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184화 (184/232)

184화

하지만 데이빗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데이빗은 다시 한번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옳은 일을 위해, 그리고 가엾은 영혼을 구하기 위해 고난을 당하는 건 괜찮다. 아니, 그러한 고난을 감수하는 게 신을 따르는 자의 의무다.”

“무슨 소리지?”

“아미스 신관님께서 제게 하신 말씀이에요.”

“…….”

이번에는 사울이 말을 잃었다.

이미 데이빗의 뜻은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자신이 왕자임을 내세워 무어라 해도 바뀌지 않을 만큼.

“그렇군.”

“죄송합니다, 전하.”

“아무래도 아미스 신관과 직접 이야기를 해야겠군. 신관에게 내가 하루빨리 만나고 싶다고 전해라. 시간은 언제든지 낼 수 있다.”

“네, 전하.”

그렇게 데이빗은 물러갔고, 사울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정말…….”

쉽지 않은 회담이 될 것이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줄은 몰랐다.

“아르멜, 지금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상부에 알렸지?”

“네. 머잖아 왕녀 전하도, 또 폐하께서도 상황을 알게 되실 겁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온 목적보다 대신전의 정신 나간 짓을 멈추게 만드는 게 우선이야. 동의하나?”

“네, 전하.”

아르멜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이견은 없었다.

대신전에서 이런 식으로 전쟁에 개입하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아미스라는 신관을 설득하는 게 관건이겠군요.”

아이나의 말에 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 모든 게 아미스 신관이 한 짓이에요. 그녀가 아니었다면 대신관은 항상 그렇듯 중립을 지키며 적극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겠지요. 탈영병이나 난민이 중립 지대에 들어오는 것을 막지는 않을지언정, 적극적으로 그들을 맞이하거나 책임지려 하지도 않았을 테고요.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고민하던 사울은 카스텔에 물었다.

“선생님의 마법으로 아미스 신관을 어떻게 할 수는 없을까요?”

카스텔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신앙심이 깊고 마법도 어느 정도 쓸 줄 안다고 들었습니다.”

“섣불리 마법으로 어떻게 하려 들었다가 일이 잘못될 수 있다는 말이지요.”

“네, 전하.”

“그렇군요. 지금 한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해요.”

사울도 알고 있었다.

어지간한 상대라면 마법으로 정신을 건드리는 등의 방법을 쓸 수 있다.

하지만 아미스는 어지간한 상대가 아니다.

대신관, 나아가 대신전을 움직일 정도의 거물이다.

마법으로 어설프게 건드렸다가 일이 잘못되거나 들통이라도 나면 수습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아미스는 신앙심이 투철한 신관이며, 치료 마법에 능통하다지 않은가.

심지가 굳고 마법을 쓸 줄 아는 자의 정신을 마법으로 조종하는 건 굉장히 어렵다.

하지만 마법으로 아미스의 정신을 손봐서라도 상황을 타파하고 싶다는 게 사울의 본심이었다.

그만큼 지금 상황은 예상 밖이었고, 또 골치가 아팠다.

유일한 위안이라면, 가멜다 왕국도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으리라는 점이었다.

“가멜다 왕국과 카멜 산에서는 어떻게 나올까?”

“가멜다 왕국도 우리와 하나 다를 게 없을 겁니다. 문제는 카멜 산입니다. 그들에게도 갑작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대족장 세네카는 워낙 예측하기 어려운 인물이라 어떻게 나올지 짐작이 어렵습니다.”

“그렇지. 정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되었어. 아미스를 만난다고 뭐가 나아질지 모르겠고.”

이 모든 것을 기획하고 주도한 장본인인 신관 아미스.

아마 말로 설득하는 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한번 만나기는 해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전하, 아미스 신관이 내일 전하를 뵙겠다고 청해 왔습니다.”

“알겠다. 기다리겠다고 전해라.”

드디어 아미스와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 * *

아미스는 요즘 대신전에서 가장 바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했다.

본인이 주도한 ‘난민과 탈영병 수용 계획’을 위해 현장과 대신전을 오가며 바삐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제 회담이 열릴 때도 난민 수용 마을을 만들기 위해 현장에 나가 있었고, 이제 막 돌아왔다고 했다.

