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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172화 (172/232)

172화

아직 보이지 않는 강적과의 거리는 멀었고, 느껴지는 기운도 희미했다.

하지만 멀리서 느껴지는 희미한 기운임에도 소름이 돋았다.

겁을 먹은 게 아니다.

강대한 힘을 감지한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 괴물이 있다고.

‘올 것이 왔나.’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은 알았다.

두 나라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지면 결국 가멜다 왕국은 ‘최강의 병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가르시아 남매가 전장에 나타나면 언젠가 그들과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왕자고, 곁에 카스텔도 붙어 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빨리 전장에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지금 느껴지는 기운은 하나뿐이다.

카스텔도 마리안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을 볼 때, 마리안은 전장에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베일 한 명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위협이었다.

마검사 베일 가르시아.

사울 혼자서 그를 상대하는 건 자살 행위다.

일단 사울은 은밀히 아이나와 로타를 불러 베일 이야기를 꺼냈다.

“마검사가…….”

아이나도, 로타도 놀란 가운데 입단속을 했다.

지금 전장에 마검사 베일이 나타났다는 건 엄청난 악재다.

너무 빨리 알려져서도 안 되고, 너무 늦게 알려져서도 안 된다.

모두들 마음의 준비를 한 가운데, 문제의 기운이 점점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강적이 온다!”

“모두들 준비하라!”

‘마검사 베일’의 존재를 느꼈지만, 지금은 그 이름을 병사들에게 언급하지 않았다.

만에 하나 상대가 베일이 아닐 가능성도 있을뿐더러, 베일 같은 강자가 적에게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사기가 떨어질 우려가 있었으니까.

“놈입니다.”

카스텔의 말과 함께 멀리서 한 남자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크고 당당한 몸을 빈틈없이 뒤덮은 짙은 보랏빛 판금 갑옷을 입고, 한 손이 아닌 양손으로 다뤄야 할 거대한 검 두 자루를 양손에 나눠 쥔 남자.

그 위풍당당한 모습에 여기저기서 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 설마…….”

“마검사인가…….”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남자의 정체를 눈치 챈 병사들이 적지 않았다.

로타는 카스텔에게 다가와 말했다.

“카스텔 씨.”

“네.”

“잘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로타도 카스텔과 베일의 관계에 대해 잘 알았다.

과거 카스텔이 가르시아 남매에게 패했고, 지금은 전보다 약해진 상태라는 것도.

반면에 베일은 6년 전쟁 시절보다 더 강해졌다고 했다.

지금의 카스텔이 베일과 싸워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카스텔 말고는 믿을 사람이 없었다.

무작정 머릿수로 밀어붙인다고 이길 상대는 결코 아니다.

‘검은 마녀가 마검사 상대로 조금이라도 버티길 기대해야겠군.’

카스텔이 베일과 맞서 싸워 최대한 시간을 번다.

그러는 사이 요새의 지원군이 도착하여 함께 적들을 물리친다.

이것이 지금 로타가 생각하는 최선의 전략이었다.

반면에 사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지금 카스텔이 베일을 이길 순 없을 거야. 오래 버틸 수라도 있다면 일대일 결투도 해 볼 만하겠지만… 그것도 어려울 테고.’

카스텔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울이다.

또 베일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조사를 한 적 있고, 지금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카스텔은 베일을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아니, 이기는 건 고사하고 오래 시간을 끄는 것조차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카스텔이 당해 버린다면?

자신의 목숨도 위태롭다.

적이 전장에서 왕자를 죽이거나 사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하겠는가.

이 자리에서 목이 달아난다면 모든 게 끝이다.

요행히 목숨을 건져 포로가 된다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적국의 왕자 포로라면 쓸모가 있으니 바로 죽이지는 않겠지만, 이용물로 전락할 것이다.

죽거나 사로잡히거나.

어느 쪽이든 사울의 목표와는 한없이 멀어지는 일이다.

그렇다면…….

결정한 사울은 아이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아마 우리도 선생님과 함께 싸워야 할 것 같아요.”

“네?”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어요. 다 함께 싸워서 살아남느냐, 아니면 다 함께 죽거나 사로잡히느냐 뿐.”

