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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183화 (183/232)

183화

“저희 대신전의 입장은 조금 다릅니다.”

사울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에스타는 두 나라의 입장을 최대한 존중하고 받아들이면서 상황을 안정적으로 풀어나가는 조율자 의견에 만족할 줄 알았는데, 벌써 의견을 내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난민과 탈영병 문제 말입니다.”

애슬론 백작도 에스타의 말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보다 강한 조치를 원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말하자면 그 반대입니다.”

“반대……?”

“네, 분명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시간부로 중립 지대로 넘어온 난민과 탈영병은 국적을 불문하고 대신전에서 책임지고 보호할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대신관의 발언에 순식간에 회담장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대신전에서 난민과 탈영병을 책임지고 보호한다?

이는 대신전에서 왕국 주민들과 병사들이 도망치는 것을 권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며, 두 나라를 적대하는 행동이다.

사울은 재빨리 다른 참석자들의 표정을 살폈다.

단호한 표정의 에스타.

그리고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애슬론 백작과 카멜 산의 가르나엘.

대신전 측을 제외하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선언.

가장 먼저 반발한 것은 사울도 애슬론 백작도 아닌, 카멜 산의 가르나엘이었다.

“대신관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저희 대신전에서는 이 전쟁으로 갈 곳을 잃은 모든 난민과 탈영병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나아가 그분들이 이 중립 지대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고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그런 일을 대족장님과 상의도 없이 결정하신 겁니까!”

“대족장님과 상의를 하지 않고 결정한 건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카멜 산에서는 저희의 뜻에 따르거나, 도울 수 없음을 알고 있기에 저희의 뜻만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또한 이 결정은 대신전, 그리고 대신전의 영역에 한정된 결정이라는 점 역시 분명히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이 결정은 대신전의 독단적인 결정인 모양이었다.

카멜 산과 대신전이 미리 짜고 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카멜 산은 무엇보다 자신들의 영역에 전쟁의 불똥이 튀지 않는 데 신경 쓰고 있다.

지금 대신전에서 하는 일은 그러한 카멜 산의 방침과 정반대가 아닌가.

카멜 산이 격렬히 반응하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 입장에서는 카멜 산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대신전과 친분을 쌓아 온 사울도 이건 묵과할 수 없었다.

“대신관님, 이렇게 중요한 일을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건 지나친 처사가 아닙니까?”

화가 난 와중에도 사울이 예의를 지키듯, 에스타도 예의는 지켰다.

하지만 뜻을 바꾸지는 않았다.

“본의 아니게 무례를 저지르게 된 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대신전 차원에서 결정된 일입니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애슬론 백작이 언성을 높였다.

“회담을 하자고 불러 놓고 이런 식의 통보라니. 이런 무례한 일이 있는가!”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로만 끝날 일이 아니지 않소! 난민과 탈영병을 대놓고 받아들이겠다? 지금 대신전에서 가멜다 왕국을 적대하겠다는 거요?”

“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들은 항상 그렇듯, 전쟁에서 중립을 지킬 것입니다. 다만 갈 곳 없는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그들을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겁쟁이 같은 난민들과 탈영병을 받아들이겠다? 하, 우리 왕국에서는 그런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소!”

“죄송합니다. 지금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그것뿐입니다.”

에스타는 연신 사과하면서도 뜻을 바꾸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사울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 예상 밖의 사태에 해결책을 내놓을 만한 사람이 있는가.

“…….”

사울과 눈을 마주친 모두가 침묵하거나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태였고, 모두들 당장은 어쩔 도리가 없는 듯했다.

사울도 마찬가지였다.

대신전의 무례한 태도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참을 수 있었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전을 협박하거나 군사적으로 압박을 가한다?

그것은 지금껏 사울이 힘들여 쌓은 공든 탑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일이며, 실익도 없는 일이다.

함부로 다르센 왕국에서 대신전을 향한 군사 행동에 나서면 대신전은 물론 교단 전체와 카멜 산까지 들고 일어날 테니까.

‘교활한 놈들.’

사울은 일단 분노를 참고, 좋은 낯으로 말했다.

“대신관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하지만 대신관님의 통보가 너무 갑작스러워서 말입니다. 보아하니 애슬론 백작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데… 오늘 회담은 이만하시지요.”

에스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백작님의 뜻은 어떻습니까?”

“…알겠소.”

결국 회담은 대신전의 일방적인 통보만을 남긴 채 끝났다.

* * *

회담을 마치고 방에 돌아온 사울은 자신의 심정을 온건히 표현했다.

“대신관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

다른 일행은 물론, 아르멜마저도 사울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정말 뜻밖입니다. 에스타 그자는 자신의 지위, 나아가 대신전의 안전을 우선시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전쟁이야 반대하겠지만, 표면적인 반대에 그칠 뿐 지금처럼 전쟁에 관여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는 수준에서 행동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이 사실을 누님과 아바마마께서 아시면 진노하시겠지.”

“네. 두 분께서도 이런 건 예상 못 하셨을 겁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

사울은 에스타가 정말 미친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방금 전 만나 본 에스타의 모습은 정신병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지극히 멀쩡할 뿐만이 아니라, 온전히 본인의 뜻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한참 생각하던 사울은 일단 진상 파악에 나서기로 했다.

“아르멜, 우리 쪽 정보원을 총동원해서 알아봐. 대신관 혼자서 이런 결정을 내렸을 리 없지.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전하.”

듣고 있던 카스텔이 슬며시 질문했다.

“저 나름대로 알아보아도 되겠습니까?”

