자, 사울은 조금 당황했다.
사울이 기억하는 여동생, 아리엘은 사람들 앞에서 할 말을 다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착하고 선량한 여동생이었지만, 너무 숫기가 없어 남자를 만나 결혼할 수 있을지 걱정될 정도였으니까.
‘내가 잘못 생각한 걸까?’
하지만 저 얼굴, 목소리, 버릇까지 어떻게 봐도 여동생의 그것이다.
아무리 고도의 훈련을 받았다 해도 저렇게까지 똑같이 흉내 내는 건 어려울 것이다.
‘지금은 난민과 탈영병 이야기를 해야 해.’
사울은 상념을 떨쳐 내려 노력하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지요. 대신전은 기회를 잘 잡았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 왕국이나 적국 가멜다 왕국 모두가 손을 쓰기 어려운 상황에서 영악하게 그대들의 뜻을 드러냈다는 말이지요.”
“…….”
좋은 말로 설득하기 어렵다면 자극을 주는 게 해답일 수 있다.
이제 아리엘, 아니, 아미스는 어떻게 나올까.
“어느 때이든 저는 지금처럼 행동했을 것입니다.”
“대신전에서도 당신의 뜻을 따랐을까요?”
“물론입니다. 신을 따르는 자는 선을 행해야 하며, 갈 곳 잃은 영혼을 구원할 의무가 있으니까요.”
“당신이 말하는 갈 곳 잃은 영혼이 자신의 의무마저 저버린 비겁자들이라 해도요?”
사울의 도발에도 아미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제게 그들을 평가할 자격 같은 건 없습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나에게는 자격이 있습니다. 나는 왕자이며, 전장에서 목숨 걸고 싸웠고, 단 한 번도 겁쟁이가 된 적이 없으니.”
“…….”
“분명히 말하지요. 지금 대신전에서 받으려 하는 난민과 탈영병은 겁쟁이들이자 비겁자들입니다. 나라가 망했다면 모를까, 아직 나라가 건재한데 도망친 자들이 비겁자가 아니면 무엇일까요? 그런 비겁자들을 방치하면 군대가, 나라가 무너지는 건 순식간입니다. 그런 자들은 엄벌해야 하는 이유이지요. 우리 왕국뿐만이 아니라, 가멜다 왕국도 똑같이 생각할 테고요.”
“…….”
“아미스 신관, 지금 그쪽은 날 적으로 돌린 게 아닙니다. 두 왕국을 적으로 돌린 것이에요. 감당할 자신이 있나요?”
아미스는 의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옳은 길을 갈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감수하겠습니다.”
아미스의 표정에서 두려움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은 사울은 기분이 복잡해졌다.
아무래도 당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울 것 같다.
사울 본인은 물론, 다르센 왕국도 곤경에 처한 셈이다.
한편으로는 대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울이 기억하는 아미스, 아니, 아리엘은 선량했지만 결혼은 할 수 있을지 걱정될 만큼 숫기 없고 심약한 소녀였으니까.
그 나약한 소녀가 명망 높은 신관이 되어 왕자에게 당당히 할 말을 다 하는 사람이 되다니.
놀랄 만한 성장이 아닐 수 없다.
“…….”
복잡한 기분에 말을 멈춘 사울의 눈치를 보던 아르멜이 슬며시 조언했다.
“전하,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대화를 빨리 끝내자는 뜻이다.
아무래도 사울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탓이리라.
하지만 사울은 이대로 대화를 끝낼 마음이 없었다.
“모두들, 잠시 물러가도록 해요.”
“네?”
“아미스 신관과 단둘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러자 카스텔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 그만두십시오.”
“나는 괜찮아요.”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만 저 신관을 돌려보내십시오.”
카스텔의 언동은 부탁이나 조언이 아닌, 강요에 가까웠다.
자신과 사울의 신분마저 잊을 만큼 심상찮은 상황이라고 생각한 것이리라.
하지만 사울은 카스텔의 반 강요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괜찮아요.”
“전하.”
“나는 괜찮다고 말 했어요, 선생님. 일단 물러가세요.”
“…….”
아무리 스승이라도 왕자인 사울에게 강요할 방법은 없다.
결국 카스텔은 물러났고, 이번에는 아이나가 나섰다.
“전하, 오늘은 여기까지 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사울은 카스텔에게 그랬듯, 아이나에게도 단호하게 말했다.
“그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아요. 하지만 나는 괜찮아요. 날 믿고 잠시 물러가 있어요.”
결국 아이나도 작게 한숨을 쉬며 물러났다.
아이나까지 물러난 이상, 사울을 말릴 수 있는 건 어릴 때부터 그를 모셔 온 집사 그레이뿐이다.
하지만 그레이는 사울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 듯, 말릴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잠시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모두를 내보낸 사울은 마법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완전히 차단했다.
“자. 다시 이야기를 해 볼까요?”
그런 사울을 바라보던 아미스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작게 웃었다.
의아해진 사울이 물었다.
“왜 웃나요?”
“죄송합니다, 전하.”
“화가 난 게 아니에요. 나나 내 부하들의 행동 중 웃긴 게 있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옛일이 떠올랐습니다.”
“옛일?”
“네.”
옛일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신관으로서의 옛일?
