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더니 무능한 적국 왕자였다-161화 (161/232)

161화

일리 있는 말이었다.

분명 피닉스는 세상을 바꾸려 하고 있다.

그들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이든, 평화로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에스타는 ‘질서’라고 말했지만, 달리 표현하면 ‘기득권’이라고 부를 수도 있으니까.

차라리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는 게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는 데 유리하지 않겠는가.

“대신관님의 말이 옳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한 일이에요. 내가 피닉스라면, 세상이 더 혼란스러워지기를 바랄 텐데.”

“어쩌면 그자들은 저나 전하의 생각과 다른 존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지도요. 하지만 위험한 존재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요.”

“물론입니다, 전하. 저희 대신전에서도 피닉스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알게 되면 꼭 전하께도 알려드리겠습니다.”

“부탁해요.”

에스타와 헤어진 사울은 자신이 쓰던 방으로 돌아왔다.

에스타의 말을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신전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을 모아 다시 한번 검토해 보았다.

하지만 에스타가 말한 것 이상의 쓸모 있는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다.

정보는 카멜 산에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만나고 싶었던 신관 아미스는 마침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사울은 아미스에게 만나고 싶다고 편지를 남긴 뒤 곧장 카멜 산으로 향했다.

* * *

카멜 산에 도착한 사울은 예전과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눈에 보이는 풍경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것은 산을 지키는 자들의 눈빛과 표정이었다.

예전에 사울 일행을 맞이할 땐 정예병답게 단호하고 엄격한 표정이었지만, 지금은 예전보다 더 단호하고 엄격해진 느낌이었다.

다른 일행도 비슷한 것을 느꼈다.

“아르멜.”

“네, 전하.”

“최근 카멜 산에 무언가 큰 일이 터진 게 있던가?”

“그런 정보는 없었습니다.”

바깥에 알려질 만큼 큰 일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졌다.

아마 큰 일이 벌어졌지만 바깥에는 알려지지 않았다던가, 무언가 위기를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도 사울을 박대하지 않았다.

사울 일행은 예전처럼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대족장 세네카를 만날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하.”

“오랜만입니다, 대족장님.”

찾아온 사울이 그렇듯, 세네카도 가벼운 만남이 아닌 ‘회담’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곧 사울과 일행들, 그리고 세네카와 호위대장 모데아를 비롯해 사울에게도 낯익은 카멜 산의 거물들 여럿이 마주 앉았다.

“산의 분위기가 좀 무거운 것 같더군요.”

사울의 말에 세네카는 순순히 사정을 밝혔다.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전 병력에 비상을 걸었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요?”

“귀국과 가멜다 왕국 사이의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럴듯한 이유다.

율렌 섬에 전운이 고조되어, 실제 큰 전쟁이 벌어진다면 카멜 산에 언제 불똥이 튈지 알 수 없다.

지난 ‘6년 전쟁’ 때도 가르시안 남매가 이끄는 군대와 카멜 산의 군대가 부딪칠 뻔한 적 있다고 들었다.

“그렇습니다. 전쟁은 이미 기정사실입니다. 문제는 언제, 어디서 시작되느냐이지요.”

“그 사실을 통보하기 위해 전하께서 직접 찾아오신 건 아니겠지요.”

“물론입니다. 제가 오늘 대족장님을 뵙자고 한 건 피닉스 문제 때문입니다.”

“그렇습니까.”

세네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동석한 자들에게 눈짓을 했다.

한 엘프가 사울에게 문서 한 묶음을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저희가 알아낸 피닉스에 대한 정보들입니다.”

사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르멜에게 눈짓을 했다.

아르멜도 방금 전 엘프가 그러했듯 문서들을 올려놓았다.

“이건 저와 왕국 정보부가 알아낸 피닉스에 대한 정보들입니다. 마침 잘 되었군요. 이왕 모두들 모였으니 우리가 모은 정보들을 함께 살펴보지 않겠습니까?”

