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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175화 (175/232)

175화

“적 별동대의 상황은 어떤가?”

“절반 가까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고, 일부는 포로로 잡았습니다.”

보고를 받은 세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전투에서는 가멜다 왕국이 이겼다.

베일은 사울이나 카스텔 등을 상대로 밀리지 않았고, 오히려 우위를 점했다.

도중에 적 지원군이 오지 않았더라면 전투에서 승리했을 테니 말이다.

또 적 별동대는 상당한 피해를 입고 남은 자들도 모두 제르넬 요새로 쫓겨 갔다.

아군과 적이 입은 피해를 봐도, 또 전투의 결과를 봐도 이번 전투의 승자는 가멜다 왕국이었다.

하지만 기대 이하의 결과이기도 했다.

적 별동대에 적잖은 피해를 입혔지만, 그래도 상당한 수준의 전력이 무사히 요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울 왕자나 카스텔 둘 중 하나라도 죽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 또한 실패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공성전이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제르넬 요새는 굳건했다.

적 별동대의 방해를 받지 않고 공성전을 벌이게 된 건 다행이지만, 이쪽도 시간이 많지 않다.

아직 튼튼하고 병력도 적지 않은 제르넬 요새를 빠른 시간 내에 무너뜨릴 수 있을까.

‘쉽지는 않겠지.’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승전.

답답해하는 세드에게 또 하나 기뻐할 수 없는 소식이 전해졌다.

“가르시아 자작님이 오셨습니다.”

“모셔라.”

지금은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지만, 만나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세드와 베일은 마주 앉았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세드도, 베일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눌 만큼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다.

“크흠.”

어쨌든 주장인 세드가 먼저 헛기침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고생 많으셨소.”

“고맙소.”

일단 베일도 세드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베일의 악명을 고려하면,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고 해야 할까.

‘빌어먹을.’

세드는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베일도, 자신도 같은 자작 작위를 가지고 있다.

귀족의 권력이 막강한 가멜다 왕국에서는 극히 예외의 경우를 제외하면 작위가 그 사람의 지위를 결정했다.

나이, 경력, 능력보다 작위가 더 중요했다.

그러니 작위가 같은 세드가 베일에게 기죽을 이유는 없다.

작위도 같고, 나이와 경력은 세드 쪽이 위다.

뼈대 있는 가문 출신에, 남작에서 자작으로 스스로 올라갔을 만큼 능력도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베일은 일반적인 상식을 초월하는 존재였다.

작위 하나 없는 평민의 몸으로 갑자기 등장해 구국 영웅이 되어 높은 지위를 손에 넣은 자.

베일을 싫어하는 자는 가멜다 왕국에도 수두룩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함부로 그를 건드릴 수 없다.

다르센 왕국과의 전쟁이 재개되었고, 베일은 가멜다 왕국의 최강자니까.

물론 제르넬 요새 공격 부대의 대장은 세드고, 베일은 세드를 도와주러 온 손님이다.

하지만 세드는 베일을 ‘손님 대접’이 아닌, ‘상전 대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세드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풀었다.

“자작 덕분에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또 별동대를 모두 요새 안으로 쫓아 보낼 수 있었소.”

“…….”

“이제 저 요새만 깨트리면 우리 부대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요. 그리고 요새를 깨트리면 가장 큰 공은 당연히 자작의 몫이 될 거요.”

마침내 베일의 입이 열렸다.

“그것이 자작의 진심이오?”

“무슨 말씀이신지?”

“정말 내가 잘 싸웠다고 생각하오?”

“당연하지요. 자작님의 칼 앞에 검은 흉성도, 사울 왕자도 모두 쓰러지지 않았소. 아쉽게도 그들의 목을 베진 못했지만 아마 자작의 실력에 벌벌 떨고 있을 거요.”

“…….”

베일의 눈이 번득였다.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것이냐는 뜻인 듯했다.

아부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세드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내가 자작을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소?”

“도움 따윈 필요 없소. 나는 그대를 도와주러 왔지만, 동시에 그대의 명령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자율권을 보장받았소. 그러니 내 일을 방해하지 마시오. 나도 그대의 일을 방해하지 않을 테니.”

아무리 상전 대접을 해 줘야 할 베일이라지만, 이건 말이 지나쳤다.

