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생각을 정리한 사울이 말했다.
“상황이 바뀌었으니 작전도 바꿔야겠어요. 요새의 병력이 우리의 두 배고, 형님 성격상 우리가 위기를 당하면 외면하지 않을 테니까요.”
“미끼 역할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미끼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쉽지는 않을 거예요. 미끼보다는 견제 역할이 나을 것 같아요.”
적 지휘관 세드 메로빙거 자작은 영민한 사람이다.
어설픈 미끼 작전 따위에 넘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일단 요새 근처에서 주둔하며 적을 견제하는 게 좋겠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사울과 로타가 이끄는 별동대는 요새 근처에 진지를 세웠다.
오래잖아 적군도 요새 주변에 도착했다.
적군의 도착 소식에 사울은 소수의 인원과 함께 정찰을 나갔다.
“역시 만만치 않군.”
멀리 펼쳐진 적진의 모습을 살펴본 사울이 중얼거렸다.
만만치 않으리라 예상했지만, 그 이상이었다.
정보대로 적 병력 규모는 5천 명이었다.
거기에다 군기가 잘 갖춰진 정예병이었고, 공성 병기에 마법 전력까지 충실했다.
어설픈 미끼 작전 따위를 수행하려다가는 순식간에 전멸당할지 모를 판이었다.
한참 적진을 살피던 사울에게 카스텔이 경고했다.
“더 이상 들어가면 위험합니다.”
“그렇군요. 이만 돌아간다!”
지금 눈앞의 적은 머리 나쁜 몬스터나 도적 따위가 아니다.
유능한 적장이 이끄는 수천의 정규군이다.
함부로 움직이는 건 말 그대로 목숨을 내다 버리는 짓이다.
그렇게 정찰을 마치고 돌아오니 조나단이 보낸 전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전하께서 일단 적의 공격을 막아 내어 사기를 꺾은 뒤 반격을 하는 게 좋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당장은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요새를 지키는 데 협조하라고 하셨습니다.”
사울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카스텔, 아이나, 그리고 로타도 반대하지 않았다.
무작정 공격하기에는 적 전력이 너무 강해 보였으니까.
“그렇게 하겠다고 전해라.”
“네, 전하!”
전령이 돌아가고, 사울은 요새 지원 준비에 들어갔다.
적군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여러 가지다.
전군을 몰아 요새를 두들길 수도 있고, 병력을 나누어 일부는 사울이 이끄는 별동대를 막고, 나머지는 요새를 두들길 수도 있다.
혹은 요새를 공략하는 데 방해가 될 별동대부터 쓸어버리려 할 수도 있다.
적장 메로빙거 자작은 어떤 작전을 쓸까.
짐작하기가 쉽지 않았기에 당장 방비를 튼튼히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요새도 요새지만 우리도 공격 목표가 될 수 있으니 방비를 단단히 해야겠어요.”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사울은 날이 저물 때까지 진지를 세우고 방어 태세를 갖추는 것을 감독했다.
그렇게 날이 저물었고, 밤이 깊어갔다.
만에 하나를 생각하여 갑옷도 벗지 않고 휴식을 취하던 사울은 요란한 소리에 눈을 떴다.
“전하! 적의 기습입니다!”
“…생각보다 빠르군.”
이럴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기에 방비 태세를 갖추었고, 쉬면서 갑옷도 벗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너무 빨랐다.
아군이나 적군이나 막 요새에 도착한 직후라 곧바로 기습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말이다.
사울이 급히 천막 밖으로 나가니 이미 곳곳에서 창칼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곳곳에서 켜진 횃불과 마법 불빛 덕분에 아군 진영은 대낮처럼 밝아졌고, 덕분에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다.
사울은 재빨리 모여든 호위 병력과 함께 이동했다.
적군이 그런 사울을 발견하고는 외쳤다.
“저기 사울 왕자가 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적들의 친절한 외침 덕분에 사울은 적들의 목표를 파악했다.
자신을 죽이거나, 하다못해 부상을 입히는 것.
왕자를 죽이거나 부상을 입히는 것만으로도 다르센 왕국군의 예봉을 꺾는 효과가 있을 테니 말이다.
상황도 아군에게 썩 유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적의 숫자가 예상보다 많았다.