카스텔의 조사는 폭력과 정신 조종을 의미한다.

그렇게라도 진상을 빨리 알아내고 싶다는 게 사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역시 지금은 거기까지 가기에는 위험 부담이 컸다.

“지금은 좀 더 온건한 방법으로 알아보기로 해요. 지금은.”

“알겠습니다.”

그렇게 정보 파악에 나선 가운데, 오래잖아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아미스 신관의 짓이랍니다.”

“아미스 신관?”

뜻밖의 이름이 튀어나온 것에 사울은 적잖이 놀랐다.

신관 아미스.

데이빗의 스승이자 대신전, 나아가 교단에서도 명망이 높다는 여신관.

워낙 평판이 좋은 인물이라 호기심을 느꼈고, 몇 번이나 만나려 했지만 인연이 닿지 않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근래에는 대신전에 머무르고 있다는 데도 사울이나 아미스가 바쁜 탓에 여전히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아미스가 이번 사태의 배후라니.

“아미스라는 신관이 대체 무슨 짓을 했지?”

“난민과 탈영병을 받아야 한다고 대신전 사람들을 설득했답니다. 적지 않은 신관과 성기사들이 그녀의 설득에 넘어갔고, 대신관마저도 그녀의 설득에 넘어갔답니다.”

“그래서 그 여신관의 뜻에 넘어간 에스타 대신관이 우리 왕국에 의논도 없이 그러한 뜻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통보한 것이다?”

“네, 전하.”

화가 나기에 앞서, 어이없는 일이다.

일개 신관의 뜻에 대신전과 카멜 산, 그리고 두 나라가 휘둘리다니.

“데이빗이 아미스라는 신관의 칭찬을 정말 많이 했었지. 마냥 사람 좋은 신관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마녀였군.”

“…….”

“이제 어쩌실 겁니까?”

“데이빗, 그리고 아미스가 나와 만나고 싶다고 했지?”

“네, 전하.”

“최대한 빨리 그들을 만나야겠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 그들에게 직접 들어야겠어.”

바로 그때.

때마침 손님이 찾아왔다.

“전하, 데이빗 견습 신관이 뵙기를 청합니다.”

“데이빗이? 지금?”

“네.”

“잘되었군. 데려와.”

곧 데이빗이 사울의 방에 들어왔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전하.”

오랜만에 다시 보는 데이빗은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겉보기에는 어리고 미숙해 보였지만, 무시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데이빗에게는 아무런 원한도 없다.

또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꽤 친밀하게 지내지 않았던가.

하지만 사울은 그런 데이빗을 마냥 반갑게 맞을 수 없었다.

“오랜만이군, 데이빗.”

“네, 전하.”

사울의 딱딱한 표정과 가라앉은 목소리에 데이빗도 돌아가는 분위기를 읽은 듯 쭈뼛거렸다.

하지만 사울과의 대화를 피하려 하진 않았다.

사울이 조용히 물었다.

“내가 왜 널 불렀는지 알겠니?”

“…아미스 신관님이 하신 일 때문이시지요?”

“그래, 네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미스 신관이 날 곤란하게 만들었다. 나만 곤란해진 게 아니야. 다르센 왕국 전체가 곤란해졌지. 그뿐만이 아니야. 가멜다 왕국도, 카멜 산도, 그리고 이 대신전까지도 곤란해졌다. 그 주된 책임이 아미스 신관에게 있는 것 같은데.”

대답에 따라 아미스는 물론, 데이빗의 대접도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데이빗도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한동안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다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데이빗은 말했다.

“네, 전하께서 알아내신 건 모두 사실입니다.”

“아미스 신관이 대신전에서 난민과 탈영병을 받도록 만들었다고?”

“그렇습니다. 그 문제는 대신전에서도 상당한 논란거리였습니다. 하지만 아미스 신관님이 망설이는 분들과 대신관님을 설득하셨고, 결국 대신전의 방침이 정해진 것으로 압니다.”

눈을 피하지 않고 대답하는 데이빗의 모습에서 사울은 어떤 결의를 읽었다.

누가 시킨 게 아니라, 스스로 아미스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확신까지.

‘이 녀석이 이렇게 단호한 표정을 지을 줄 아는 녀석이었던가.’

데이빗 혼자서 이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만큼 아미스 신관의 영향력이 막대하다는 뜻이리라.

데이빗과 아미스는 친하다니 그를 움직이면 아미스를 설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사울이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꿀 마음은 없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미스 신관은 정말 큰일을 저질렀어. 물론 가엾은 영혼을 구하고 싶다는 선의에서 한 해동이겠지. 하지만 때론 선의가 악의보다 나쁜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법이야. 바로 지금이 그런 때지. 두 나라의 전쟁이 점점 격화되는 이때 대신전에서 난민과 탈영병이 계속 나오도록 조장한다? 이는 두 나라 모두에 선전 포고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지. 그 신관의 본의가 어떻든, 두 나라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

“그뿐만이 아니야. 카멜 산에서도 이번 결정은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았어. 자칫 카멜 산과 대신전의 사이도 멀어질 수 있어. 그럼 대신전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

“내가 다르센 왕국의 왕자라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야. 물론 왕자로서 이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기는 건 부인하지 않겠어.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대신전은 감당 못 할 일을 겪게 될 거야.”

이런 사울의 말에 데이빗도 다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사울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다.

다르센 왕국의 왕자 입장에서 한 말이지만, 그 말대로 일이 최악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있다.

대신전이 다르센 왕국, 가멜다 왕국, 그리고 카멜 산 모두에게 버림받을 가능성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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