하지만 세드는 다시 한번 인내심을 발휘했다.

화를 내 봐야 손해를 보는 건 자신이었으니까.

“물론 자작을 방해할 마음은 없소. 하지만 지금은 검은 흉성의 목을 베는 것보다, 저 요새를 함락시키는 것을 우선해야 하오. 나는 그러기 위해 파견되었고, 자작 또한 그러한 명령을 받고 온 게 아니오?”

“…그렇소.”

“물론 나는 자작을 방해할 마음이 없고, 또 자작을 돕고 싶소. 그러니 자작 또한 나를 도와주셨으면 하오. 다시 말하지만 결코 자작을 방해하지는 않겠소. 그저 요새를 깨트리는 것을 우선해 주시오. 전쟁이 이어지는 한, 검은 흉성의 목을 벨 기회는 언제든 있을 테니까.”

그제야 베일도 대화라는 것을 할 마음이 든 모양이었다.

“내가 뭘 하면 되겠소?”

세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일부터 공성전이 시작될 거요.”

“따로 생각해 둔 전략이 있소?”

“안타깝게도 없소. 요새 내부에 첩자를 들여보내는 것도 실패했고. 남은 건 철저한 정공법밖에 없소. 모든 전력을 동원해 가능한 빨리 요새를 깨부수면 우리의 승리고, 그렇지 못하면 우리가 지는 것이오.”

세드가 원하는 것을 알아들은 베일이 말했다.

“내가 요새 서문을 맡으면 되겠소?”

제르넬 요새는 서쪽과 남쪽에 두 개의 성문이 있다.

그중 서문 쪽의 방어가 굳건했다.

요새 구조상 서문이 뚫리면 바로 요새의 중심부까지 짓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문을 깨는 건 그만큼 어렵지만, 깰 수만 있으면 확실히 요새를 무너뜨릴 수 있다.

특히나 포위망이 깨지지 않은 채 서문이 깨지면, 요새의 중요 인물들도 모조리 사로잡거나 죽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사울 왕자나 조나단 왕자, 카스텔까지.

“그게 좋겠소.”

“그럼.”

더 할 말이 없는지 베일은 인사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는 베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세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런 무례한 놈.’

왜 베일이, 나아가 가르시아 남매가 구국 영웅임에도 평판이 최악인지 너무나도 잘 알 것 같다.

예의는 잘 지켜도 음험한 성품을 가진 누나 마리안이 더 상종 못 할 작자라는 말도 있었지만, 이렇게 마주해 보니 베일이야말로 최악인 것 같았다.

‘왜 많은 귀족들이 저놈에게 이를 가는지 알 만하군.’

세드는 결심했다.

언젠가 베일, 나아가 가르시아 남매를 몰락시킬 기회가 찾아온다면 절대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고.

* * *

“공격하라!”

“와아아아!”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에 사울은 잠에서 깨어났다.

홀로 남은 병실에 치료 마법사 한 명이 꾸벅거리며 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봐.”

“네, 네!”

졸던 마법사가 화들짝 놀라 기립했다.

“밤새 나를 치료하였나?”

“네, 전하!”

“그렇군. 고생 많았다.”

“아닙니다!”

군기가 바짝 든 행동거지를 볼 때 군에 소속된 치료 마법사인 모양이었다.

그는 밤새 자신을 치료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는지 눈 아래에 다크서클이 선명했다.

“많이 지친 모양인데 무리할 필요는 없다. 바깥 상황이 궁금한데, 알아 와 주겠나? 그다음에는 쉬어도 좋다.”

“감사합니다. 전하.”

치료 마법사는 잠시 밖에 나갔다 돌아와 말했다.

“가멜다 왕국군이 요새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형님은?”

“조나단 왕자님, 카스텔 님, 그리고 이스마일 자작님과 홉킨스 가문의 아가씨까지 모두 전투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런가.”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적을 막아 내고 있다.

혼자만 침대에 누워 있기가 죄송스러울 정도였다.

사울은 몸을 일으켜 보았다.

부축 없이 혼자서 몸을 일으킬 수는 있었다.

몸 곳곳에 붕대가 감겨 있었지만, 붕대 상태는 비교적 깨끗했고 상처가 크게 아프지도 않았다.