‘아군의 두 배, 아니, 그 이상이다.’
적 병력이 아군보다 많다지만, 이런 야습 작전에 많은 전력을 투입하는 건 웬만한 각오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즉, 그만큼 적들도 이번 작전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분하지만 한 방 먹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적에게 한 방 먹었다고 손 놓고 있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사울은 먼저 자신에게 달려드는 병사들부터 상대했다.
안전을 위해 자신을 호위하는 병력에게서 크게 멀어지지 않은 채 마법으로 적들을 공격했다.
“으아악!”
기세 좋게 사울에게 달려들던 적 병사 몇이 마법에 당해 쓰러졌다.
더군다나 사울 주변에는 다른 실력자들도 있었다.
“한 놈도 전하께 접근시키지 마라!”
이런 상황에 익숙한 아이나는 사울을 지키는 도끼이자 방패가 되었다.
달려드는 적을 상대하면서, 또 사울의 안위까지 틈틈이 살피며 싸워 나가는 그녀의 도끼 앞에 여럿의 적이 쓰러졌다.
그리고 가멜다 왕국군에게 악몽과 같은 존재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흉성이다!”
카스텔이 뻗은 두 손에 검푸른 기운이 여러 가닥으로 나뉘어 적들을 덮쳤다.
피하는 자도 있었고, 막는 자도 있었지만 대부분 제대로 막거나 피하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졌다.
기세등등하던 적군도 카스텔 앞에서는 기세가 꺾였다.
카스텔은 과거 6년 전쟁 시절처럼 무시무시한 가면을 쓰지는 않았다.
게다가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 그때보다는 약했다.
하지만 맨 얼굴을 드러내고 과거보다 약할지언정, ‘검은 흉성’의 위엄은 사라지지 않았다.
잠깐 사이에 카스텔에게 당해 쓰러진 적이 수십 명은 되었으니까 말이다.
“후퇴하라!”
결국 사울을 노리고 공격하던 적군은 버티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사울도 다른 곳을 살필 여유가 있었다.
다행히 두 배 이상의 병력 차이에도 아군의 전열은 무너지지 않았다.
한 방 먹기는 했지만, 적의 공격을 잘 버텨 냈다.
마침 지원군도 왔다.
“지원군이다!”
조나단이 보낸 지원군이었다.
이에 힘을 얻은 별동대도 더욱 견고하게 적의 공격에 맞서 싸웠다.
적들도 끈질겼다.
별동대가 쉽게 무너지지 않고 지원군까지 나타났음에도 쉽게 무너지거나 물러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전공을 세우겠다는 듯 이곳저곳에서 전투를 이어 나갔다.
응원군 덕분에 한숨 돌린 사울은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지금 이 부대에서 최강의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자신과 직속 병력을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적과 부딪쳐 나갔다.
얼마나 싸웠을까.
적들에게 새로운 마법을 준비하던 사울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명의 적이라도 더 베어라!”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자주 들은 목소리는 아니지만, 인상 깊었던 사람이라 똑똑히 기억했다.
“세드 메로빙거 자작인가.”
사울의 말에 카스텔이 물었다.
“적의 우두머리에게 가시겠습니까?”
“그러지요.”
개인적으로 만나 보고 싶기도 했고, 어쩌면 이 자리에서 적 우두머리의 목을 벨 기회가 생길 수도 있다.
물론 상대도 비슷한 생각을 하겠지만,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사울은 휘하 병력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이동했다.
오래잖아 예상했던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역시나.”
겉보기에는 평범한 중년 남성처럼 보이나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적.
세드 메로빙거 자작이었다.
세드의 모습을 본 카스텔이 손을 뻗었다.
여러 갈래의 검푸른 기운이 일제히 세드를 노리고 날아갔다.
웬만한 실력자가 아닌 한 막거나 피하기 쉽지 않은 공격.
하지만 세드는 가볍게 날아오는 공격을 피해 냈다.
또, 공격을 피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화살을 카스텔에게 날리며 반격까지 했다.
마나가 실린 화살은 어지간한 갑옷과 방패도 단숨에 꿰뚫을 수 있는 위력을 담은 채 카스텔에게 날아왔다.
물론 반격을 예상하고 있던 카스텔이 막지 못할 공격은 아니었다.
