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나는 이만 빠지겠다.”
“…알겠습니다.”
베일을 만나기 전 세드에게 언질을 받은 기사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이제 제르넬 요새를 점령하기는 어렵다. 베일도 그 사실을 깨달았을 테니 발을 빼려 할 게다. 놈이 뭐라 하든 제 좋을 대로 하라 해라.’
분명 세드는 베일을 ‘놈’이라고 불렀다.
지금 베일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기사도 세드가 이 구국 영웅을 왜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보고를 마친 기사는 본진으로 물러갔다.
베일은 다시 요새 서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흉성, 사울 왕자.”
이 전장에서 둘 다, 하다못해 둘 중 한 명은 죽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둘 다 죽이지 못했고 요새를 함락시키지도 못했다.
‘이 모든 게 메로빙거 자작의 무능 때문은 아니다.’
베일이 보기에 메로빙거 자작은 나약했고, 또 무능했다.
요새를 점령하지 못한 데 그의 책임은 결코 적지 않다.
하지만 자신이 카스텔이나 사울을 쓰러뜨리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들을 쓰러뜨릴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여기저기서 시끄럽게 굴겠지.”
자신에게 적이 많다는 건 베일 스스로도 잘 알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 적들이 자신을 귀찮게 할 것이라는 사실도 말이다.
‘누나를 만나야겠어.’
이런 일은 자신보다 누나인 마리안이 전문이었다.
음모를 꾸미거나 적의 음모를 파훼하고, 힘이 아닌 지략으로 내부의 적들을 없애 버리는 것.
* * *
제르넬 요새를 둘러싼 공방전은 며칠 더 이어졌다.
하지만 지난 전투들처럼 격렬하지는 않았다.
베일처럼 혼자 요새에 뛰어들어 성벽을 때려 부수려 하는 놀라운 전략이 등장하지도 않았다.
“성문을 사수하라!”
“공성 병기를 집중하여 공격하라!”
조나단은 요새 지휘부에서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사울은 그 곁에서 마법으로 아군을 도왔다.
카스텔은 직접 성벽 위에서 적들을 공격했고, 아이나는 부상이 낫지 않아 요양 중이었다.
얼마나 싸웠을까.
며칠간 지루하게 이어지던 공방전의 끝이 다가왔다.
“적들이 물러갑니다!”
“이번에는 완전히 물러가는가?”
“그런 것 같습니다!”
저녁 즈음부터 적들이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번 철수는 어제까지와는 달랐다.
날이 어두워지고 야습이 어려워 철수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완전 철수였다.
“실컷 마음대로 요새를 두들기다 제멋대로 도망치는군. 당장 저놈들을 뒤쫓고 싶지만…….”
조나단은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사울 역시 조나단과 생각이 같았다.
아무리 준비를 잘해도 후퇴하는 부대에는 빈틈이 생기기 마련이다.
후퇴하면서 빈틈이 생기는 적군을 추격하여 피해를 입히거나 섬멸하는 건 기본이다.
하지만 지금 제르넬 요새는 그 기본적인 전략마저 수행하기 힘들었다.
어설프게 적을 추격하려다 역공을 당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놈들을 쫓지는 않는다! 놈들이 완전히 물러가기를 기다린다!”
조나단의 의견에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패퇴하는 적을 쫓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악전고투였으니까.
얼마 후.
마침내 적들이 완전히 물러간 것이 확인되었다.
“좋아! 우리가 이겼다!”
“와아아아!”
조나단의 승전 선언에 요새의 모두가 환호성을 내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쁜 소식이 또 전달되었다.
“전하, 구원군이 요새 근처까지 도달했답니다!”
“역시 그렇군. 적들도 그것을 알고 꽁무니를 빼고 도망친 것이겠지.”
“네, 이미 적들이 물러갔지만, 요새가 복구될 때까지 당분간 이 주변에서 주둔할 것이라 합니다.”
“알았다.”
조나단은 곁에 있던 사울에게 말했다.
“참 어려운 싸움이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겼구나.”
“네. 모든 게 형님 덕분입니다.”
“너도 많이 애썼지. 너나 나나 참 고생 많았다.”
정말 고생이 많았다.
왕자로 다시 태어난 뒤, 이렇게 절박하게 싸운 적은 없었다.
“형님은 이제 어쩌실 겁니까?”
“나야 당분간 제르넬 요새에 머물러야겠지. 그보다 넌 어떻게 할 생각이냐?”
“요새가 안정되면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가.”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전쟁이 끝난 건 아니다.
