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생각 같아서는 곧바로 베일을 공격하고 싶었다.
하지만 베일을 공격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거리가 멀수록 정확도도, 위력도 낮아지는 법이다.
그래서 지금은 베일을 제대로 공격하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공격이 어렵다면 방어를 돕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사울은 서문 쪽의 아군을 지원하고, 피해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사울은 마법 방패를 여러 개 만들었다.
자신을 지키는 게 아닌, 서문 쪽의 성벽에서 분투하는 아군을 지키기 위한 방패였다.
“쏴라!”
요새의 서문을 공격하는 건 베일 혼자가 아니었다.
수많은 병력이 혹은 병기로, 혹은 마법으로 서문을 공격했다.
서문이 열리는 건 곧 요새의 함락을 뜻했으니까.
이에 아군도 서문에 집중 배치되어 적을 막는 데 열중이었다.
사울은 마법 방패를 아군 쪽으로 보냈다.
특히 마법사나 궁수처럼 당장 날아오는 공격에 취약한 쪽에 집중하여 보냈다.
마법 방패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중에서도 사울이 만든 마법 방패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형태였다.
밖에서 들어오는 공격은 막아 주고, 반대로 안에서 내보내는 공격은 통과하는 일명 ‘단방향 마법 방패’였다.
시전 난이도도 높고, 마나도 많이 들어 방어 마법 중에서 난이도가 높은 마법.
하지만 지금의 사울에게는 큰 문제가 없었다.
실력은 충분했고, 마나도 보충받을 수 있었으니까.
고난이도의 마법답게 단방항 마법 방패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베일의 공격은 막을 수 없었지만, 화살이나 마법 따위는 충분히 막아 냈다.
한 번 혹은 몇 번씩 날아오는 화살이나 마법을 막아 내고, 자신은 자유로이 공격할 수 있다는 건 병사들에게는 큰 위안이었다.
“잘하고 있다, 사울! 계속 도와다오!”
“네, 형님!”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아군을 살리고, 한 번이라도 적 공격을 막아 내야 한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이 요새를 지켜 내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사울은 쉬지 않고 계속 마법 방패를 만들어 아군에게 보냈다.
“으윽.”
계속 마법을 시전하던 사울은 몸 곳곳이 비명을 지르는 것을 느꼈다.
마나가 부족한 게 아니다.
회복이 덜 된 몸으로 과도한 마법을 쓴 탓에 육체에 무리가 간 것이다.
하지만 사울은 마법 시전을 멈추지 않았다.
아프다고 물러서기에는 너무나도 전황이 급박했다.
지금은 몸이 버틸 것이라 믿고 아낌없이 마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처절한 싸움은 계속되었다.
얼마나 많은 아군이 성벽 위에서 죽고, 또 얼마나 많은 적군이 성벽 밖에서 죽었는지 모른다.
결국 날이 저물 때까지 성문은 파괴되거나 적에게 넘어가지 않았고, 지친 적들은 물러갔다.
“적들이 물러간다!”
“우리가 이겼다!”
그제야 마법 시전을 멈춘 사울은 바닥에 주저앉으며 벽에 등을 기댔다.
“휴우…….”
“사울, 괜찮으냐?”
“네. 형님은 괜찮으십니까?”
“나도 괜찮다.”
조나단도 마냥 괜찮지는 않았다.
크게 다친 곳은 없지만, 목이 쉴 대로 쉬어 마치 목이나 폐에 병이 있는 사람 같았다.
하루 종일 전장에서 지휘하며 소리를 지른 탓이다.
사울처럼 조나단도 할 수 있는 건 다한 것이다.
“형님이나 저나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네 말대로다. 둘 다 고생을 한 보람이 있군.”
곧 전령이 달려와 보고해 왔다.
적들은 물러갔고, 오늘 다시 공격해 올 기미는 없다고 했다.
피해가 적다고 할 수는 없었다.
적잖은 아군이 죽거나 다쳤고, 요새 역시 곳곳이 파괴되었다.
하지만 당분간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듯했다.
“사울. 곧 회의를 할 거다. 너도 참석하거라.”
“네. 형님.”
* * *
오늘도 요새가 넘어가지 않은 것을 기뻐할 시간도 없이 회의가 열렸다.
참석할 수 있는 모든 요새의 주요 인물들이 회의에 참석했다.
