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상대가 괴물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어차피 괴물을 이기려고 싸우는 게 아니다.
지금은 괴물 마음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막는 게 최선이다.
“놈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해라!”
일단 소리 높여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당황한 병사들은 사울의 명령을 어떻게 따라야 할지 인지하지 못했다.
이에 사울은 좀 더 구체적으로 명령했다.
“쉬지 않고 계속 공격하라!”
분명 베일은 괴물이지만, ‘한 명의 괴물’이다.
한 명의 괴물을 계속 공격하면 실수를 하거나 빈틈을 내보일 수 있다.
빈틈을 만들지 못한다 해도, 베일 혼자서 성문을 때려 부수는 것은 견제할 수 있다.
사울의 명령을 알아들은 병사들은 베일의 집중 공격에 나섰다.
사울 역시 베일을 쫓으며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누구도 감히 베일과 직접 검을 맞댈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멀리서 활을 쏘거나 마법을 날리며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집중 공격 대상이 된 베일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날아오는 공격을 막아 내며 계속 움직였다.
그가 향한 곳은 성문 안쪽이 아니었다.
성문이 위치한 성벽 위였다.
“와아아아!”
동시에 성 밖의 적군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본 사울은 베일이 무엇을 노리는지 깨달았다.
‘안팎에서 동시에 칠 생각인가.’
베일 혼자만의 힘으로 성문을 깨려는 게 아니다.
성안에서는 베일이, 성 밖에서는 가멜다 왕국군이 함께 움직이며 안팎에서 성문을 들이쳐 부술 심산이다.
베일 혼자서 날뛰는 것보다 훨씬 막기 까다로워진 것이다.
적의 전략을 확실히 알게 된 사울은 명령을 바꿨다.
“병사들은 성 밖 공격을 막는 데 집중하라!”
“알겠습니다!”
결국 베일을 상대하는 건 자신과 일행의 몫인 모양이다.
명령을 내린 사울은 베일을 쫓았다.
“으아악!”
베일은 순식간에 성문 위를 정리했다.
성문을 지키려 모여 있던 병력 절반은 당했고, 나머지 절반은 흩어졌다.
“성벽을 부숴라!”
외부의 공격도 더욱 치열해졌다.
돌과 화살, 마법 세례가 성문과 성벽으로 쉬지 않고 쏟아졌다.
“성문을 보강하라!”
“적 궁수를 공격하기에 앞서 마법사와 공성 병기부터 공격하라!”
요새에서도 전력을 다해 방어에 나섰다.
마법으로 성벽을 보강하고, 성문이나 성벽에 위력적인 공격을 퍼붓는 마법사와 공성 병기에 공격을 집중했다.
성문을 중심으로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는 가운데, 사울과 베일도 움직였다.
베일은 요새 안의 병사들, 그중에서도 마법사들을 먼저 노렸다.
마법사들이 성 바깥을 공격하는 아군을 성가시게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죽어라!”
마법사 한 무리를 포착한 베일이 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사울은 마법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막을 만들어 날렸다.
사울이 만들어 보낸 방어막과 베일이 날린 불꽃과 얼음이 충돌했다.
쾅!
굉음과 함께 사울의 방어막이 산산조각 났지만, 베일의 공격을 한 번은 막아 냈다.
보통 방어 마법은 1회용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 번이나마 공격을 막아 낸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후훗.”
베일은 냉소를 흘리며 사울 쪽으로 검을 겨누었다.
사울, 그리고 곁에 있는 카스텔과 아이나부터 끝장내겠다는 심산이었다.
“죽어라!”
외침과 함께 다시 베일이 검을 휘둘렀다.
몇 차례 허공을 벤 검의 궤적에 따라 불꽃과 얼음이 여러 방향으로 날아갔다.
일부는 마법사들을 향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사울과 카스텔, 아이나를 향했다.
한 번에 네 번이나 공격을 퍼붓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한 마리도 못 잡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베일은 네 마리 토끼를 노렸고, 그 공격 하나하나가 강하고 또 정확했다.
사울은 다른 시도는 엄두도 못 내고 베일의 공격을 막는 데만 전념했다.
간신히 공격을 막아 냈지만,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다.