한 번의 공방을 주고받은 카스텔이 중얼거렸다.
“제법이군.”
확실히 그랬다.
사울 주변에 호위 병력이 포진해 있듯, 세드 주변에도 호위 병력이 포진해 있었다.
병력도 적고 상황이 급하지도 않은 사울 쪽에서 무리하게 적을 공격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사울과 세드는 멀리서 눈을 마주쳤다.
“오랜만에 뵙소이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유감이군.”
예전에는 협상을 위해 만났지만, 이제는 전장에서 적으로 만났다.
기회만 된다면 목을 베어야 할 상황이지만, 세드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다.
“요즘 당신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소. 아주 유명해지셨더군.”
“그래서 내 목을 베려고 왔나?”
“그렇소. 가능하다면 이 자리에서 당신의 목을 베겠소!”
사울도 세드도 서로를 노려보며 무기를 쥐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섣불리 공격하지 않았다.
말로는 목을 베니 어쩌니 해도, 지금은 승부를 낼 때가 아님을 양쪽 모두 잘 알고 있었던 탓이다.
결국 세드 쪽이 먼저 물러났다.
동시에 가멜다 왕국군 전체가 물러나기 시작했다.
“전하, 적들이 후퇴하고 있습니다!”
“아군 상황은?”
“별동대는 대기 중이고, 조나단 왕자님의 본대가 이제 막 도착했습니다!”
가멜다 왕국군이 조금만 늦게 물러났어도 사울과 조나단의 협공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재빨리 물러난 게 분명했다.
‘역시 얕볼 수 없군.’
세드가 만만치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 이상이다.
일단 사울은 별동대 수습에 나섰다.
한참 수습을 하고 있던 사울에게 조나단이 찾아왔다.
“사울!”
“형님.”
전투에 휘말리지 않은 조나단은 깨끗한 갑옷 차림으로 사울을 맞았다.
“괜찮으냐?”
“형님 덕분에 무사합니다.”
“다행이다. 적들도 모두 후퇴했다는구나. 영악한 놈들.”
“저도, 이스마일 자작도, 놈들이 지금 덮칠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늦지 않은 덕분에 모두들 무사할 수 있었구나.”
사울은 굳이 ‘형님이 크게 한 일은 없다’며 따지지 않았다.
늦지 않게 조나단이 와 준 것만으로도 확실히 도움은 되었으니까.
갑옷에 먼지도 안 묻힌 주제에 생색내는 건 아니꼬웠지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역시 적들의 전력이 만만치 않은 것 같아요. 적장인 메로빙거 자작도 만만하지 않고.”
“그럼 너도 요새 안으로 들어오는 게 어떠냐?”
“그 정도는 아니에요. 지금처럼 함께 움직이면서 적들을 상대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조나단은 사울의 전략에 크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알았다. 매일 전령을 보내마.”
“네, 형님.”
그렇게 조나단은 군대를 이끌고 요새로 돌아갔다.
로타가 사울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전하, 정리가 다 끝났습니다.”
“아군의 피해는?”
“사망자와 후송이 필요한 부상자를 합쳐 백 명 정도입니다.”
적의 기습 한 번에 아군 병력의 10분의 1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물론 적도 비슷한 수준의 피해를 입었겠지만, 적은 아군보다 병력이 더 많지 않은가.
“부상을 입은 자들은 요새로 후송하고, 경계 태세를 엄히 하도록.”
“네, 전하.”
사울은 기습을 마친 적군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것 같군.”
* * *
가멜다 왕국군의 기습으로 시작된 제르넬 요새 공방전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한 차례 과감한 기습을 감행한 가멜다 왕국군은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공성전 준비에 들어갔다.
병력을 둘로 나눠 절반은 사울이나 조나단의 움직임을 틀어막고, 나머지 절반은 공성 병기를 설치하며 요새를 포위했다.
사울도, 조나단도 적들이 마음대로 하도록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요새가 포위되면 양측의 연락이 끊어지기에 부단히 움직였다.
사울 휘하의 부하들도 바삐 움직였고, 때론 사울이 직접 나서기도 했다.
“적을 공격하라!”
“놈들이 돌파하지 못하도록 막아라!”
먼저 요새를 완전히 포위하려는 적들을 막기 위한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