제르넬 요새는 물론 율렌 섬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사울은 슬슬 떠날 때임을 직감했다.
* * *
예정대로 구원군은 제르넬 요새 인근에 장기간 주둔하기로 했다.
이 정도면 다시 가멜다 왕국이 쳐들어와도 별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제르넬 요새에 각종 물자도 전달되었다.
새로 요새에 비축할 식량과, 식수. 그리고 각종 의약품이었다.
그중에서도 사울의 눈길을 끄는 물건이 있었다.
“이게 다 악마 토끼풀인가.”
“네, 전하.”
수레 한 대에 악마 토끼풀이 가득 실려 제르넬 요새로 전달된 것이었다.
이래저래 악마 토끼풀과 악연이 있는 사울이라 보기만 해도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악마 토끼풀이 요새에 들어오는 것을 제지할 수는 없었다.
악마 토끼풀은 강한 쾌락만큼이나 강한 중독성을 가졌고, 남용하면 목숨마저 잃을 수 있다.
하지만 율렌 섬을 통틀어 악마 토끼풀보다 강력한 진통제는 찾기 어려웠다.
물론 치료 마법으로 상처를 빨리 낫게 하거나, 연금술사가 심혈을 기울여 조제한 약으로 통증과 상처를 다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건 몇몇 중상자나 사울 같이 선택받은 사람뿐이다.
일반 병사들은 당장 목숨이 위험하지 않는 한, 당장 큰 고통을 느껴도 치료 마법이나 연금술의 도움을 받기 어려웠다.
이럴 때 널리 쓰이는 게 악마 토끼풀이었다.
부작용은 크지만, 당장 지옥 같은 고통에 시달리는 병사에게는 ‘악마’가 아닌 ‘천사’의 손길과도 같았다.
때문에 킬리안 비셔스가 등장하기 전에도 율렌 섬에서는 악마 토끼풀이 널리 쓰였다.
전장에서 악마 토끼풀을 접한 병사가 전장에서 돌아온 후 악마 토끼풀 맛을 잊지 못해 다시 손을 대었다 중독자가 되는 경우도 흔했다.
그러한 풍토 속에 등장한 게 킬리안이라는 괴물이었고, 그가 사업을 키우고, 악마 토끼풀을 더 널리 퍼뜨리며 율렌 섬 전체에 독을 뿌렸다.
‘그러고 보니 킬리안의 소식을 들은 지 오래되었군.’
사울 귀에 킬리안의 소식이 들려온 지는 꽤 오래되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은 아닐 것이다.
킬리안 같은 놈이 뒷골목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고 그대로 묻혔을 리는 없다.
어디엔가 암약하며 자신에게 복수하거나, 혹은 율렌 섬에 새로 독을 뿌릴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을까.
사울은 악마 토끼풀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악마 토끼풀 관리는 철저히 하도록. 꼭 필요한 곳에서만 쓰도록 하고.”
“네, 전하!”
명령을 하는 사울도 알고 있었다.
지켜지기 어려운 명령이라는 것을.
당장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악마 토끼풀을 쓸 테고, 그 때문에 중독자가 되어 삶을 망치는 병사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의 고통을 참기 어렵기에 악마 토끼풀을 쓸 수밖에 없다.
결국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요새를 살펴보던 사울은 아이나가 머무르고 있는 숙소로 향했다.
“아이나, 몸은 좀 괜찮은가요?”
“네, 괜찮습니다.”
베일과의 대결에서 큰 부상을 입은 아이나는 지금까지 요양 중이었다.
사울보다 입은 상처도 컸고, 또 사울처럼 치료 마법사들이 돌아가며 하루 종일 관리해 주지는 않은 탓이었다.
그래도 여유 있을 때마다 치료 마법사들이 도와주었고, 덕분에 많이 나아졌다.
특히 눈에 띄는 상처가 많이 줄어들었다.
“흉터는 남지 않을 것이라던가요?”
“네.”
“다행이군요. 혹시 그대의 몸에 흉터라도 남으면 영주를 볼 면목이 없었을 테니.”
사울은 아이나가 후송된 후 처음 병문안하였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아이나는 불과 얼음에 휩쓸려 온몸이 상처투성이었다.
남자 귀족이라면 전장에서 입은 흉터를 자랑으로 삼을 수 있지만, 여자 귀족은 그렇지 않다.
전장에서만 살 것이라면 흉터 따윈 별문제가 아니겠지만, 사교계에서는 말 그대로 사형 선고다.