그사이 베일이 몸을 날렸다.
사울과 다른 일행을 지나, 마법사 무리를 노린 것이었다.
사울은 그런 베일을 막을 수가 없었다.
대신 카스텔이 재빨리 베일의 공격을 막은 뒤 반격에 나섰다.
몇 가닥의 마법 촉수가 베일의 발목을 붙잡으려 했지만, 이번에는 한발 늦었다.
베일은 자신을 노리는 마법 촉수를 피하면서 마법사 무리에 뛰어드는 데 성공했다.
“으아악!”
잠깐 사이에 열 명도 넘는 마법사들이 모조리 쓰러졌다.
그 광경을 본 사울은 안타깝고, 또 기가 막혔다.
‘미친 괴물 같으니라고.’
대체 어떻게 해야 저 괴물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지금은 기적이 벌어지지 않는 한 막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아군이 지원을 올 때까지 어떻게든 버티는 게 최선이었다.
‘지금은 버텨야 해. 전세가 기울어지면 베일도 마음대로 날뛸 수 없을 테니까.’
지금 베일은 꽤 무리하고 있다.
홀로 요새 안에 뛰어들어 와 날뛰고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해지는 건 이쪽이 아니라 저쪽이다.
게다가 혼자서 요새 안에 뛰어들어 날뛰는 전략을 두 번은 쓸 수 없을 것이다.
저쪽에서는 말 그대로 한 번만 쓸 수 있는 비장의 수를 꺼내 들었고, 시간도 많지 않다.
이번만 버텨 낸다면 승기를 잡을 수 있다.
“어떻게든 버텨요.”
사울의 말에 카스텔도, 아이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베일을 죽이는 게 아니라 버텨 내면서 서문을 사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한편 베일은 베일대로 사울 쪽의 생각을 읽은 모양이었다.
베일이 검을 치켜들자 검에 휩싸인 불과 얼음이 맹렬히 소용돌이쳤다.
검이 번득이며, 불과 얼음이 사울을 덮쳤다.
사울을 노리면 카스텔과 아이나까지 함께 노릴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사울과 아이나는 전력을 다해 방어했다.
그것만으로도 힘이 부족하여 카스텔이 도와야 했다.
카스텔은 스스로를, 그리고 사울과 아이나를 지키며 베일을 견제하고 공격하는 역할까지 떠맡았다.
쉽지 않은 역할이지만, 카스텔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카스텔의 손에서 뻗어 나온 촉수가 베일의 공격을 뚫고 그의 몸을 노렸다.
베일은 검을 휘둘러 자신에게 날아오는 촉수를 쳐 냈다.
다시 사울에게 공격이 향하려는 찰나, 마법 촉수가 다시 베일을 덮쳤다.
그렇게 몇 차례의 공방이 오갔다.
어느 쪽도 상대를 무너뜨리거나, 무너지지 않았다.
이대로만 가면 충분히 시간을 끌 수 있을 듯했다.
“……!”
반면에 베일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급해졌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많은 시간이 남지 않은 건 분명했다.
언제 전황이 뒤바뀔지 모른다.
‘나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가.’
홀로 요새에 들어온 지금까지도 베일은 스스로 위험한 상황에 놓였다 생각하지 않았다.
사울이나 카스텔, 아이나의 공격도, 다른 녀석들의 공격도 모조리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스스로 안전을 챙기면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적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셌다.
이름 모를 마법사나 병사들 따위는 별것 아니다.
지금도 간간이 마법이나 화살 따위가 날아왔지만, 별다른 위협이 되진 못했으니까.
문제는 사울과 카스텔, 아이나였다.
셋은 놀랄 만큼 손발이 잘 맞았고, 그를 바탕으로 계속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그저 발목을 잡을 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너무 거슬렸다.
사울이나 카스텔을 죽이거나 요새 서문을 무너뜨리거나.
둘 중 하나만 이뤄 내도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자신을 막아선 사울 일행을 처리하지 못하면 요새 서문을 무너뜨리기 어렵다.
사울 일행을 처리하려니 저들이 방어를 굳건히 하고 있어 뚫기가 쉽지 않다.
베일은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서문 파괴와 사울 등의 목을 베는 것.
