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아군과 적군이 주변에서 이리저리 뒤엉켜 있다면 ‘큰 것’을 날리기 어렵다.
하지만 지금은 아군과 적군이 뚜렷이 나뉘어져 있다.
아군 본대는 적 본대와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사울이 이끄는 별동대는 아직 한 명도 공관이 있는 건물 안으로 뛰어들지 않았다.
지금은 적 건물을 하나하나 수색하고 소탕하는 방식으로 시가전을 펼칠 필요는 없다.
때가 되었음을 안 사울이 명령했다.
“선생님, 시작하지요!”
“네.”
사울, 그리고 카스텔은 약속이나 한 듯 화염 마법을 준비했다.
적 병력이 아닌 건물을 초토화시키려면 역시 화염 마법 만한 게 없다.
사울과 카스텔 주변에 불덩어리가 피어올랐다.
두 사람의 실력 차이를 보여주듯 카스텔이 만든 불덩어리가 숫자도 더 많았고 크기도 더 컸다.
크기와 위력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두 사람이 시전한 마법은 같았다.
파이어 볼.
폭발하는 불덩어리를 날리는 마법.
건물을 파괴하거나, 그 안에 숨은 적을 쫓아내거나 소탕할 때 가장 효율적인 마법이다.
“막아라!”
이대로 가면 주변이 초토화될 것임을 깨달은 가멜다 왕국군이 태세를 바꿨다.
다르센 왕국군 본대를 상대하던 병력까지 한꺼번에 별동대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막지 않으면 끝장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늦었어.’
사울은 승부가 났다고 생각했지만 방심하지는 않았다.
“방어 태세를 갖춰라!”
사울의 명력에 모든 병력이 사울과 카스텔을 지키기 위해 주변에 모였다.
이어 두 사람이 만들어 낸 불덩어리가 곳곳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쾅! 쾅!
불덩어리가 폭발할 때마다 건물을 파괴하거나 불을 질렀다.
때로는 건물 자체가 파괴되기도 했고, 건물은 버텨도 불길이 주변을 불태웠다.
이에 건물 안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놀라 뛰쳐나오기까지 했다.
가멜다 왕국군에도 마법사는 있었다.
날아오는 불덩어리를 막는 자들도 있었고, 이미 불이 붙은 곳을 끄려는 자들도 있었다.
문제는 가멜다 왕국군에는 카스텔은 커녕 사울만큼의 실력자도 없다는 점이었다.
두 사람의 합공은 이 전장의 모든 가멜다 왕국군 마법사가 힘을 합쳐도 막을 수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카스텔과 사울, 둘 중 한 명이라도 쓰러뜨리는 것뿐이었다.
“두려워 말고 밀어붙여라!”
가멜다 왕국군이 전력을 모아 별동대를 밀어붙이면서 순간적으로 별동대가 위기에 빠졌다.
아무리 실력자들이 모였어도, 20명으로 300명 가까운 병력의 일제 공격을 막는 건 쉽지 않았다.
가멜다 왕국이 고용한 이종족 용병도 힘을 보탰다.
엘프, 드워프, 오크, 코볼트 등 여러 이종족이 자신들의 특기를 이용해 공격해 왔다.
“전하!”
날카로운 활 시위 소리와 아이나의 외침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아직 살아 있는 엘프 용병이 있었는지, 마나가 담긴 화살이 사울을 노리고 날아왔다.
아이나의 방패가 사울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하나 막았다.
하지만 날아온 화살은 두 발이었고, 방패로는 한 발의 화살만 막았을 뿐이었다.
이에 아이나는 도끼를 휘둘러 두 번째 화살까지 쳐 냈다.
그 틈을 노린 드워프 용병이 짧은 다리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속도로 접근해 왔다.
사울을 노리려면 아이나를 노려야 한다는 듯, 아이나를 노리고 도끼를 휘둘렀다.
방패도, 도끼도 화살을 막는 데 휘두른 아이나로선 그런 드워프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기가 어려웠다.
“끅!”
둔탁한 소리와 함께 드워프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사울이 준비한 마법을 날린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사울은 파이어 볼로 건물을 파괴하는 것 또한 멈추지 않았다.