지금은 전사로 살고 있는 아이나지만, 영주의 딸이니 빠르든 늦든 사교계 활동을 해야 할 몸이다.
그런 아이나의 얼굴과 몸 곳곳이 화상으로 일그러진 모습은 정말 보기 안쓰러웠다.
“적들은 물러갔고, 그대는 큰 공을 세웠어요. 무엇보다 내 목숨을 구해 주었지요. 그대와 홉킨스 가문 모두에 감사를 전하고 싶어요.”
사울의 말에 아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부족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나요?”
“네, 마검사와 싸우면서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냉정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사울은 쓰게 웃었다.
“마찬가지예요.”
“전하…….”
“나도 마검사와의 싸움에서 확실히 느꼈어요. 세상에는 진짜 괴물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아직 그 괴물을 상대하기엔 턱없이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사울은 눈으로는 아이나를 바라보며 손으로는 자신을 도와준 반지를 쓰다듬었다.
아이나와 반지, 그리고 이 자리에 없던 카스텔의 전폭적인 도움까지 받았다.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살아남은 게 고작이다.
물론 살아남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지지 않고, 적들을 물리쳤다는 게 위안이기는 했다.
하지만 최강의 적 앞에서는 무력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점 또한 절실히 느꼈다.
“하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해요. 비록 우린 역부족이었지만 그래도 마검사를 막았고, 이 전투에서 이겼으니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전하.”
“그럼 몸조리 잘해요.”
병문안을 마치고 나온 사울은 카스텔과 마주쳤다.
카스텔의 인사를 받으며 사울은 문득 궁금해졌다.
카스텔은 이번 전투를 어떻게 평가할지.
“선생님은 이번 전투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부족한 것투성이었습니다.”
아부란 걸 할 줄 모르는 카스텔이니 박한 평가가 나왔다고 놀랄 건 없다.
“맞아요. 내가 최강자라거나, 적수가 없다는 생각은 해 본 적 없지만… 역시 마검사는 괴물이었어요.”
사울의 말에 카스텔은 고개를 저었다.
“전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럼요?”
“부족한 건 바로 저입니다. 전하가 마검사보다 약한 건 당연한 일이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하를 지켜드려야 했는데.”
“…….”
순간 사울은 말을 잃었다.
‘마검사보다 약한 게 당연하다’는 적나라한 말을 들은 탓이 아니다.
카스텔이 자신의 약함을 자책하는 이유가 스스로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신 때문이라는 점이었다.
“그렇군요. 아이나와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어요.”
“저는 더 강해지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것입니다. 아가씨도 전하를 지키려면, 그러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겁니다.”
할 말이 없어진 사울은 카스텔과 헤어졌다.
‘과연 나는 카스텔에게도 복수할 수 있을까. 내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 준 그녀를.’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 노력하면서.
* * *
적군이 물러가고 며칠 후.
요새에서 할 일을 대충 마친 사울에게 루시아의 편지가 왔다.
편지 내용의 절반은 사울에 대한 치하였다.
나머지 절반은 새로운 임무의 제안이었고.
새로운 임무는 간단하다면 간단하고, 복잡하다면 복잡했다.
최근 전선이 확대되며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을 가리지 않고 주민들의 피해도 늘고 있다.
이에 주민들이 중립 지대로 피난을 가는 일이 잦고, 그 때문에 대신전에서 난민 문제로 회담을 요청했다.
루시아는 그 회담 대표로 사울을 지목했다.
‘대신전과의 회담이라.’
난민 문제로 인한 회담이라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기본적으로 대신전에서는 이 전쟁 자체를 반대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전쟁을 막을 수 없다면 먼저 중립 지대에 불똥이 튀지 않게 하려 노력할 것이다.
또 전쟁이 커지고, 또 길어지면 카멜 산 또한 전쟁에 신경을 쓰게 될 것이다.
아직 해결치 못한 ‘피닉스’라던가, 어둠의 세력 문제도 대신전이나 카멜 산과의 관계, 나아가 전쟁의 변수가 될 수도 있다.
대신전에서 회담을 한다면 이 모든 문제들을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하리라.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울에게 나쁜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전장에서 혹사한 몸을 완전히 회복시키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전장에 나서지 않으면서 새로운 공을 세울 기회가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최소한 일을 망치지는 않을 자신도 있었다.
사울은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카스텔, 아이나, 아르멜에게 전달했다.
모두들 반대하지 않았다.
“좋아. 그럼 잠시 쉴 겸, 모두들 대신전으로 가지.”
“네. 전하.”
사울은 조나단과 작별하고 다시 한번 대신전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