“…….”

실전 경험이 풍부한 아이나는 사울의 말뜻을 금방 알아들었다.

그래서 사울의 말이 틀렸다고 부정하지 못했다.

자신은 물론, 사울까지 함께 목숨을 걸고 싸워야 저 괴물을 상대할 수 있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전하.”

“고마워요.”

싸울 준비를 하는 사울은 문득 카스텔의 시선을 느꼈다.

“…….”

카스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울이 무슨 일을 하려는 지 짐작한 모양이었다.

잠시 눈빛이 흔들리는 듯했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사울의 뜻을 꺾을 수도 없고, 그보다 나은 의견을 낼 수도 없다는 뜻이리라.

대신 카스텔은 몇 발 앞으로 나섰다.

가능한 혼자서 해 보겠다는 뜻이었다.

“…….”

이럴 때마다 사울은 기분이 묘해졌다.

카스텔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사울을 지키려 하고 있다.

물론 다르센 왕국의 은혜를 받은 자가 왕자를 목숨 바쳐 지키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전생의 악연을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마침내 괴물이 다가왔다.

“검은 흉성! 사울!”

베일의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그가 양손에 쥔 검에 마법의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희뿌연 마나가 피어오르다 이내 두 개의 속성으로 화했다.

불과 얼음.

한 가지 속성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지만, 두 속성이 적절히 합쳐지면 더욱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한다.

“저, 저게 마검사의 힘인가…….”

여기저기에서 겁에 질린 탄식이 흘러나왔다.

병사들은 물론, 병사들을 독려해야 할 장교나 기사들마저 겁먹은 표정이 역력했다.

용기를 내기에는 베일이라는 괴물의 악명이 너무 높았고, 또 눈에 보이는 위용이 너무나도 막강했다.

“…….”

그런 가운데 조용히 카스텔이 나섰다.

아군 진영 맨 앞에 선 카스텔과 베일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과거의 맞수가 다시 전장에서 마주쳤다.

“후훗.”

카스텔을 본 베일은 냉소와 함께 두 검을 치켜들었다.

카스텔도 지지 않고 두 손을 치켜들었다.

먼저 베일의 두 검이 교차했다.

한쪽 검의 불꽃, 다른 쪽 검의 얼음이 한 덩이가 되어 맹렬히 타오르고, 또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드는 불과 얼음의 폭풍이 되어 적에게 날아갈 준비를 마쳤다.

카스텔도 지지 않고 맞섰다.

그녀가 뻗은 양손에서 피어오르는 검푸른 기운은 수십 가닥의 촉수가 되어 베일을 노렸다.

두 괴물의 첫 번째 공격.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

보기 전부터 결과를 짐작한 사울은 로타에게 명령했다.

“이쪽으로 날아올 마법에 대비하라고 하세요.”

“네, 전하.”

사울의 말뜻을 알아들은 로타가 마법사들에게 방어 명령을 내렸다.

“죽어라!”

베일의 외침과 함께 불과 얼음의 폭풍이 카스텔을 덮쳤다.

거의 동시에 카스텔의 촉수도 베일을 덮쳤다.

거대한 힘과 거대한 힘의 충돌.

두 힘이 부딪치는 순간 어마어마한 굉음이 전장을 뒤흔들었다.

멀리 떨어진 사울도 귀가 먹먹해지고, 공기가 진동하는 것을 뚜렷이 느꼈다.

그리고 충돌의 결과는 사울의 예상대로였다.

“이쪽으로 온다!”

“으아악!”

불과 얼음이 폭풍이 촉수를 압도했다.

카스텔도 폭풍에 휩싸이고, 나아가 카스텔 후방의 아군까지 덮쳤다.

명령을 받은 마법사들이 황급히 방어 마법을 시전했다.

사울 또한 직접 방어 마법을 시전하며 아군을 보호하는 데 힘을 보탰다.

미리 준비해 둔 덕분에 아군의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당장 피해가 없다고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힘 싸움에서 카스텔이 크게 밀렸고, 나아가 공격의 여파가 정면으로 아군을 덮쳤다.

역시 베일은 상상 이상의 괴물이었다.