사울의 제안에 세네카는 곧바로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그런 세네카의 모습에 사울은 한 가지 짐작을 했다.

‘민감한 내용은 다 뺀 정보들인 것 같군. 내가 준비한 것처럼.’

당연한 말이지만, 카멜 산도, 세네카도 전적으로 믿을 수 없다.

지금은 누가 피닉스와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카멜 산의 고위 간부, 심지어 세네카가 어떤 형태로든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다.

세네카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물론 그는 사울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호감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호감과 믿음은 엄연히 다른 말이다.

세네카다 카멜 산의 간부들은 다르센 왕국의 윗선, 심지어 사울이 피닉스와 관련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서로 의심한다고 탓할 수는 없다.

지금은 난세이며, 그중에서도 피닉스는 아직도 정체조차 분명치 않은 괴물이 아닌가.

믿음보다 의심이 앞서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럼 우리 카멜 산과, 다르센 왕국이 각각 모은 정보를 모두에게 공개하겠습니다.”

세네카의 말과 함께 정보들은 자리에 모인 모두들에게 고루 전파되었다.

모두들 문서를 나눠 읽고, 교환하면서 서로가 아는 것들을 하나의 정보로 만들었다.

그렇게 카멜 산에서 제공한 정보를 모두 읽은 사울은 생각했다.

‘역시 우리나 저쪽이나 상대를 먼저 의심하는군.’

카멜 산이 제공한 정보는 대부분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양국의 몇몇 지역, 그리고 몇몇 인사들이 피닉스와 관련 있다는 내용이었다.

흥미롭게도 그중에는 ‘로터스’의 이름도 있었다.

로터스가 사울에게 죽기 전 작성된 것인지 로터스가 살아 있다는 전제 하에 기록된 게 인상 깊었다.

“…….”

유독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아이나였다.

이유는 분명했다.

카멜 산이 제공한 정보에 포함된 ‘피닉스 협력자’ 중 홉킨스 가문의 가신들이 몇 명 있었다.

개중에는 지역 경비 대장이라던가, 사울도 영주의 저택에서 본 적 있는 관리 등 무시할 수 없는 지위에 있는 자들도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영주 던칸이나, 소영주 칼랜드의 이름은 없었지만 말이다.

사울과 시선이 마주친 아이나가 눈으로 물었다.

의견을 말해도 되겠냐는 뜻임을 알아들은 사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족장님.”

아이나의 말에 세네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홉킨스 가문에 대한 부분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카멜 산에서는 우리 영지에 속한 여럿을 ‘피닉스의 협력자’로 의심하고 계시는군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지금은 개인적인 감정을 거두어 주셨으면 합니다.”

세네카의 말투는 정중했지만, 위엄이 있었다.

아이나도 더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 사울이 이어 말했다.

“그렇군요. 확실히 지금은 모든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문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리 왕국에서도 카멜 산의 몇몇 인사들을 의심하고 있으니까요.”

사울의 말에 이번에는 세네카의 호위대장, 모데아가 항의했다.

“대체 무슨 근거로 지금 카멜 산에, 그것도 간부 중에서 피닉스의 끄나풀이 있다고 의심하시는 겁니까?”

“문서에 적혀 있듯, 제가 잡은 피닉스 포로가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여러분들과는 달리 의심 가는 자를 특정 짓진 않았고요.”

“그런 말만 믿고 우리 동족을 의심하는 겁니까?”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문제예요. 카멜 산에서 왕국 사람이나 홉킨스 가문의 사람들을 의심하듯.”

“…….”

이번에는 모데아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양측의 분위기가 싸늘해진 가운데, 사울은 얼어붙은 분위기를 녹이기로 했다.

“아무튼 지금은 서로 의심할 때가 아니라 협조해야 할 때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은 모두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모인 것이니까요.”

세네카도 동의했다.

“전하의 말씀 대로입니다.”

분위기를 바꾼 사울은 다시 한번 새로 안 정보들을 떠올렸다.