둘 다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 둘 중 하나에 집중하겠다고.
결정한 베일이 힘을 끌어올렸다.
“이런.”
그 광경을 본 사울은 깨달았다.
베일이 엄청난 것을 쓰려는 것임을.
“막아요!”
사울의 말이 아니라도 카스텔도, 아이나도 깨달았다.
베일의 주변에서 요동치는 마나와 지금까지 날렸던 것보다 더 강해진 불꽃과 얼음의 기운이 엄청난 게 올 것임을 똑똑히 보여 주고 있었다.
“받아라!”
어마어마한 위력의 불꽃과 얼음이 사울 일행을 덮쳤다.
동시에 사울은 순간적으로 위화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당장은 눈앞의 공격을 막아 내는 데 전념했다.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끔찍한 불꽃 앞에 재도 안 남기고 타거나, 얼어붙고 찢긴 고깃덩이가 될 판이었으니까.
지옥에서나 볼 법한 뜨거운 열기와 뼛속까지 얼어붙게 할 법한 냉기.
무시무시한 공격이었지만, 사울은 버텼다.
자신의 실력과 카스텔의 도움, 그리고 공격이 생각만큼 정교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
사울과 아이나, 카스텔.
모두 살아남았다.
간신히 목숨만 건진 게 아니라, 큰 부상 없이 무사히 공격을 막아 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베일이 아니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공격이었지만, 이상하게 어설펐다.
무작정 힘을 쏟아 부어 마구잡이로 뿌린 느낌이랄까.
무술이든 마법이든 무작정 힘을 많이 쓰는 것보다 중요한 게 기술이다.
힘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같은 위력의 공격이라도 차이가 크다.
그런 의미에서 베일의 이번 공격은 형편없었다.
그래서 수상했다.
사울의 의심은 틀린 게 아니었다.
“전하!”
아이나가 큰 소리로 외쳤고, 카스텔은 이미 움직였다.
사울 일행이 공격을 막아 내느라 정신없는 사이, 베일이 움직인 것이었다.
베일은 다시 사울을 공격하지 않았다.
몸을 돌려 성문 쪽으로 향했다.
직접 성문을 공격하여 때려 부술 생각인 듯 했다.
사울은 그런 베일을 쫓았다.
비록 쫓는 입장이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적이 약해서 도망치는 게 아니니까.
사울의 예상대로 베일은 쫓기면서도 몇 번이나 공격을 해 왔다.
쫓기는 와중에도 베일의 공격은 무시무시했다.
한 방이라도 제대로 맞았다가는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정도로.
그렇게 추격전이 이어진 끝에, 베일은 요새 서문의 코앞에 다다랐다.
요새 성문은 크고 튼튼했으며 마법으로 보강되었다.
하지만 베일의 힘으로 작정하고, 그것도 안쪽에서 두들기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늦었나……?’
순간 사울은 절망적인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아직 절망하기는 일렀다.
“마검사를 막아라!”
“놈이 성문을 공격하지 못하게 해라!”
성문을 지키기 위해 배치되어 있던 마법사들이 지원에 나선 것이었다.
베일을 쓰러뜨릴 수는 없었지만, 잠시 발목을 잡기에는 충분했다.
그 틈을 타 사울 일행은 성문에 도달했다.
사울, 그리고 카스텔과 아이나는 성문 앞에서 베일을 가로막았다.
자신들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성문을 공격할 수 없게끔 말이다.
“빌어먹을.”
계획이 어긋난 베일도 빠르게 작전을 수정했다.
먼저 자신의 발목을 잡았던 마법사들을 공격했다.
잠깐 사이에 마법사의 절반이 쓰러지고, 나머지 절반은 기세에 눌려 전의를 상실해 흩어졌다.
“역시 대단한 놈이야.”
사울은 감탄했다.
비록 상대가 적이지만, 저 강함만큼은 경의를 표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말 그대로 개인의 힘으로 전장을 휘저으며 전황을 바꾸고 있지 않은가.
쾅! 쾅!
성문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성 밖에서 치열하게 성문을 두들기는 소리겠지.
성문과 성벽을 두들기는 소리에 병사들의 함성과 비명이 어우러져 주변은 아수라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