아니면 사울, 아니, 롤랜드의 여동생으로서의 옛일?
당장이라도 묻고 싶었지만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일단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는 게 먼저다.
정말 전생의 여동생인지 아닌지.
“아미스.”
“네, 전하.”
“그대를 만나기 전 여러 가지로 알아보았어요. 그대의 과거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더군요.”
“…….”
실제로 사울은 이렇게 만나기 전 사울은 아미스에 대해 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는 흥미로웠다.
신관이 된 후의 행적은 명백하지만, 신관이 되기 전의 행적은 수수께끼였다.
교단에서도 아미스의 과거에 대해 아는 자는 거의 없었다.
아미스의 능력과 명망에 비해 지위가 낮은 이유 중 하나가 불분명한 출신 때문일 정도였다.
실제로 사울의 입에서 ‘과거’ 이야기가 나오자 아미스도 조금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대의 과거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에요. 하지만 누군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신관 아미스는 가멜다 왕국의 몰락 귀족 가문 출신이라고.”
아미스의 눈이 커졌다.
사울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숨기고 싶어 하던 게 들통 났을 때, 여동생이 짓던 표정과 꼭 닮았다.
‘역시 그런가.’
이정도면 거의 확실해 졌다.
하지만 사울은 좀 더 확실하게 알고 싶었다.
“내가 듣기로 그대가 소속되어 있던 몰락 귀족 가문은 더 이상 흔적도 남지 않았다더군요. 구성원들까지 대부분 죽었다고.”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혹시 그쪽이 가멜다 왕국 출신으로서, 가멜다 왕국 편을 들기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라면 묵과할 수 없으니까요.”
본심이 아니다.
아미스가 아리엘인데 과거를 이용하여 해코지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다만 자극받은 아미스의 반응이 궁금했다.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밝힐지.
“할 말이 있으면 하세요.”
“…저는 전하께, 나아가 다르센 왕국에 미움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가멜다 왕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멜다 왕국에서도 다르센 왕국 못지않게 절 눈엣가시로 여길 겁니다.”
“겉보기로는 그렇지요. 하지만 들은 대로 그대가 정말 가멜다 왕국의 귀족 출신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요. 그대가 공평한 잣대로 전쟁을 방해한다면 참을 수 있어요. 하지만 교단에 속한 그대가 나의 조국을 적대하고, 적국을 돕기 위해 전쟁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전하.”
아미스가 사울의 말을 잘랐다.
무례한 행동임을 알 것이면서도, 주저 없이 자신의 말을 했다.
“전하께서 알아내신 건 사실입니다.”
“그런가요?”
“네. 저는 가멜다 왕국 출신입니다. 이제는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사라진 가문 출신입니다. 제 아버지도, 오라버니도, 어머니도 모두 돌아가셨고 저는 교단에 몸을 맡겼으니 이제 누구도 저의 가문을 기억하지 않을 겁니다.”
“…….”
그렇지 않다.
비록 몰락한 지 오래지만, 제니스타 가문의 이름은 사울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그 사실을 입 밖에 낼 수는 없다.
“제 가문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전 스스로를 가멜다 왕국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름을 바꾸고 교단에 들어온 순간부터 과거의 저는 버렸습니다. 빛의 이름으로 맹세하건대, 저는 가멜다 왕국의 편을 들기 위해 행동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전하의 조국인 다르센 왕국의 편을 들 생각도 없습니다. 제가 바라는 건 하루빨리 이 전쟁이 종식되는 것. 그리고 전쟁이 끝나기 전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영혼을 구하는 것입니다. 단지 그것뿐입니다.”
사울은 아미스의 말 중 한 부분에 주목했다.
‘제 이름을 바꾸고 교단에 들어온 순간부터’
무심결에 내뱉은 한 마디가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눈앞의 신관은 분명 아리엘이다.
아리엘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름을 아미스로 바꾸고 신관이 되어 이렇게 다시 만난 것이다.
과거 사울이 본 책에서는 아리엘도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기록이라는 건 와전되기 쉬운 법이다.
기록의 출처가 ‘적국 왕국의 시시콜콜한 정보’라면 더더욱 그렇다.
무슨 이유에서든 정보가 잘못 전달되어 기록되었고, 그 결과 죽은 줄 알았던 여동생이 이렇게 다시 눈앞에 나타난 것이리라.
사울은 당장이라도 자신의 비밀을 밝히고 싶었다.
전생에 ‘롤랜드 제니스타’였음을 밝히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섣불리 정체를 밝히는 건 그동안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일이 될 테니까.
사울은 미소로 속내를 감추며 말했다.
“그렇군요, 아미스 신관.”
“네, 전하.”
“말이 조금 심했던 것 같아요. 그대의 진심을 의심한 건 사과하지요.”
사울의 말이 뜻밖인지 아미스는 잠시 말을 잊고 사울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나요?”
“아, 아닙니다. 그저 전하의 모습이 낯이 익은 것 같아서.”
“그거 이상한 일이군요. 당신과 나는 일면식도 없던 사이인데.”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 전하의 모습이 낯이 익습니다. 조금 전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마치 이젠 이 세상에 없는…….”
무심결에 주절거리던 아미스는 화들짝 놀라 입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