‘신관 아미스라…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사울은 항상 아미스에 대해 좋은 이야기만 들었다.

그래서 스스로도 아미스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그녀가 저지른 행동도 선악으로만 따지면 나쁜 건 아닐 것이다.

불쌍한 영혼을 구하겠다는 갸륵한 뜻으로 한 행동이 아닌가.

하지만 그 행동이 사울과 다르센 왕국, 나아가 율렌 섬 전체를 곤경에 빠트릴 수 있다.

일단 상대의 진의를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전하. 아미스 신관이 뵙기를 청합니다.”

“들어오라고 해.”

마침내 그 유명한 신관 아미스가 사울을 찾아왔다.

방문이 열리고, 소박한 신관복 차림의 아미스가 들어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하.”

아미스가 먼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

아미스와 눈을 마주친 사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아미스가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신관 아미스가 다르센 왕국의 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

“전하?”

“…….”

사울의 침묵에 아미스는 의아해했다.

다른 사람들도 의아한 건 마찬가지였다.

카스텔도, 아이나도, 아르멜도 처음에는 의아해했고, 이어지는 침묵에 당황했다.

“전하.”

“…….”

“전하?”

몇 번이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도 사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치 석상처럼 굳은 채로 말없이 아미스를 응시할 뿐이었다.

아무래도 사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카스텔이 사울을 쿡 찔렀다.

누구도 카스텔의 무례함을 탓하지 않았다.

“전하.”

그제야 사울은 정신을 차렸다.

“아, 아미스 신관이라고.”

“네, 전하. 신관 아미스가 전하를 뵙습니다.”

“…….”

그런 아미스를 바라보던 사울이 조용히 말했다.

“몸이 안 좋군요. 미안하지만 일단 물러가도록 해요.”

아미스도, 사울의 주변 사람들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에 아미스도 놀랐지만 주변 사람들은 더더욱 놀랐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러운 아이나의 말에 사울은 식은땀까지 흘리며 말했다.

“나는 괜찮아요.”

표정이나 말이나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이에 주변에서 나서 의사라도 부르려 할 때.

“모두들, 잠시 자리를 비워 줘요.”

“네?”

“잠시 혼자 있고 싶어요. 모두들 잠시 자리를 비워 줘요.”

모두들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운데, 사울이 다시 한번 말했다.

“어서요.”

그런 사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카스텔이 말했다.

“모두 나갑시다.”

“…….”

모두들 영문을 몰라 했지만, 사울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방 안의 모두가 아미스까지 사울의 방에서 쫓겨나듯 나가야 했다.

모두 당황한 가운데, 아미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무언가 무례를 저지른 겁니까?”

“…….”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아미스가 무례를 저지른 건 없다.

검소하지만 깨끗한 신관복을 제대로 갖춰 입었고, 사울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의 언동도 흠잡을 데 없었다.

설령 아미스가 무언가 무례를 저질렀다 해도, 그 이유만으로 사울이 저렇게 행동할 리 없다.

예의 갖출 줄 모르기로 소문난 카스텔이 그의 스승이요, 예의의 ‘예’ 자도 모르던 킬리안이나 가르시안 남매와도 얽혀 본 적 있지 않은가.

산전수전 다 겪은 사울이 갑자기 저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울의 사생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집사 그레이도 의아해할 뿐이었다.

“아미스 신관.”

“네.”

“혹시 예전에 전하와 만난 적이 있습니까?”

카스텔의 질문에 아미스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처음 뵙습니다.”

“이상하군. 그쪽에게서는 아무런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고, 또 처음 보는 사이인데 전하께서 그렇게 행동하시다니.”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미스의 질문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만큼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을 만큼 사울의 행동은 이상했다.

모두들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며 사울이 대답해 주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 * *

신관 아미스.

나이는 30대 초중반 정도에 밝은 금발 머리.

왕국 사교계에서도 화제를 모을 만한 아름다운 용모에 인상도 굉장히 선량했다.

사울이나 다른 자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손톱만큼의 악의도 느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순수하게 ‘선’을 형상화한 듯한 신관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미스를 본 순간, 사울은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저 얼굴을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아니, 어떤 자리에서든 다시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아미스.