사울은 미리 아르멜 등과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고는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에 앞서, 조나단은 모두에게 치하의 말을 건넸다.
“그대들 덕분에 오늘도 무사히 이 요새를 지켜 낼 수 있었다. 이에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감사합니다, 전하.”
조나단 바로 옆자리에 앉은 사울을 비롯하여 회의에 참석한 모두가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지금까지 그대들과 병사들의 영웅적인 항전은 나도, 또 나라에서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적들은 물러가지 않았다. 앞으로 적들을 물리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을 구한다.”
사울은 생각하고 있는 게 있지만, 곧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 특히 조나단 측의 의견이 궁금했다.
실제로 먼저 입을 연 건 조나단 휘하의 기사들이었다.
“이대로 며칠만 더 버티면 적들이 물러가지 않겠습니까?”
“아군 피해보다 적 피해가 더욱 큽니다. 또 성벽도 금방 복구되고 있으니 적들도 질렸을 겁니다.”
낙관론을 이야기하는 자도 있었지만, 반대인 자도 있었다.
“그렇게 쉽게 물러갈 리 없습니다.”
“전황이 크게 바뀌거나, 지원군이 도착하지 않는 한 놈들은 결코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사울 역시 전투가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적들도 무리해서 이 요새까지 왔다.
거기에다 당장 물러날 만큼 상황이 급한 것도 아니다.
물러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오기 전까지는 끝까지 요새를 공격할 것이다.
그렇다면 조나단은 어떻게 생각할까.
“음… 조금만 버티면 전황이 크게 유리해지지 않을까.”
조나단이 중얼거림을 들은 사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지나치게 전황을 낙관적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때론 낙관론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
하지만 지금 같은 때에 대장이 대책 없이 상황을 낙관하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사울은 조나단에게 조심스럽게 조언했다.
“형님, 제 생각에는 아직 적의 기세가 꺾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느냐?”
“네, 아직 적 병력도 많고 거기에다 마검사도 함께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군.”
“물론 형님 말씀대로 버티다 보면 승기를 잡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제대로 버티기 위해서라도 적의 기세를 꺾을 필요가 있을 겁니다.”
다행히도 조나단은 사울의 조언을 기분 나쁘지 않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렇군. 네 말대로다. 당분간은 적의 공세가 계속되겠지. 그렇다면 적의 공세를 막거나, 기세를 꺾으려면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적이 쉽사리 물러가지 않을 것이라 말했던 조나단 휘하 기사들이 다시 의견을 냈다.
“지금은 계속 버티는 게 최선이 아니겠습니까?”
“아직 병력도 부족하지 않고, 군량과 물자도 충분합니다. 성문이 열리거나 성벽이 깨지지 않는 한 충분히 버틸 수 있습니다.”
“음…….”
조나단은 마뜩잖은 표정이었다.
형제인 사울도 조나단의 진의를 읽기는 쉽지 않았다.
눈빛만으로 속내를 알아차릴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조나단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그가 원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조나단은 큰 공을 세우기를 원한다.
물론 요새를 끝까지 지키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공이다.
하지만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쫓아 보낸다면 요새를 지킨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공이 될 것이었다.
‘형님이라면 그것을 노리고도 남지.’
요새를 지키는 수준을 넘어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혀 패퇴시킨다.
할 수만 있다면 반드시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요새 전력으로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사실 조나단의 생각은 사울의 생각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아르멜이나 카스텔은 일주일이 고비인데, 일주일을 버티는 건 쉽지 않다고 봤다.
오늘 전장에 나와 보니 사울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성벽 곳곳이 무너지고 방어가 흐트러지는 게 뚜렷했다.
사망자를 제외해도 성안의 병사 절반이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고 있을 정도였다.
왕자인 사울은 집중 치료를 받기라도 했지, 병사들은 부상을 입어도 최소한의 치료만 받고 다시 전장에 나서는 판이었다.
매일 무너진 성벽을 복구하고, 수비병을 교대하고 있지만 머잖아 한계가 찾아올 것이다.
사울은 아르멜에게 눈짓을 했다.
사울의 눈짓을 본 아르멜이 말했다.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좋다.”
조나단의 허락을 받은 아르멜이 말했다.