상처가 많이 아물었다는 뜻이다.

치료 마법사가 고생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회복되진 않았을 것이다.

“네게는 고맙다고 해야겠군.”

“아닙니다. 제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혹시 오늘 내가 전투에 참여할 수 있겠나?”

“그게…….”

무슨 이유에서인지 치료 마법사의 안색이 핼쓱해졌다.

“왜 그러지?”

“…카스텔 님과 홉킨스 가문의 아가씨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절대로 왕자님을 이 방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고.”

치료 마법사는 명백히 겁먹은 표정이었다.

아마도 카스텔과 아이나가 단단히 일러둔 모양이다.

혹시나 사울이 전장에 나타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도 하지 않았을까.

“어쩔 수 없군.”

사울은 씁쓸하게 웃으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사실 아직 전장에 나설 몸 상태도 아니다.

지금은 나가 봐야 짐만 될 뿐이다.

“전하.”

마침 새로운 치료 마법사가 병실을 방문했다.

“교대하자. 넌 이만 쉬어도 좋다는 명령이다.”

“알았어.”

교대된 치료 마법사는 곧바로 사울의 치료를 재개했다.

사울은 침대에 누워 자신의 몸에 흘러드는 치료 마법을 한껏 체감했다.

치료 마법은 정말 편리한 마법이다.

싸울 때가 아니면 쓸모가 적은 공격 마법과는 달리, 다치거나 병든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나 있으니까.

그만큼 전망이 밝은 마법이라 할 수 있지만, 동시에 희귀한 마법으로 꼽혔다.

웬만한 마법은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는 자신도 치료 마법 쪽은 거의 익히지 못했다.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치료 마법의 재능이 없던 탓이다.

심지어 카스텔도 치료 마법을 익혀 보려다 실패했다고 들었다.

그야말로 선택받은 소수만이 배우고 쓸 수 있는 마법이었는데 지금 그 혜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것이다.

“…….”

치료를 받으며 사울은 생각에 잠겼다.

오늘 하루 종일 치료를 받으면 내일은 다시 전장에 설 수 있을 것 같다.

몸이 완치되려면 며칠은 더 쉬어야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문제는 오늘이다.

과연 오늘 요새가 함락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공성 병기를 파괴하라!”

“적 마법사를 막아라!”

“마검사다! 놈을 집중 공격 하라!”

창칼 부딪치는 소리, 무언가가 부서지고 무너지는 소리.

사람이 죽고 다치는 소리, 지휘관이 목이 터져라 외치는 소리.

전장에서 울려 퍼지는 수많은 소리가 사울의 귀에도 고스란히 들려왔다.

전장을 볼 수는 없어도 돌아가는 상황이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크게 밀리지는 않는 건가.’

전황이 심각하다면 이미 사울에게도 언질이 왔을 것이다.

요새가 깨어져도 왕자까지 사로잡히면 안 되니까.

딱히 사울에게 아무 언질이 없는 것을 보면 최악은 아닌 모양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깜빡 잠들었다 깨어난 사울은 이미 날이 저물었음을 깨달았다.

싸우는 소리도 잦아들었고, 치료 마법사는 또 바뀌었다.

사울은 다시 한번 몸을 일으켜 보았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좀 더 수월했다.

당장 싸우는 건 무리겠지만 걸어 다닐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현재 전황은 어떤가?”

사울이 이렇게 질문할 줄 알았는지 치료 마법사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안심하십시오. 아직 요새는 무사합니다.”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적의 전력은 막강하며, 공성 병기는 물론 마검사까지 있다.

하지만 이쪽의 전력도 부족하진 않다.

요새도 튼튼하고 수비 병력도 충분하며 카스텔 등 별동대도 합류했다.

언젠가는 깨질지 모르지만, 하루 만에 깨질 요새는 아니었다.

“나에게 내려온 명령이나 당부 같은 것은 없었나?”

“안심하고 푹 쉬고 있으라고 조나단 왕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가.”

안심하고 푹 쉰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닐까.

쉬는 것까지는 몰라도 안심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어쨌든 사울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가능한 빨리 몸을 회복시킬 필요가 있었다.

다시 치료 마법사가 치료를 하는 가운데, 문득 인기척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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