아니, 그 이름이 아니다.

사울은 자신이 아는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아리엘…….”

아리엘 제니스타.

제니스타 가문의 딸.

롤랜드 제니스타의 한 명뿐인 여동생.

그랬다.

지금 사울의 눈앞에 나타난 아미스는 사울의 전생이었던 롤랜드의 여동생, 아리엘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전생의 여동생이 ‘신관 아미스’가 되어 사울의 눈앞에 나타났다.

사울은 자신이 알고 있던 전생의 가족들에 대한 정보를 떠올려 보았다.

[제니스타 가문의 토지는 다른 귀족 가문에 편입되었다]

[롤랜드의 어미는 자살했다]

[미모로 유명했던 롤랜드의 동생은 병에 걸려 죽었다]

[제니스타 가문의 생존자들은 전멸했다.]

어릴 적 책에서 본 ‘제니스타 가문의 최후’에 대한 구절이 아직 눈에 선했다.

믿을 만한 모든 정보들이 제니스타 가문의 최후, 그리고 롤랜드의 어머니와 여동생의 죽음을 기록했다.

다르센 왕국의 왕자로서, 직접 가멜다 왕국 촌구석 어딘가에 있을 가족들의 무덤을 찾아갈 수도 없었기에 사울은 책에서 본 내용을 그대로 믿었다.

그런데 아리엘이, 정확히 말하자면 사울이 기억하는 여동생 아리엘의 얼굴을 한 신관이 눈앞에 나타났다.

꼭 빼닮은 누군가일까?

그럴 수도 있다.

당장 이름부터가 다르지 않은가.

하지만 사울은 자신의 눈을 확신했다.

‘내가 아리엘을 못 알아볼 리 없어. 20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그 아이는 분명 아리엘이야. 하지만 어떻게?’

죽은 전생의 여동생이 20년의 시간을 넘어 다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자신의 일을 방해하면서.

한참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민하던 사울은 뒤늦게 자신이 놓인 상황을 깨달았다.

지금 방 밖에는 자신이 쫓아내다시피 한 일행들과 아미스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대로 모두를 밖에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이미 일이 커졌지만, 더 일을 키울 수는 없다.

사울은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뒤늦게 이마에 맺힌 식은땀도 닦고 두근거리는 가슴도 진정시켰다.

평정을 찾으려고 노력을 하니 조금은 안정을 되찾은 것 같기도 했다.

사울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는 말했다.

“모두 들어와요.”

방문이 열리며 그때껏 방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모두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항상 보던 일행도, 아미스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사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카스텔과 아이나가 동시에 물어 왔다.

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러자 아미스도 입을 열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

저 얼굴에 저 목소리.

세월의 흐름은 느껴졌지만, 다시 보고 들어도 부정할 수 없는 여동생의 얼굴이자 목소리다.

저 사람이 여동생이 아니려면, 아리엘에게 자신도 모르는 쌍둥이 여동생이 있어야만 가능하리라.

상대가 여동생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 사울은 또 가슴이 두근거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신이 자신을 유희거리로 삼은 것일까.

간신히 진정한 사울은 조용히 말했다.

“모두를 걱정시킨 건 다시 한번 사과하지요. 이래저래 지치고 피곤하여 갑자기 몸 상태가 나빠진 것 같아요.”

아미스는 정말 사울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일단 물러가려 했다.

“전하께서 편찮으시다면 다른 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아니에요. 이왕 한 약속이니까요.”

절대로 이대로 보낼 순 없다.

왕자로서 할 말도 있고, 상대가 정말 아리엘이라면 더더욱 보낼 수 없다.

그렇게 아미스를 붙잡은 사울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네가 내 여동생 아리엘이냐?’

이렇게 묻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보는 눈도 많은데 사적인 이야기부터 꺼낼 수는 없었다.

일단 사울은 공적인 이야기부터 꺼냈다.

“이번에 대신전에서 취한 조치 말입니다.”

사울의 질문에 아미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눈을 감았다 뜨며 대답했다.

“네, 전하.”

저건 아리엘의 버릇이다.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 아리엘은 꼭 저렇게 스스로를 다잡은 뒤 입을 열고는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