“전하의 말씀대로 당분간은 적의 공세가 계속될 것이며, 적의 공세가 치열하게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적들의 기세가 영원하지는 않겠지만, 냉정히 말해 무너진다면 요새 쪽이 먼저 무너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적의 기세를 무너뜨릴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적 기세를 무너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적의 수뇌부를 제거하는 것이겠지요.”
조나단이 물었다.
“마검사를 제거하자는 말이냐?”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겁니다. 당장 적 기세를 꺾을 수도 있고, 나아가 이 전쟁의 판도를 뒤바꿀 수도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마검사를 무너뜨리긴 어렵지요. 따라서 지금 저희가 제거해야 할 건 베일보다는 세드 메로빙거 자작 쪽일 겁니다.”
“세드 메로빙거 자작을 제거하는 건 가능하다고 보나?”
“자작을 제거하지 못해도 그를 공격하여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면 그것만으로도 적 기세를 꺾을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은 아르멜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다.
사울과 의논을 한 끝에 결정한 전략이다.
기회를 봐 아르멜의 입에서 전략을 말하게 한 것도 사울의 생각이었다.
사울이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나서면 조나단이 경계할 수 있지만, 루시아의 직속 부하인 아르멜이라면 조나단도 경계하진 않을 테니까.
예상대로 조나단은 자신이나 직속 부하가 아닌 아르멜의 의견임에도 무시하지 못했다.
자신의 생각과 크게 어긋나는 의견도 아닌 데다, 아르멜이 루시아를 뒷배로 두고 있기 때문이리라.
“메로빙거 자작도 상당한 실력자라고 들었는데, 놈을 제거할 수 있겠나?”
“시도할 가치는 충분할 겁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이것을 봐 주십시오.”
자리에서 일어난 아르멜이 지도를 펼쳤다.
요새 주변이 그려진 지도에서, 아르멜은 요새 서문 쪽을 짚었다.
“현재 적 주력의 절반 이상이 서문 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검사 베일도 이곳에 있지요.”
“그렇지.”
“그리고 메로빙거 자작은 남문 쪽 적 진영에 있을 겁니다.”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세드와 베일이 따로 움직이고 있다는 건 비밀도 아니다.
베일이 주 전력과 함께 요새 서문을 공격하고, 세드를 비롯한 지휘부는 비교적 안전한 남문 쪽에서 남문을 공략하며 동시에 부대 전체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조나단은 아르멜이 말하는 바를 알아챘다.
“적 전력이 서문 쪽에 집중된 사이, 우리는 전력을 몰아 남문으로 치고 나가 메로빙거 자작을 공격한다?”
“그렇습니다, 전하.”
현재 적의 지휘부는 꽤나 기형적인 구조다.
부대 전체를 지휘하는 건 세드 자작이지만, 지원군인 베일 쪽이 그 이상의 존재감을 갖고 있다.
그 불협화음을 이용하자는 것이다.
존재감이라면 베일 쪽이 압도적이지만, 그래도 부대 전체를 지휘하는 건 세드다.
세드를 죽이거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면 적 부대 전체가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과연. 하지만 이쪽의 움직임을 적들이 눈치채지 않을까?”
“네. 이 전략을 실행하려면 우리도 주력군을 둘로 나누어야 합니다. 한쪽은 서문에서 베일을 막고, 다른 쪽은 남문으로 나가 적을 기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력을 둘로 나눈다라…….”
“일단 카스텔 씨는 서문에 있어야 합니다. 베일과 맞상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또 서문 쪽에 상당한 전력을 남겨 두어야 합니다. 아군이 메로빙거 자작을 공격하기 전에 서문이 깨지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즉 남문의 전력은 소수 정예로 움직일 필요가 있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군.”
“그렇습니다. 서문을 지키는 역할도, 남문에서 적을 공격하는 역할도 모두 중요합니다. 이번 작전이 성공한다면, 공 또한 똑같이 나누어야 하겠지요.”
“옳은 말이다.”
조나단이 문득 사울에게 물었다.
“사울, 네 생각은 어떠냐?”
애초에 아르멜의 의견은 사울의 의견이기도 했다.
“좋은 전략이라 생각합니다. 형님이 허락하신다면 말입니다.”
“그런가…….”
“저는 형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버티기만 하면 적을 물리치기 어려우니, 다소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공은 조나단에게 넘어갔다.
의견을 받아들이느냐, 또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조나단의 반응에 따라 사울 역시 행동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얼마 후, 조나단의 입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