카스텔마저도 당해 내기 어려울 만큼 말이다.

“서, 설마 검은 마녀가 죽었나?”

폭풍에 휩싸인 카스텔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행히 카스텔은 무사했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꿋꿋이 선 카스텔의 모습이 드러났다.

옷이 좀 찢어지고 그슬렸지만, 큰 부상은 없어 보였다.

반면에 베일은 멀쩡했다.

갑옷에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채 카스텔을 비웃었다.

“고작 이 정도인가?”

“…….”

“곧 너는 죽을 것이다. 그리고 사울 왕자도, 다른 녀석들도 모조리 지옥 길동무로 만들어 주지!”

카스텔은 베일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도발 따윈 소용없다는 듯,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베일 역시 검으로 그런 카스텔에 답했다.

다시 한번 불과 얼음의 폭풍, 그리고 촉수가 충돌했다.

베일도 카스텔도 첫 번째 충돌보다 많은 힘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긴 건 베일이었다.

“마, 막아라!”

“으아악!”

폭풍은 카스텔을 휩쓴 것으로 모자라 다르센 왕국군까지 덮쳤다.

아군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 넓게 쳐진 방어막은 그만큼 약했고, 이번 폭풍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방어막 곳곳이 뚫리며 폭풍에 휩쓸린 병사들이 죽고 다쳤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울이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도 준비를 해야겠어요.”

“네, 전하.”

사울과 아이나는 비슷한 예상을 했고, 그 예상이 맞았다.

폭풍이 가라앉은 자리에 카스텔은 없었다.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거나, 뼈도 남기지 못한 채 죽은 건 아니었다.

제 자리에서 버티거나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베일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후훗.”

베일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카스텔의 의도는 뻔했다.

지금처럼 거리를 두고 공방을 이어나가면 카스텔이 이길 확률이 전혀 없다.

게다가 다르센 왕국군도 지속적으로 큰 피해를 입을 것이다.

즉, 아군이 휘말리지 않는 다툼으로 만들어 나갈 심산인 것이다.

베일은 카스텔이 던진 미끼를 물어 주었다.

어차피 카스텔만 죽이면 끝나는 싸움이었다.

베일은 불과 얼음에 휩싸인 검을 휘두르며 카스텔에게 돌진했다.

순식간에 둘의 거리가 좁혀졌다.

“죽어라!”

불길과 냉기가 휘감긴 두 검이 한꺼번에 카스텔을 덮쳤다.

거대한 힘을 넓게 퍼뜨리는 게 아니라 검에 집중시킨 만큼 그 위력은 조금 전 공격을 아득히 초월할 것이었다.

카스텔도 지지 않고 두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 주변에 검푸른 기운이 방패 형상으로 나타나 날아오는 검을 막았다.

또 한 번 요란한 굉음과 함께 공기가 진동했다.

“……!”

순간 베일의 눈이 커졌다.

카스텔은 베일의 공격을 막아 냈다.

그것도 완벽하게.

베일은 놀란 것도 잠시, 곧 미소지었다.

“제법이군.”

“내 차례다.”

카스텔의 주변에서 검푸른 빛이 피어올랐다.

베일의 공격을 막아 움직임을 봉인한 채 반격에 나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베일도 가만있지 않았다.

그의 눈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카스텔을 찍어 누르는 두 검에 실린 힘이 더욱 강해졌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사울은 아이나에게 말했다.

“지금이에요.”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움직이려 하자 놀란 로타가 말했다.

“전하,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선생님을 도와야지요.”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알아요. 하지만 저대로는 선생님이 곧 당할 테고, 그러면 모든 게 끝장이에요.”

“저, 전하.”

“구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끌 테니 자작은 계속 병사들을 지휘해요.”

사울의 말은 의논이 아닌 명령이었다.

사울의 마음을 바꿀 수 없음을 깨달은 로타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부디 조심하십시오.”

“자작도요.”

그렇게 사울과 아이나도 움직였다.

그 광경을 본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전하께서 싸우시려는 건가?”

“홉킨스 가문의 아가씨도 함께야!”

모두의 걱정 섞인 시선과 함께 사울은 아이나와 함께 두 괴물의 전투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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