덕분에 아이나도 몸을 추스르고는 계속 싸워 나갈 수 있었다.
“전하를 지켜라!”
“적이 마법을 쓰지 못하게 해라!”
별동대는 사울을 지키기 위해, 가멜다 왕국군은 사울을 쓰러뜨리기 위해 싸웠다.
전투가 이어지는 가운데 가멜다 왕국 공관은 점점 파괴되고 불타 올랐다.
마침내 멀쩡한 건물은 한 채도 남지 않았다.
모든 건물이 불에 타거나 부서진 것이었다.
누구도 건물 안에 숨을 수 없다.
지금 눈에 보이는 적들이 전부다.
전황을 살펴보던 사울은 생각했다.
‘이겼군.’
처음부터 아군 전력이 열세인 건 아니었다.
사울과 카스텔이 있는 한, 전력으로만 따지면 오히려 우위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적이 단단히 방어 태세를 갖추었고, 또 이종족 용병이라는 변수가 있다는 점이었다.
또 건물에 숨어 있는 적을 소탕하는 시가전이 벌어지면, 그 또한 변수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모든 변수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가능한 모든 전력을 쏟아 부어 전투를 빨리 끝내는 게 피해를 줄이는 길이다.
가멜다 왕국군도 저울추가 기울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자신들은 이미 큰 피해를 보았고, 그에 비해 다르센 왕국군의 피해는 경미하다.
사울이나 카스텔을 죽인다면 한 번에 승부를 뒤집을 수 있지만, 여전히 철통같이 보호받는 사울이나 카스텔을 죽이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오래잖아 사울이 예상한 결과가 나왔다.
“후퇴하라!”
후퇴 명령과 함께 적들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물론 사울은 그들을 곱게 보낼 생각이 없었다.
“추격할 수 있는 데까지 추격하라!”
“네, 전하!”
이미 가멜다 왕국 외교 공관은 ‘공관이었던 곳’이 되었다.
모든 건물이 불타고 파괴되어 잿더미만 남았다.
덕분에 다르센 왕국군은 매복 등을 걱정하지 않고 적을 쫓을 수 있었다.
* * *
얼마 후.
모든 것을 파괴하고 적들을 쫓아낸 사울은 승전 보고를 받았다.
“아군 사망자는 스무 명입니다.”
아군의 10분의 1이 사망했다.
승전 치고는 피해가 적지 않았다.
그만큼 적들의 저항 또한 거셌기 때문이리라.
“적 사망자는 얼마고, 포로는 얼마나 되나?”
“사망한 적의 숫자는 약 백 명. 포로로 오십 명을 잡았습니다.”
“절반 정도로군. 포로 중 이종족이 있나?”
“몇 명 있습니다.”
“그들을 한번 보고 싶군. 데려와라.”
곧 이종족 포로들이 사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종족은 달랐지만, 하나같이 피와 흙먼지로 더럽혀진 처량한 몰골이었다.
“그대들은 왜 가멜다 왕국 편을 들었지?”
“…….”
“대답하지 않는다는 건, 이쪽의 처분에 군말 없이 따르겠다는 뜻인가?”
사울의 질문에 드워프 포로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할 말은 없소. 당신도 우리가 왜 싸웠는지 알고 있지 않소.”
“그래, 알고 있다. 그대들은 돈이 필요해서 용병이 되었고, 다르센 왕국에 칼을 겨누었지. 조국에 대한 충성심 같은 건 상관없이.”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변명할 말은 없다는 것이로군.”
이야기를 하는 드워프 포로처럼 당당한 포로도 있었지만,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흘리는 포로도 있었다.
사울 개인적으로는 비굴하지 않고 당당한 태도를 취하는 쪽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마음에 든다고 잘 대해 주고, 반대로 비굴해 보인다고 가혹하게 대할 수는 없다.
율렌 섬에서 포로는 다음과 같이 다음과 같이 대했다.
두 나라의 정규군이라면 일단 살려서 압송했다.
그 후 포로 처리는 양국의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포로 교환이나 몸값 지불 등을 통해 운 좋게 방면될 수도 있고, 혹은 강제 수용소 등에서 오랫동안 노동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종족 용병이 포로로 잡히면 이야기가 달랐다.
