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카스텔과 베일 사이의 우열은 명확했다.
“죽어라! 검은 흉성!”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검을 들이대는 베일.
이를 악물고 전력을 다하여 맞서는 카스텔.
누가 봐도 카스텔이 밀리는 싸움이었다.
베일은 지금의 싸움을 즐기고 있었다.
그가 즐기는 것을 넘어 전력을 내는 순간, 카스텔은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사울과 아이나가 전투에 끼어든 건 그때였다.
“베일!”
사울은 베일의 이름을 외치며 검을 뻗었다.
아이나도 옆에서 도끼를 던졌다.
두 사람의 전력을 다한 공격이 카스텔과 힘 싸움 중이던 베일을 덮쳤다.
베일은 당황하지 않았다.
여유를 잃지 않은 채 힘겨루기를 멈추고 몸을 뒤로 빼며 방어 태세를 취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카스텔도 전력을 다해 공격했다.
사울의 마법.
아이나의 도끼.
카스텔의 마법.
세 사람의 공격이 동시에 베일을 덮쳤다.
요란한 굉음과 함께 전장의 공기가 뒤흔들렸다.
“쓰러뜨렸나?”
“설마 당했나?”
다르센 왕국 병사들은 기대 어린 시선으로, 가멜다 왕국 병사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안개처럼 피어오른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베일의 모습이 드러났다.
“저럴 수가…….”
“역시 마검사다!”
다르센 왕국 병사들은 탄식을, 가멜다 왕국 병사들은 환호를 내질렀다.
베일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흙먼지를 좀 뒤집어썼을 뿐,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채였다.
“정말 괴물이군.”
사울은 그가 적이라는 것도 잊고 감탄했다.
이렇게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를 마주한 건 처음이다.
전생 때 만났던 전성기의 카스텔도 지금 눈앞의 베일보다는 약할 것이다.
강함의 끝을 짐작하기 어려운 대족장 세네카도 지금의 베일보다 강할지, 하다못해 맞설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겁을 먹은 건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손이 떨렸다.
하지만 사울은 냉정을 잃지 않았다.
어차피 싸워 이기는 건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버티고 살아남을 수는 있지 않겠는가.
자신과 카스텔, 아이나 세 명이 죽을힘을 다한다면 말이다.
“전하.”
카스텔이 사울 곁으로 다가왔다.
아이나 역시 말없이 사울 곁에 섰다.
“전하와 아가씨는 전력을 다해 방어에 집중하십시오.”
“네.”
“적에게 빈틈이 있는 것 같아도 함부로 움직이지 마십시오.”
호승심을 부릴 때가 아니다.
어차피 버티려고 온 것이지, 싸워 이기려고 온 게 아니다.
그렇게 셋이 정비하는 것을 본 베일이 말했다.
“이게 끝인가?”
“…….”
명백히 이쪽을 얕보고 있다.
허세가 아니라는 게 분했지만, 동시에 사울은 희망을 보았다.
어떤 경우에든 상대를 얕보는 건 약점이 될 수 있으니까.
‘잘하면 버틸 수 있을지 몰라, 아니, 꼭 버텨야 해.’
이런 전장에서 어이없이 죽을 수는 없다.
그런 최후는 전생 때 겪은 것으로 충분하다.
다짐한 사울의 마법 검과 반지가 동시에 번득였다.
베일은 속전속결로 싸움을 끝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가만히 상대의 공격만 기다리는 건 좋지 않은 전략임에도, 먼저 공격해 오지는 않았다.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카스텔은 방어에 집중하라 했지만, 상대가 아예 공격을 해 오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하지 않는가.
사울과 아이나, 그리고 카스텔까지 함께 공격을 퍼부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셋 모두 충분히 준비하고 전력을 다한 공격이다.
어지간한 적이라면 견디지 못하는 것은 물론, 뼈도 못 추릴 것이다.
하지만 베일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베일은 검을 휘둘러 날아오는 공격에 맞섰다.
사울의 마법도, 아이나의 도끼도, 카스텔의 마법마저도 베일의 손끝 하나 다치게 하지 못했다.
“실망이군.”
베일의 짧은 한마디는 마치 사신이 죽음을 선고하는 말처럼 들렸다.
“이제부터가 진짜인가.”