여러 정보들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피닉스로 의심되는 자들’이었다.

사울 측에서는 카멜 산에 피닉스의 끄나풀이 있다고 의심했다.

반면에 카멜 산에서는 다르센 왕국, 그리고 가멜다 왕국에 피닉스의 끄나풀이 있다고 의심했다.

게다가 사울이 내민 정보와는 달리, 카멜 산에서는 의심 가는 자들의 이름까지 직접 거론했다.

양쪽 모두의 의심이 맞다면, 다르센 왕국과 카멜 산 모두에 피닉스의 끄나풀이 있는 말이 된다.

사울은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피닉스의 능력과 규모를 고려하면, 왕국이나 카멜 산에 끄나풀 몇을 심어 두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가멜다 왕국도 마찬가지다.

죽은 로터스는 분명 피닉스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나아가 안소니 백작도 피닉스와 관련이 있으리라 의심되고 있다.

지금 가멜다 왕국을 조사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다르센 왕국과 카멜 산 양쪽 모두 참여하에 카멜 산과 가멜다 왕국 모두를 조사하는 게 합리적인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지금의 사울로서는 택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왕국과 복잡미묘한 관계인 카멜 산에서 다르센 왕국 인사들을 조사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사울 혼자서 이런 결정을 내리는 건 월권행위다.

지금 사울에게 그러한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이쪽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요구를 대족장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인데.’

고민 끝에 사울은 입을 열었다.

“일단 우리가 힘을 합쳐 피닉스 문제를 처리한다는 것을 약속하는 게 어떨까요?”

말 그대로 원론적인 약속.

서로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하지만 세네카도 사울과 비슷한 생각을 하였는지, 반대하지 않았다.

“그게 좋겠습니다. 저도, 또 전하도 생각하실 부분이 많을 것이니.”

“알겠습니다. 대족장.”

* * *

원론적인 약속만 하고 회의장을 나선 사울은 따로 세네카를 찾았다.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셨습니까?”

“대족장님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피닉스의 목적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사울의 질문에 세네카는 잠시 생각하다 천천히 되물었다.

“전하께서도 그 이야기를 들으신 겁니까?”

“새로운 정보를 들은 게 있습니다. 제가 아는 이야기와 대족장님이 아는 이야기가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만.”

세네카는 조금 전 회의 자리에서 사울이 ‘새로운 정보’를 밝히지 않았다고 따지지 않았다.

아는 것을 다 밝히지 않은 건 카멜 산 쪽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세네카가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신뢰를 얻기는 어려운 법이로군요.”

“동감입니다. 지금은 서로가 서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난세이니까요.”

“난세라…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는 난세이지요.”

세네카는 사울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전생을 합쳐도 세네카가 살아온 시간의 10분의 1은 될지 의문이었다.

그런 세네카가 말하는 ‘난세’는 사울의 말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무게가 있었다.

“피닉스는 지금 율렌 섬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사울의 질문에 세네카는 천천히 대답했다.

“바람직하다고는 보지 않을 겁니다. 자기들 나름대로 섬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려 하고 있겠지요.”

“동감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말하는 ‘나은 방향’이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

“아무래도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해 좀 더 터놓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숨겨 온 것을 서로 보여 주는 것이.”

“좋습니다.”

곧 사울과 세네카는 각각 자신들이 아는 ‘비밀 정보’를 적었다.

사울은 속이지 않고 진짜 정보를 적었다.

이런 자리에서 어설픈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과연 세네카도 진짜 정보를 적었을까.

“그럼… 대족장님.”

“네, 전하.”

사울과 세네카는 각각 자신들이 쓴 내용을 내밀었다.

그리곤 둘 모두 작게 웃었다.

표현과 필체는 다르지만, 내용은 똑같았다.

‘피닉스는 다르센 왕국과 가멜다 왕국의 전쟁을 막는 것이 목표다.’

서로 속이지 않았다.

덕분에 긴장감이 흐르던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0