인간이 아닌 이종족, 그것도 정규군이 아닌 용병이라는 이유로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이종족 용병 포로는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는 게 보통이었다.
이는 다르센 왕국도, 가멜다 왕국도 다르지 않았다.
“전하, 저것들은 이 자리에서 처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대 대장 노릇을 맡았던 외교관이 사울에게 물어 왔다.
하지만 사울은 고개를 저었다.
“일단 저들도 함께 압송하도록 해요.”
“이종족 포로들도 말입니까?”
“그래요.”
“저들을 살려 두어 어디에 쓰실 생각입니까?”
“대족장과 거래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외교관도 대족장 세네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확실히 포로 문제를 대족장과 의논한다면 무언가 좋은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
“알겠습니다. 그럼 포로들을 모두 압송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요.”
* * *
사울은 중립 지대에서의 가멜다 왕국 세력을 본격적으로 사냥하기 시작했다.
가멜다 왕국 쪽도 쉽사리 물러서지는 않았다.
구심점을 잃고 절반의 병력을 잃었지만, 남은 절반의 병력을 요충지에 모아 끝까지 버티려 하였다.
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뒤였다.
구심점을 잃은 가멜다 왕국 세력은 중립 지대에서 점점 밀려났고, 마침내 눈에 띄는 세력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전하, 엘토 숲에서 주둔하고 있던 가멜다 왕국군도 일소되었습니다.”
“이제 중립 지대에서 가멜다 왕국 세력은 모두 사라진 것이지?”
“눈에 띄는 세력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몇몇 첩자를 통해 첩보 활동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의 유의미한 행동은 어려울 겁니다.”
중립 지대에서 가멜다 왕국 세력이 일소되었다.
이 결과가 앞으로의 전쟁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모른다.
하지만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은 확실하다.
“좋아. 왕국에 승전보를 올리도록.”
“네, 전하. 그리고 카멜 산에서 답변이 왔습니다.”
“대족장이 보냈나?”
“그렇습니다.”
사울은 세네카가 보낸 편지를 읽어 보았다.
편지 내용은 간단했다.
‘이종족 포로를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세네카에게 먼저 편지를 보낸 건 사울이었다.
이종족 포로를 잡아 둔 뒤 처분을 물었고, 그에 대한 답변이 왔다.
“포로는 살려 달라는데 단지 그것뿐이군. 거래를 하고 싶으면 거래 조건을 이야기할 법도 한데… 그런 말은 없고. 어떻게 생각해?”
질문을 받은 아르멜은 잠시 생각 후 말했다.
“대족장다운 답변입니다. 대족장 개인적으로는 동족이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지만, 카멜 산의 우두머리로서 공적인 요구나 거래를 하기는 어렵다는 뜻이겠지요.”
“내 생각도 같아. 아무튼 대족장이 그들을 죽이지 않길 원하니 살려 두도록 하지.”
“네. 언젠가 대족장과 협상이나 거래를 할 때 쓸모가 있을 테니까요.”
“좋아. 다음 안건은?”
“왕녀 전하께서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아르멜이 루시아의 편지를 내밀었다.
뜯어보니 익숙한 필체로 한 가지 사항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곳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제르넬 요새로 이동하라는군.”
“조나단 왕자님께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그런 말은 없어. 그저 중립 지대의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제르넬 요새로 이동하라고만 적혀있을 뿐.”
루시아는 무언가를 확신하면서 속내를 감추는 사람은 아니다.
그것이 공적인 일이라면 더더욱.
그런 루시아가 이처럼 두루뭉술한 편지를 보냈다는 건 무언가 확실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동시에 사울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고.
“누님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그럴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조나단 전하는 뭐랄까…….”
“못 미덥다고?”
사울의 노골적인 말에 아르멜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울은 작게 웃었지만 아르멜의 말을 농담으로 여기지는 못했다.
조나단이 무능한 건 아니지만, 다소 못 미더운 건 사실이니까.
“이곳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제르넬 요새로 가겠어. 준비하도록”
“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