베일도 한없이 시간을 끌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을 끌면 유리한 건 사울, 나아가 다르센 왕국군이니까.
베일의 검에 서린 마법의 기운이 강해졌다.
동시에 베일의 시선이 사울 쪽을 향했다.
사울을 공격하는 게 세 명을 한꺼번에 공격하는 것과 같음을 깨달은 것이리라.
문득 베일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검의 궤적대로 불꽃과 냉기가 한 덩이로 뭉쳐 사울을 덮쳐 왔다.
각오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강하고, 빠르고,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피하기는 어렵다.
사울은 마나를 아낌없이 쏟아 부으며 전방에 방어막을 만들었다.
카스텔은 마법으로, 아이나는 방패로 역시 방어에 나섰다.
“윽…….”
공격을 막은 순간, 사울은 작게 신음했다.
역시 괴물 같은 힘이다.
혼자 막았다가는 말 그대로 뼈도 못 추렸으리라.
이어 베일이 몸을 날렸다.
베일의 쌍검이 똑바로 사울을 덮쳐 왔다.
쾅!
요란한 굉음과 함께 베일의 검이 멈췄다.
사울, 카스텔, 아이나 세 명의 필사적인 방어에 막힌 것이었다.
‘이대로는 금방 무너진다…….’
사울은 이렇게 강력하고 파괴적인 힘을 마주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구경하는 입장이 아닌, 맞서야 하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전력을 다하는 사울은 물론, 카스텔과 아이나의 몸까지 뒤로 밀렸다.
일방적인 공세를 퍼붓는 베일의 기세는 꺾일 줄 몰랐고, 빈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힘 싸움을 계속하다가는 셋 모두 베일의 검 아래 쓰러질 게 분명했다.
“……!”
그때 카스텔의 등 뒤에 마법의 창이 나타났다.
전력을 다해 베일의 공격에 맞서는 와중에 용케 반격을 준비한 것이었다.
드래곤도 꿰뚫을 수 있는 거대한 마법의 창 여러 자루가 베일을 덮쳤다.
베일도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공세를 멈추고 몸을 뒤로 빼며 검을 휘둘렀다.
베일의 검과 부딪치는 족족 마법의 창이 하나씩 소멸되었다.
그 틈을 타 사울은 일행과 함께 몇 발 물러난 뒤, 곧바로 마법을 시전했다.
베일을 죽이기 위한 공격이 아닌, 견제를 위한 공격이다.
아무리 강적이라도 방어 일변도로 나가는 건 좋지 못한 전략이다.
상대가 안심하고 전력을 다해 공격할 수 없도록 견제라도 계속할 필요가 있었다.
사울, 카스텔, 아이나 모두의 공격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베일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다.
몇 번 베일이 검을 휘두른 끝에 마법의 창도, 이어진 공격도 모조리 막혔다.
“…….”
온 전장이 침묵에 빠져들었다.
다르센 왕국의 병사들도, 가멜다 왕국 병사들도 베일의 괴력에 압도되었다.
저것이야말로 율렌 섬의 최강자다.
“슬슬 장난은 끝내지.”
사형 선고와 함께 베일은 더욱 힘을 끌어올렸다.
모든 것을 다 파악했고, 시간 낭비할 필요도 없으니 최대한 속전속결로 끝내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베일의 검에 서린 마법이 더욱 강해졌다.
사울은 계속 마법을 퍼부었다.
베일을 쓰러뜨릴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대했던 견제마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공격을 준비하는 베일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이었다.
“세 놈 다 죽여 주마!”
다시 베일이 몸을 날렸다.
다가오는 베일의 몸 전체에 불과 얼음의 기운이 넘쳐흘렀다.
대체 어떻게 저 막강한 힘에 대처할 수 있을까.
산전수전 겪은 사울도 이 순간만큼은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카스텔이 말했다.
“전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사울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스텔이 이렇게 말한다면,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믿었다.
곧 카스텔은 사울 곁을 떠나 베일을 공격했다.
그러자 베일은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당황한 건가?’
사울은 베일이 금방이라도 자신을 공격할 줄 알았다.
자신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카스텔 역시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지만, 그보다 연약하면서 왕자인 사울이보다 나은 먹잇감이었을 테니까.
설령 카스텔을 죽이지 못하고 사울만 죽여도 큰 전공을 세울 수 있다.
하지만 베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곧바로 사울을 덮치는 대신, 잠시 주저하다 몸을 틀었다.
사울이 아닌, 카스텔을 우선시했다.
“죽어라!”
베일의 검이 카스텔을 덮쳤다.
카스텔도 전력을 다해 막으려 했지만, 이번에는 힘이 부족했다.
검과 마법이 부딪친 순간, 카스텔의 몸이 멀리 날아갔다.
다행히 날아가면서 몸을 추스를 정도의 정신은 남아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사울은 카스텔이 떨어지자고 한 이유를 깨달았다.
지금 베일은 그렇게 냉정한 상태가 아니다.
자신의 위치나 현재 전황을 따지며 움직이기보다는 적을 죽이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또한 적들 중에서도 과거 맞수였던 카스텔을 죽이는 데 정신이 팔려 있다.
“그렇군.”
상황을 파악한 카스텔이 말했다.
“베일을 계속 공격해요.”
“알겠습니다.”
아마 베일은 계속 카스텔을 쓰러뜨리는 데 전념할 것이다.
왕자의 목을 취하는 것보다 과거의 맞수를 쓰러뜨리는 게 더 중요하다고 결정한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해 볼 만한 싸움이다.
베일을 쓰러뜨릴 수는 없겠지만, 버틸 수는 있을지 모른다.
사울과 아이나는 카스텔에게 결정타를 날리려는 베일에게 마법과 도끼를 날렸다.
베일의 전력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공격이었지만,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벌레 같은 놈들이!”
베일은 사울과 아이나 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강력한 공격에 두 사람은 전력을 다해 피하는 데 전념했다.
또 카스텔도 가만있지 않았다.
베일이 자신을 노리도록, 혹시나 사울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도록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비록 베일의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지 못했지만, 베일 역시 당장 사울이나 카스텔을 쓰러뜨리지 못했다.
몇 차례나 공방이 오갔음에도 승부는 쉽사리 나지 않았다.
그리고 전장 상황이 바뀌었다.
“와아아아!”
함성과 함께 일단의 병력이 달려왔다.
사울과 별동대를 구원하려 요새에서 보낸 병력이었다.
“빌어먹을.”
그제야 베일은 자신이 시간을 낭비했음을 깨달았다.
사울을 집중해서 노렸다면 지금쯤 사울을 베어 버렸을지 모른다.
과거 맞수인 카스텔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에 목표를 잘못 잡은 실수를 범했다.
‘네놈들이 그렇게 움직인다면……!’
전략을 바꾸기로 한 베일은 품에서 자그마한 구슬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바닥에서 깨진 구슬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눈부신 빛을 전장에 흩뿌렸다.
* * *
“저건?”
“신호입니다!”
가멜다 왕국의 진영에 있던 베일이 보낸 신호를 본 세드가 혀를 찼다.
‘멍청한 베일 녀석.’
세드가 보기에도 지금 베일의 행동은 현명하지 못했다.
사울 왕자를 노렸다면 왕자의 목이라도 딸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카스텔을 노리다 시간을 허비했고, 결국 적의 원군이 도착하고 말았다.
어쨌든 베일이 신호를 보낸 이상, 이쪽에서 그에 호응할 필요가 있었다.
“요새보다 별동대의 공격을 우선하라! 요새 공격에 방해가 되는 별동대를 쓸어버린다!”
“네, 자작님!”
세드가 이끄는 가멜다 왕국군이 별동대를 덮쳤다.
“…….”
순식간에 전장의 상황을 바꾼 장본인인 베일은 입술을 깨물었다.
본래 계획은 자신 혼자서 사울이나 카스텔 둘 중 하나, 혹은 둘 모두 처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둘 다 처리하지 못하고 결국 병사들이 부딪치게 되었다.
이대로 성과 없이 전투가 끝나면 본인의 체면이 크게 깎인다.
카스텔의 목을 베는 건 다음 기회로 미루더라도, 눈에 띄는 성과라도 거두어야 했다.
‘사울 왕자를 죽이거나, 하다못해 별동대라도 전멸시켜야 한다.’
결론을 내린 베일은 곧바로 사울을 향해 돌진했다.
카스텔이 아닌, 사울을 목표로 삼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